〈 109화 〉NO.6 아름다운 그녀가 다가온다
한아름. 이름 그대로 외모에 몰빵한 히로인이다. 나는 몸매도, 귀여움도, 다른 특성이나 개성은 보고 싶지 않다! 오직 외모만을 원한다! 그런 플레이어들을 위해 만들어진 트로피 히로인.
거기에 게임이 어느 정도 진행된 2학년에 처음 등장하는 히로인이라 그런지, 공략 자체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히로인은 공략하려고 하면 공략할 수 없다. 압도적인 외모로 생겨난 나르시즘에 의해 세상만물 누구나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당연시하는 캐릭터였으니까.
그녀를 공략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게 공략법이었다.
‘뭐, 그게 현실이 된 지금에서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다른 아이들도 게임이었을 때의 설정과 공략법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으리라.
* * *
정우의 뒷자리. 새로 책상을 들고 와 홀로 앉게 된 그녀의 자리는 금세 아이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와, 한아름이라고 했나? 너 완전 예쁘게 생겼다.”
“피부 진짜 좋네. 화장품 뭐 써? 쌩얼이야?”
잘생긴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받듯, 예쁘장한 소녀는 남자에게 관심을 받는다. 한아름은 전학 오자마자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염증 날 정도로 받아온 관심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의 경험 끝에 관심을 무시하거나 흘려 보내는 게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름은 싸구려 미소를 팔았다.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가치 없는 웃음. 그런 무가치한 미소에도 아이들은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그때, 아름의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그녀의 앞자리에 앉은 남자아이. 그는 그녀가 전학생이건 뭐건 관심 없다는 태도로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뻔하다 뻔해.’
저런 아이들의 특징은 간단했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걸로 관심을 끄는 아이들이었다. 자신이 끝까지 관심을 주지 않으면 금방 포기하고 자신에게 다가올 그런 아이들.
아름은 일부러 그의 옆자리에 앉은, 그녀에게선 대각선 앞에 앉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어, 응? 나?”
“그래. 너, 이름이…….”
“아, 나는 김호라고 하는데…….”
“그래, 호야.”
정우의 짝궁. 호에게 말을 건 그녀는 자연스레 눈웃음지으며 그의 마음을 살살 간질이기 시작했다.
“나 오늘 막 전학 와서 그런데, 책 좀 같이 보지 않을래?”
“나, 나랑?”
“응! 너랑.”
정우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신경 쓰지 않고 책상에 엎어져 공책에 낙서를 끄적거렸다. 1레벨 스킬이었지만, 재능이 있는 건지 점점 더 나은 그림체로 바뀌었다.
스킬에만 의지할 때는 무언가를 할 때는 몸이 기술에 따라가지 못하는 감각을 종종 느끼곤 했는데, 이런 식으로 직접 익힌 기술은 그렇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감정을 주곤 했다.
자신에게 일절 관심을 끊고 낙서를 끄적이는 정우를 힐끔, 바라본 아름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고선 호를 불러들였다. 정우의 짝궁은 주변 눈치를 살살 보다가 금세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아, 미안. 내가 눈이 좀 안 좋아서…… 조금 붙어도 되지?”
“어, 어! 그럼.”
‘쉽네. 쉬워.’
전학 오자마자 남자를 한 명을 함락시킨 그녀는 속으로 남자들의 한심함에 고함지르며 더욱더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정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늦어도 오늘 하교 전까지. 빠르면 점심 전에. 정우를 함락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그렇게 함락을 하고 나면? 그녀가 딱히 무얼 하지 않아도 골수까지 팔아 그녀에게 바칠 노예가 완성되는 거다.
아름은 호와 짝 달라붙어 수업을 들었다. 정우의 관심을 최대한 받으려고.
함락이고 뭐고, 그녀의 마음이 이미 그에게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 *
“아, 정우야!”
점심시간. 정우는 평소처럼 도시락을 챙겨 밴드부실로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은혜가 정우가 있는 교실로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정우를 보자마자 당당히 교실로 들어와 그가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뺏어 들었다. 그건 한시라도 빠르게 점심을 먹고 싶다는 탐욕이 아니라, 정우의 짐을 덜어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나. 안 그래도 어려 보이는 그녀가 그런 행동을 취하자 마치 밥을 달라고 짖어대는 아기새처럼 보였다.
“내가 들어도 되는데.”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이런거라도 해야지.”
“여기는 도시락 먹어도 되나봐?”
