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NO.7 신주희는 신중하다.
아이들의 악의는 때론 어른보다 잔혹하다. 아이의 무한한 상상력이라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무한한 악의와 동일하다.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 않은, 시대와 윤리를 뛰어넘은 행위.
“……말은 드럽게 안 들어요.”
몸에 쫙 달라붙는 차파오를 입은 담임은, 속옷이 보일 정도로 짧은 밑단을 잡아당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잘 보면 화장 밑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정색으로 수치심을 가리고 있었다.
‘살이 쪘니 뭐니 하더니…….’
그 짧은 사이에 운동이라도 했던걸까, 그녀의 몸에서 눈에 띄는 군살은 없었다. 아이들도 자신들보다 몇 살이나 많은 선생님의 몸매에 놀란 듯 감탄을 터트렸다.
“와─ 쌤 운동하세요?”
“니들이 이 나이 돼봐라. 숨만 쉬어도 살쪄. 운동 안 하면 골로가는 거 순식간이다.”
“에이, 쌤이 군것질을 하시겠죠.”
“진짜라니까.”
애들이 믿든 말든, 선생님은 자기관리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공부를 핑계로 자기관리 하지 못한 몇몇 아이들의 가슴에 비수가 박혔다.
[잠시 후, 개회식이 시작되오니.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들었지? 얘들아. 나가자.”
방송이 나오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주춤주춤 운동장으로 나갔다. 다른 반 선생님들도 상당히 개성 넘치는 복장이었지만, 그녀만큼 시선을 끄는 복장을 한 선생님은 없었다.
“아하하, 고생 많으십니다.”
“아, 네. 다 똑같죠 뭐…….”
살살 등골에 땀을 흘러 내리는 5월의 땡볕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옆 반 담임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신주희는 시선을 피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같은 선생이라지만, 아니. 같은 선생이기에 더더욱 창피했다. 신주희는 눈을 힐끔 돌려 옆 반 담임의 복장을 훑어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싸구려 정장은 폼이 넉넉하지 못해 몸에 쫙 달라붙었다.
결혼 시장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고등학교 남교사의 단련된 몸은 딱 보기에도 여심 여럿을 뒤흔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예? 아, 네. 뭐.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그녀의 입이 떡 막혔다. 수십 년 묵은 처녀의 머리는 남자에게 그럴싸한 말을 건네는 일조차 어려웠다. 학생들에겐 염세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지만, 그건 3년만 지나면 영영 얼굴을 볼 일 없는 학생들에게나 그런 거고,
그보다 더 오래. 어쩌면 정년까지 볼지 모르는 선생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보일 순 없었다.
“……선생님도 멋지시네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나누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다. 떠들썩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느라, 앞쪽에 서 있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핑크빛 분위기가 설설 풍긴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뭐야, 저기 분위기 왜 이래?’
물론 같은 반에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는 정우는 아니었다. 보통 정우처럼 친구가 없다면 고개를 처박고 땅에 기어가는 개미를 새거나, 그림을 그리겠지만 정우가 친구가 없지, 친화력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선생을 관찰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했다. 원래라면 플레이어의 히로인이어야할 선생이 다른 반 선생과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그 장면을.
‘으음, 한 사람 빠진다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나?’
애매했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하렘 루트라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1학년 때 등장하는 히로인을 모조리 공략했으니 이게 하렘 루트가 아니라면 무엇이 하렘 루트란 말인가?
하지만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히로인들이 서로를 지탱해주는 하나의 퍼즐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 단 한 사람도 빠지면 안 된다.
건물은 하나의 지지대만 빠져도 와르르 무너진다.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아 보이는 주춧돌이, 실은 건물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처럼.
학생들의 연애가 주된 이 세상에서도, 어른이면서 선생인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터.
‘근데…… 선생은 어떻게 꼬시지?’
정우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았다. 남녀공학 고등학교 선생. 어느 날 갑자기 여고생이 다가와 말한다.
[저, 선생님을 좋아해요.]
1. 받아들인다.
2. 거절한다.
여기서 1을 선택하는 건 미친놈이다. 사방에서 손가락질받다가 교사직에서 경질, 자칫 잘못하면 감옥까지 갈 수 있는 행위다. 그녀가 상식 박힌 사회인이라면 첫 번째 선택지는 고르지 않겠지.
