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NO.7 신주희는 신중하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덮쳤다고.”
“기억 안 나세요?”
“아니, 나긴 하는데…… 그게 그러니까…….”
거짓말이었다. 어제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건지,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뭐했지? 들어와서 뭐 했지?’
길 가던 남성에게 추파를 던졌던 건 기억난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 안 난다. 운 좋게 남성이 따라왔던 건 기억난다. 그 다음이 기억나질 않는다.
“아무튼, 일단 등교부터…….”
“오늘 토요일인데요.”
“……그랬지, 참.”
출근이라는 핑계로 이 자리를 벗어나려던 주희는 속으로 한숨을 뻑뻑 내쉬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씻고 나와서 살짝 젖은 머리카락.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런닝셔츠.
꿀꺽─
‘왜, 왜 저렇게 입고 다녀?’
물론 이제 막 씻고 나왔으니, 속옷 차림이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나온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정적이었다. 남고생 남고생 말이 많던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집에서 아빠가 저러고 다니면 아무 생각도 안 들었는데.’
뱃살 툭 튀어나오신 부모님이 난닝구 차림으로 돌아다닐땐, 그냥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근육질 몸매의 남고생이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니,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살짝 끼는 런닝셔츠가 정우의 젖꼭지를 사정없이 노출하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무접촉사정을 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이, 일단! 옷부터 입고! 그리고 아침 먹은 다음에 얘기하자!”
“네? 예, 뭐. 알겠어요.”
주희의 말을 들은 정우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속이 다 비치는 흰색 와이셔츠였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녀는 이 시간에 문을 연 음식점이 있을까 머리를 긁적이며 음식광고지를 펼쳤다. 정우가 뭘 좋아하려나 생각하고 있는데 정우는 곧장 앞치마를 챙겨입고 주방으로 향했다.
“어, 뭐해……?”
“네? 아침 먹자면서요.”
“그랬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해드릴게요.”
“어, 어?”
뭘 해주겠다는건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기름 튀기는 냄새와 냉장고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아니, 시켜먹으면 되는데…….”
“토요일 아침부터 문 연 가게가 얼마나 된다고…… 그냥 앉아계세요. 아, 김치찌개 좋아하시죠?”
“으, 응.”
“김치 좀 쓸게요. 아, 밥이 다 쉬었네. 할 거 없으면 나가서 햇밥이나 좀 사 오세요.”
“응…….”
그녀는 떡진 머리를 모자로 감추고, 힘없이 터덜터덜 집 근처 슈퍼로 향했다. 거기서 즉석밥을 구매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완성된 김치찌개가 부글부글 끓으며 집안을 냄새로 물들였다.
“그것 좀 돌려주세요.”
“알았어.”
그녀는 떨떠름하게 햇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식기를 세팅했다.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우가 김치찌개와 계란후라이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자, 잘 먹겠습니다…….”
얼떨결에 남고생, 그것도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요리를 대접받은 주희는 숟가락으로 찌개를 퍼 한 입 들이켰다. 분명 자신의 집에 있던 재료를 사용했을 텐데 믿을 수 없을만큼 맛있었다.
“……맛있네.”
“감사합니다.”
정우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며 식사를 계속했다. 밥 앞에서 들뜨지 않는 그 진중한 모습에 그녀도 허리를 펴고 음식에 집중했다.
‘조금 싱거운 거 같은데……?’
반숙이 된 계란프라이는 조금 싱거웠다. 그러나 몇 번 음식을 먹던 그녀는 그마저도 그녀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싱겁게 느껴졌던 프라이는 찌개의 국물과 같이 먹었을 때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했다.
어느 한 가지 음식도 딱히 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맛있다. 그러나 그 음식을 한 가지 요리로서 먹었을 때. 그녀가 먹어본 그 어떤 가정식보다 맛있었다.
‘아빠한테 미안하네.’
솔직히 주부경력 수십 년의 아빠보다 요리를 잘하는 듯했다. 그녀는 아침을 잘 먹지 않는 타입임에도 그러했다. 허겁지겁 밥그릇을 들고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후우…… 잘 먹었다.”
“다 드셨어요?”
“어? 응. 아, 설거지는 내가 할 게!”
“아뇨, 앉아 계세요.”
정우는 주희를 방안으로 밀어 넣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는 그를 거실에서 몰래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으면, 주희의 마음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이래서 결혼결혼 하는 거구나…….’
확실히, 이런 남편이 생긴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듯했다. 밥 맛있고, 얼굴 잘생겼고, 몸 좋고. 거기다 어리기까지!
‘행복하다.’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던 공무원이 되고, 남부럽지 않은 교사라는 직업을 얻었지만.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항상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느낌이었다.
그러나 오늘, 학생이랑 사고를 치고. 그 학생이 가정주부처럼 행동하니 행복했다. 이 행복이 결혼생활을 임시로 느끼면서 얻는 행복인지, 아니면 정우가 그런 일을 해주었기에 느끼는 행복인지는 몰랐다.
