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NO.6 아름다운 그녀가 다가온다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 같아서, 바람이 불면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다가도, 바람이 멎으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반 아이들이 모두 같이 모여 있을 땐 동조압력에 의하여 찬성하였던 아이들도, 집에 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귀찮고, 지루한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많네.”
“다들 날 보러 온 거 아닐까?”
“그럼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먼저, 같은 반 아이들 15명이 참가하기로 한 단체 스터디는 다음 날 3명, 그다음 날 2명이 빠져 10명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모인 아이들은 서른이 넘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정우의 탓도 있었다. 그는 같은 반 아이들과 공부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걸 아깝게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다른 반 친구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다른 반 친구를 불러들였다. 그 중에는 아름이를 보러 온 아이들도 있었고, 그저 같은 반 친구보다 다른 반 친구가 편했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적으면 한 명, 많으면 세 명을 불러들이니. 순식간에 불어난 인원이 서른 명이나 되었다.
‘개판이네.’
그리고 선생도 아닌 정우가 서른이나 되는 학생을 일일이 통제할 수 있을 리 만무. 스터디는 본래의 목적을 잃고 시험시간 전 마지막 일탈이라는 느낌으로 변질되려 하고 있었다.
사각사각, 아이들의 청각을 때리는 우림이의 샤프 소리만 아니었다면.
“……우림이는 왜 왔어?”
“몰랐어? 쟤 정우랑 사귀잖아.”
“정말? 내 친구는 다른 애랑 팔짱 끼고 걷는 거 봤다던데.”
태생이 상류층, 타고난 카리스마에 더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분위기는 금세 아이들을 압도했다. 물론 홀로 서른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삼인성호라고, 세 사람만 있으면 분위기를 마음대로 바꾸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이 중 반이 분위기에 휩쓸리는 평범한 아이들이었으므로, 세 명만 꼬시면 열다섯 명이 따라온다.
그렇게 스무 명이 묵묵히 책을 펼치고 노트를 꺼낸다. 다른 열 명의 아이들도 주춤주춤, 책을 꺼낸다. 공부는 하지 않아도 이 분위기에 거스를 정도로 강단 있는 아이들은 없었다.
“……고마워.”
“뭘. 나중에 갚으면 되지.”
정우가 조용히 속삭이자, 우림이는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 갚아라. 그건 다음 스터디를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뭣하면 지금 갚아줄까?”
“후후, 우리 정우. 쌓였나 봐?”
“싫으면 말고.”
남들이 보면 연인관계의 말투정이 오고 가고, 건너편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 아래로 우림이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윽!”
“뭐하니?”
그러나 우림은 그런 은혜의 움직임쯤은 읽고 있다는 듯, 가볍게 의자를 끌어 발차기를 막아냈다. 단단한 나무 의자를 가격한 은혜는 조그마한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 아파?”
“어? 아니. 정말 괜찮아. 걱정 마.”
정우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어보자,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물을 닦아냈다. 그 다음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펴며 하품으로 인해 눈물이 나왔다 연기했다.
“아, 아아─ 졸리네. 졸려.”
“자러 가. 너는 공부 하나 안 하나 비슷하잖아?”
“……아, 아하하. 그러니까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지.”
“그래? 그렇게 공부하고도 그 성적이야? 나였으면 빠르게 다른 길 찾았을 거 같은데…….”
은혜의 성적이 나쁜 건 아니었으나, 태생적으로 머리 좋은 우림이에게 있어선 공부하지 않아도 나오는 성적에 불과했다. 자신의 험담이긴 하지만 틀린 말 하나 없는 대답이었기에, 은혜는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속을 삭히지도 못한 채 그저 노려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네. 정우랑 결혼해서 현모양처나 할까?”
“현모양처 좋네. 근데 정우가 불쌍하다. 내가 리얼돌 하나 사줄테니 그거랑 결혼하는 건 어때? 잘 어울리겠다.”
“야, 작작해라 진짜.”
“참나, 내가 뭐 했다고?”
도서관에서 싸움을 시작한 두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며, 다른 아이들도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기껏 만들어 놓은 학습 분위기가 망가져 간다.
그 사실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물색하던 정우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 싯팔─.”
맹수가 울부짖는다. 백수의 왕과 같은 무력을 지닌 한 소녀의 욕지거리 앞에서 모든 초식동물들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을 지킨다. 먼저 움직이는 동물이 가장 먼저 잡아먹힌다.
“니들 여기 놀려고 왔냐? 공부하러 온 거 아니야?”