그럼 결과는 2. 히로인을 꼬시는 데 실패했다. 그렇게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 사실, 정상적인 교사라면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랑 사귈 리가 없잖아?’
문제는 그거였다. 현실에선 온갖 장해물들이 덮쳐와 꿈과 로망을 깨부쉈다. 게임에선 어쨌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게임은 미연시가 아니다. 미연시를 표방한 야겜이다.
밀어붙인다. 섹스한다. 수준의 선택지가 전부인 게임에서, 대체 뭘 하면 학생이 교사와 연애할 수 있는지. 정우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냥 저 선생이 막장 변태라서, 학생이 들이대면 못 참고 덮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했으나, 게임에서의 묘사를 떠올려보면 그런 건 아니었다. 플레이어가 밀어붙이긴 해도, 거절하는 묘사가 나온다. 한 번 몸을 겹친 이후에도 가장 주인공을 많이 밀어내는 게 바로 담임 선생님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더 이상 두 사람이 친해지는 건 막아야 한다는 거였다. 일개 학생이 어떻게?
‘어떻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걸로 체육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학생 여러분들은─]
교장의 오랜 연설이 끝나고, 대회가 시작하자 운동장 계단에 반별로 나눠 앉기 시작했다. 반이 전부 모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경기가 시작한다.
정우는 곧장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있을 모든 경기에 출전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선생님.”
“응?”
“우리 반이 일등 하면, 고기 사주시는 거 맞죠?”
“일등 하면. 그래, 뭐. 열심히 해봐.”
“그 말, 꼭 지키세요.”
반의 유니폼인 고양이귀 후드를 뒤집어 쓰며, 정우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 * *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정조관념이 역전되어 있었다. 남자보단 여자의 성욕이 더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그리 많은 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육신의 강함마저 뒤바뀌었다고 할 지어도 시스템을 가진 정우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신장 183cm. 몸무게 75kg. 체지방률 13%. 나날이 성장하던 정우의 신체는 온갖 스킬과 아이템으로 강화되어, 원래 세상을 기준으로 보아도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했다.
뿌드득─
팔을 주욱 당기며 어깨를 풀었다. 동시에 등근육을 자극시키는 스트레칭이기도 했다. 축구에서 등근육이 어디에 쓰이냐 생각하겠지만, 자고로 근육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내가 찰 게.”
“어, 응.”
연습게임에서는 전력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력을 다할 필요가 생겼다. 주목을 끌 이유가 생겨났다.
‘쓸데없는 관심도 조금 생기겠지만.’
뭐, 관심을 안 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삐이이익─ 심판이 휘슬을 불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선공권을 가져온 정우네 반 아이가 툭, 공을 건드렸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우는 곧장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몸을 틀어 회전을 더한다. 주먹을 날릴 때 발에서부터 회전을 더하듯, 발을 날린 땐 상체에서부터 회전을 더한다.
태평양처럼 드넓은 등근육에서 시작한 회전력이 순식간에 허리를 타고, 허벅지. 발끝에 닿는다. 정우의 다리는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공에 명중했다.
퍼어엉!
순간 대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축구공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다. 반달을 그리며 수십 미터를 날아간 공은 골대를 넘어 골망을 흔들었다.
삐, 삐이이이이익!
“고, 골인!”
심판이 휘슬을 불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정우에게 쏠린다. 정우는 내심 올라오는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
‘아, 이런 걸로 좋아하면 안 되는데.’
이래서 관종을 하는건가 싶었다.
* * *
뻐어엉─!
공이 하늘을 난다. 멋진 궤적이다. 반할 거 같다. 공이 날아가는 걸 바라보던 신예는 방금전 킥을 날린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런 사람이 우리 학교에 있던가?’
축구부엔 저런 사람이 없던 거 같은데. 학년을 확인하니 선배였다. 그렇다면 못 볼 수도 있지. 그보단 저런 킥을 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두근거린다.
‘몇 반이지……?’
““와아아아아아!”“
순간, 반응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뒤늦게 함성을 터트린다. 공을 차버린 정우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함성에 맞춰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을 자각하며, 그녀는 그라는 존재를 뇌속에 각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