확실한 건…….
‘미친년. 이 상황에 행복이란 말이 나오냐?’
그녀는 자기 학생을 따먹은 성범죄자였단 거였다! 막말로 정우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그녀가 정우네 집 설거지를 하고 있어도 모자랐다.
“선생님?”
“어, 어! 왜?”
“아뇨, 간식 드실래요? 냉장고 보니까 과자가 있던데. 유통기한이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아, 아아. 그거. 응. 먹어도 돼. 올해 받은 거야.”
“그럼 꺼낼게요.”
정우는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과자를 꺼내 그릇에 진열했다. 마치 자기 집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고, 덕분에 주희는 자신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곧이어 정우가 가져온 과자를 커피에 적셔 깨작거리면서, 그녀는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려도 꺼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처녀였고. 상대는 고등학생이었으니.
경험도 없고, 뭐라 할 말도 없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자 정우가 먼저 입을 연다.
“저한테 할 말 없어요?”
“……미안.”
“정말요?”
“아니, 근데 이건 너도…… 아니다. 미안. 말이 헛나왔어.”
“잘했어요.”
억울하다. 기억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몰리니까. 그게 너무나 억울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정우에게 짐을 떠넘길뻔했다. 이 어린 학생에게. 자신의 학생에게.
그건 어른 된 도리가 아니다. 선생 된 도리도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그래선 안 됐다. 그녀가 속마음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는 걸 정우도 잘 알고 있는지, 정우는 그녀를 칭찬했다.
“만일 선생님이 여기서 제 탓을 하셨더라면…… 저는 아마 엄청 실망했을 거에요.”
어른이라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실수건 고의건, 어른으로서의 책무였다. 만일 그걸 던져버린다면. 정우는 제아무리 히로인이라도 그녀를 멀리했으리라.
책임을 지지 못하는 어른은 어린애보다 못한 존재니까. 정우가 괜히 손댄 히로인들에게 잘해주는 게 아니었다. 정우는 어른이니까. 겉모습이 열여덟이라고, 속까지 열여덟인 건 아니니까.
“선생님. 어젯밤에 선생님이 저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요?”
“뭐, 뭐라고 했는데?”
“옆구리가 시리다니, 결혼하고 싶다니. 뭐, 그 나이대 여자들이 많이 하는 말?”
“아, 아하하. 그랬구나…….”
부끄러웠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학생에게 업혀 그런 얘기를 중얼거렸다는 사실 자체가 창피했다. 사실 정우가 학생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선생이었어도 수치심에 고개를 못 들었을 테니,
“선생님. 지금은 어때요?”
“……응?”
“지금도, 옆구리가 시려요?”
주희는 정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한 즉시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 여겨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등학생한테 동정받는 고등학교 교사라니.
“어. 엄청 시렵다.”
“왜요? 이렇게 잘생기고, 요리 잘하고, 밤일까지 잘하는 제자가 있는데?”
“푸흡!”
밤일을 잘한다니, 그게 고등학생 입에서 나올만한 소리인가! 그녀는 경악했으나, 정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들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에이, 저도 남들 앞에선 안 하죠.”
‘남들 앞에선 안 한다고?’
그럼 뭔가, 지금은 남들이 없으니까 한다는 소리인가?
이런 식으로. 이십 년 넘게 쌓인 처녀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정우가 일부러 그런 언동을 취한 것도 있고, 그냥 그녀가 너무 처녀가 심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일선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선생으로서의 윤리. 여성으로서의 본능이 맞부딪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과 본능의 싸움은 언제나 본능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본능은 현재의 달콤함을 추구하고, 이성은 미래의 안락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여자다.”
“알고 있는데요?”
“……모르는 거 같은데.”
손을 댈까 말까, 주희는 고민했다. 본능을 따라 선을 넘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여전히 이성에 의해 갈등했다.
‘정말이지.’
처녀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정우는 내버려 두었다간 한 삼십 년쯤 후에 자신에게 손을 댈 법해 보이는 선생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가슴께로 당겼다.
“……지, 진짜 괜찮은거지?”
“이미 한 번 신나게 따먹으셨으면서…… 아니면 선생님. 혹시.”
─처녀세요?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그녀의 이성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이 나이까지 경험이 없었다는 수치심과 열등감이 그녀를 등 떠밀었다.
“아아, 그래. 처녀였다. 어쩔래?”
“어, 정말요? 그럴 줄은 몰랐는데…….”
“시끄러워! 너랑 한 번 했고, 지금도 할 거니까! 이제 처녀 아니야! 됐냐!”
그녀가 본인의 입으로 말을 꺼냈다. 너에게 손을 대겠다고. 학생과 선생이라는 관계는, 지금 이 순간 잊겠다고.
정우는 씨익 웃으며 아까 전 숨겨두었던 휴대폰을 슬쩍 바라보았다. 녹음 중인 휴대폰은 녹색으로 계속해서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