그때, 아름이 자연스레 정우와 은혜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곤 슬쩍 은혜를 훑어보며 얼굴과 몸매를 파악했다. 머리 꼬라지 하곤. 그리 똑똑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찐따년이랑 사귀는건가?’
아름이 보기에, 은혜는 그리 귀엽지 않았다. 자신의 외모를 100점으로 보았을 때 한 70점쯤 줄 수 있을까. 얼굴에 분칠만 하면 누구나 70점쯤 된다는 걸 생각해봤을 때. 은혜는 그냥 흔녀였다. 길바닥에 널리고 널린 흔녀.
‘뭐야, 튕기는 게 아니라 애인이 있는 거였어? 그것도 이런 찐따년?’
그럼 쉽다. 애인이 있다고 방심하고 있는 남자가 가장 뺏기 쉽다. 하물며 그 애인이 저런 평범한 흔녀라면 더더욱.
“신기하네! 도시락은 언제부터 먹었어?”
“……아는 사람?”
낯가림이 심한 은혜가 정우의 뒤에 붙어 아름이를 경계했다. 그 모습에 더더욱 자신감이 생긴 아름이 정우에게 들이댄다.
“안녕? 한아름이라고 해. 오늘 전학왔어.”
“전학생……?”
“응. 전학생.”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름이와 같은 인싸를 신물 날 정도로 상대해본 경험이 있는 은혜는 그래서 어쩌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럼 정우랑 모르는 사이잖아.”
“친구지. 친구.”
“친구? 너 정우 이름은 알아?”
“그럼. 정우. 하정우.”
아름이는 슬쩍 눈을 돌려 정우의 명찰을 체크했다. 순식간이었다. 초고속 카메라보다 빠른 눈놀림이었지만 은혜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지금 명찰 봤지?”
“아닌데?”
태연자약하게 시치미를 떼도, 은혜는 결코 믿지 않았다. 인싸라는 놈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입에 발린 듯 거짓말을 일삼는 족속이니까. 무엇보다 정우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긴다는 일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 밥 먹으러 가야하니까. 너도 그만 가지?”
“나 오늘 처음 와서 식당이 어딘지 모르는데.”
“그럼 굶든가. 정우야, 가자!”
“그래.”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정우는 은혜의 말을 듣고 교실을 나섰다. 교문을 나서기 전에 힐끔 아름을 보고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것도 잊지 않았다.
‘슬슬 관심을 보이는 거 같은데.’
그녀도 결국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히로인이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얼굴이라면 연예인이든 모델이든 배우든.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원하는 남자를 골라잡을 수 있을 테니까. 정우가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역으로 그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꼬시려고 달려드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중학생 때까지 처녀를 지킨다는 설정도 무리가 많지.’
하물며 히로인들은 모두 처녀였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부모가 극진대우를 하며 보살핀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그녀 정도 되는 외모라면 싫어도 하게 되어있다. 이 세상엔 앞뒤 안 가리고 들이대는 일진남들이 잔뜩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은혜도 우림이도, 다른 애들도 모두 처녀였지.’
그렇다면 그녀도 처녀겠지. 그녀도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일테니. 처녀가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히로인의 처녀를 먹는 건 상당한 포인트를 지급하니 신경 써야 할 부분 중 하나였다.
‘처녀면, 여러가지로 준비해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우는 부실로 향했다.
* * *
“오늘도 잘 먹었어.”
“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응. 다녀와.”
부실. 식사를 마치고 정우가 털래털래 화장실로 향한다. 그가 완전히 부실에서 벗어난 걸 확인한 은혜는 목소리를 깔고 다른 애들에게 소식을 전한다.
“정우네 반에 전학생이 왔더라.”
“……그런데?”
“정우한테 꼬리 치던데.”
“오올, 우리 은혜. 그런 눈치도 있어?”
우림이 그녀를 비웃으면서 그렇게 읊조린다. 은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진지하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우림이는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그래, 우리 은혜. 항상 노고가 많네. 항상 버림받을까 걱정이지?”
“……뭐래.”
“전학생이 꼬리 치면 뭐?”
우림은 은혜를 보며 너의 마음은 고작 그 정도냐 비웃었다. 전학생이 꼬리를 쳐?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령 정우가 꼬리 치는데 넘어가 그녀와 사귀겠다고 말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넘어가라고 해. 정상적인 년이라면 우리를 보고 질려서 떠나갈걸?”
그건 정우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압도적인 자신감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동시에 어딘가 망가져 있지 않은 이상 정우에게 선택받지 못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