이 장소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소녀, 마리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아이들은 말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음에 더불어, 애당초 그녀의 말이 틀렸다 한들 그녀에게 머리를 들이밀 생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개 쳐 박고 공부하자. 나 유급하면 니들 다 죽여 버린…….”
“마리. 쉿.”
“……조용히 하자.”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그녀를 제압한 정우는, 곧장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옆자리로 향했다. 그녀가 괜히 짜증을 부린 게 아니다. 저건 문제가 풀리지 않아 도와달라는 그녀 나름대로의 표현이었다.
‘어려운 문제 하나만 더 나오면 사람 하나 죽이겠네.’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그녀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하지만 정우는 그 분위기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접근을 껄끄러워하기에, 쑥쓰러워 하기에 만들어낸 분위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뭐가 안 풀려?”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 보자─ 이건 이렇게 풀면…….”
서로 싸우다가 정우와의 알콩달콩한 이벤트를 놓쳐버린 은혜와 우림은, 마리를 가만히 노려보다 다시금 서로를 노려보았다. 미리 짜기라도 한 듯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둘이 사귀냐?”
옆에서 그 장관을 구경하던 아름이 대뜸 그렇게 내뱉자, 은혜와 우림은 죽일 듯이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또한 동시였다.
“아…… 미안. 말실수했네.”
너무나 매서운 눈빛이었기에, 아름은 절로 꼬리를 내리고 물러섰다. 안 그래도 우림은 그녀가 반한 주인이지 아니한가. 괜히 밉보였다가 좋을 일은 없다.
정우가 마리를 가르치고, 우림과 은혜는 소강상태에 들어서 서로 각자의 공부를 시작하고, 같이 온 수십 명의 아이들도 다 같이 공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다.
그러나 항상 초를 깨는 사람이 있다. 그건 대부분 집중 못 하는 아이들 중에서 나타난다.
“아,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갈 사람?”
“어, 나! 같이 가자!”
“나도!”
순식간에 열댓 명의 아이들이 자리를 뜬다. 각자 친한 사람이 다르고, 먹고 싶은 게 다르니 이해는 간다. 그러나 정우는 이 공부회가 지금 이 순간 끝장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써 저녁이네.’
저 아이들은 주변 식당에서 가볍게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고 숨 좀 돌리자는 핑계로 PC방이나 노래방, 당구장에 가자고 할 것이고.
그리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또 아예 안 하지도 않았다. 보상심리는 아주 작은 노력에도 큰 보상을 내리도록 작동한다. 그들이 돌아왔을 땐 땅거미가 내리 앉고, 달조차 어둠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는 시간대이리라.
“우리도 갈까?”
“……벌써?”
“이 다음은 집에 가서 하자.”
어차피 무너진 공부회. 정우는 무너진 탑을 공들여 다시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쓸 노력이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예를 들면, 오랜만에 4P라든지.
“아, 정우야……. 나도 가도 돼?”
그때,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스터디룸에 남아 있던 아름이 조심스레 물었다. 마침 그녀를 소개할 필요도 있었겠다. 정우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아름이 너도 가게?”
“그럼 나도 가야지.”
“나도.”
주축이 되었던 그녀가 사라지자, 공부회가 급격히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당연한 일이다. 공부회가 만들어진 이유이자 기둥이 사라졌는데 버틸 여력이 있을리가.
공부회는 그대로 끝이 나고, 정우는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은혜, 우림, 마리, 아름까지. 이만한 인원에 집에 들리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 * *
“……뭐라고?”
“자, 소개할게. 아름이라고 해. 애인……은 아니지만, 뭐, 그 비스무리한 거?”
“아니, 그 전에.”
“아, 얼마 전에 같이 섹스했을 때. 얘도 있었어.”
“이 미친놈아!”
마리가 격분하며 소리쳤다. 정우는 징징 울리는 귀청을 틀어막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아니 썅! 진짜 남자만 아니었어도! 아니다. 넌 여자지? 네가 대신 맞아라!”
마리의 철퇴가 아름이를 향해 쏘아졌다. 상처는 남기지 않고 고통만을 주는 여러 기술을 몸으로 받아내며, 아름이 흘린 건 고통이 아니라 쾌락 섞인 신음이었다.
“아흐읏─.”
“……미친년, 설마 느낀거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마리도 그녀를 몇 대 때려본 뒤, 그녀의 성벽을 눈치챘다. 그리고 정우를 번갈아 보며 안 되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훌륭한 싱글 렉 테이크다운이 작렬했다.
“아, 아아! 야, 진짜 아파! 부러져!”
“넌 그냥 부러져 봐야 해! 미친놈 아니야 이거!”
관절을 공격하는 서브 미션을 몇 개나 몸으로 맞고 나서, 정우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