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7화 〉NO.2H 수학여행 (137/218)



〈 137화 〉NO.2H 수학여행

아침 5시. 수학여행 첫날. 정우는 사복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평일 아침에 교복이 아닌 옷을 입는  오랜만이라 생소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한 정우는 반 아이들이 모여있는 자리로 향했다. 각자 멋을 낸 아이들의 모습을 훑어보던 정우는 이렇게 입어봐야 보여줄 사람도,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다는  떠올리고는 뺨을 긁적였다.

원래 세상에선 할 말이 없으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라도 볼 텐데. 아직 발전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그런 건 꿈도  꾼다.

어쩔 수 없이, 정우는 같은 조가 된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잘 부탁해.”

“어, 음. 어 그래.”

3인조는 정우를 힐끔 훑어보고는 다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우는 그 뒤에서 홀로 어색하게 시간을 보냈다. 다른 반에 있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언제 출발할지 모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갈 때까지 혼자네.’

물론 조별 여행이라고 조끼리 다니라는 법은 없으니, 제주도에서 다 같이 만나 새로운 조를 꾸리겠지만…… 학교에서 그런 걸 허락해줄 리 없으니 몰래몰래 다녀야겠지.

“자자, 얘들아. 버스에 타라.”

“네에.”

선생의 말에 아이들에 버스에 올라탄다. 그리고 잠든다. 배를 타러 가기 위해 이른 시간에 학교에 모였기 때문에 원래라면 자고 있을 학생들은 금세 잠이 들었다.

그러나 하루 3시간 정도만 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우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항구가 있는 곳까지 6시간은 걸리니, 도착하면 점심시간이었다.

‘추억이네.’

이런 대형 버스를 빌려 단체로 여행을 가는 것도, 대한민국 내부라고는 하지만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것도. 모두 오랜만이었다.

나이를 먹은 이후엔 기회가 없다. 예전에는 학교라는 게 그저 자유를 억압하고, 체험도 별로 시켜주지 않은 감옥 같은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되돌아보니 의외로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 창밖을 구경하던 정우는 스르륵 잠들었다.

* * *

찰칵.

카메라의 셔터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간다. 정우는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옆자리 남학생들이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뭐지……?’

정우는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자면서 흐트러진 건지, 복근이 노출되어 있었다.  정도야 뭐. 정우는 털털 옷을 털어내며 복부를 가렸다.

일어난 김에 버스 앞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어느덧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도 한참 남았네.’

그때, 버스 내부에서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아, 잠시 후 휴게소에 도착할 예정이니, 화장실에 가거나 할 사람들은 30분 이내로…….]

학교에서 3시간. 드디어 휴게소에 도착했다. 정우는 아침이라도 때울  휴게소에서 뭘 사 먹을지 고민했다.

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소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한꺼번에 버스에서 내려 휴게소로 향했다. 대부분 화장실부터 들렸지만, 정우는 곧장 매점으로 향했다.

“닭꼬치 세 개요.”

“네.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배부르게 고기로 배를 채운 정우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내고, 델리만쥬 한 봉지를 사 입안에 가득 넣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학여행 시즌인 건지, 다른 학교로 보이는 애들이 많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정우는 우림이를 찾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우림이가 제일 커서 제일 찾기 쉬우니까.

‘어디보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 특출난 가슴을 찾는다. 과연  인파 속에서도 우림이의 거유는 홀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림─.”

“저기, 혼자 왔어?”

그때, 다른 학교에서 온 여학생 몇 명이 정우에게 말을 걸었다. 홀로 있으니 친구 없는 아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번 생이나 저번 생이나, 혼자 있으면 쉬워 보인다고 생각하는  매한가지였다. 용기 있게 말을 걸어올 외모는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 일행은 어디 있는데?”

“여기.”

정우의 목소리를 듣고 찾아온 우림이가, 당당하게 정우를 껴안으며 여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커다란 폭유가 그녀의 매력을 깎아 먹는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미소녀였다.

“어…… 애, 애인이 있으면 말을 하지.”

얼굴로든 몸매로든 상대가 되지 않을 우림이가 나타나자, 여학생들은 그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우림이는 그대로 정우의 옆자리에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아아, 심심해. 정우야 차라리 우리 버스 안 탈래?”

“자리 없잖아.”

“바꿔달라고 하면 되지.”

“누구한테?”

“으음…… 아무한테나?”

누구한테 부탁하더라도 결코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 알고 있는, 대중을 장악하는 친화력과 권력을 가진 그녀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정우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자리를 이득을 취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가면 같이 다닐거잖아. 조금만 참아.”

“그렇긴 하지만,  몇 시간도 아깝단 말이야.”

“반 친구들이랑 놀아.”

“우리 정우가 쓸쓸할까 봐 그러지.”


“……들켰어?”

우림이는 정우에 관한  뭐든 알고 있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우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우림이랑 같이 가면…… 다 우림이 친구일 거 아니야.’


우림이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인싸였다. 1학년 때는 반 전체가 친구였고, 다른 반 애들까지 인맥이 퍼져 있는 마당발이었다.


2학년이 되었다고 해서 그녀의 친화력이 그리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아마 반 대부분이 그녀와 친구겠지.

그리고 모두의 친구인 우림이가 데려온 남자친구라면, 많은 관심을  번에 받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됐어. 몇 시간 안 남았잖아. 어차피 배 타면 거기선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낯을 가리지는 않았지만,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호의를 보내는 애들을 상대하는 건 피곤했다. 어차피 만나봐야 정우와 친해질 리도 없는 아이들이고.

“알았어. 아, 나도 하나만 줘.”

“먹어.”


“아앙. 먹여줘.”


우림이는 아양을 떨며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정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델리만쥬를 내밀었다.

“얌.”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은혜가 델리만쥬를 덥석 집어 먹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입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간식에 이상함을 느낀 우림이가 눈을 떴다.

“……뭐야?”


“맛있네.”


“은혜야, 거지도 아니고 남의 걸  뺏어 먹니? 돈이 없으면 말해. 사줄 테니까.”

“정우가 왜 남이야?”


은혜는 자연스럽게 정우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고 불만을 토로했다.

“대체 전화는 왜 안 받아?”

“전화?”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정우는 그제야 자신의 휴대폰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휴대폰은 들어있지 않았다.


“버스에 두고 내린 거 같은데.”

“조심해.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누가 훔쳐간다고.”

엄복동의 나라, 대한민국에선 자전거는 훔쳐도 휴대폰은 훔치지 않는다. 가끔은 차라리 휴대폰을 훔쳐가라도 소리치고 싶지만.


“그래도 조심해, 누가 훔쳐보면 어떻게 해?”

“훔쳐봐도 뭐……   없어서.”

정우의 휴대폰은 상당히 무미건조하다. 사진 하나 찍혀 있지 않고, 연락처라곤 부모님과 히로인들의 연락처가 전부.

흔히 애인들이 나누는 알콩달콩한 메세지도 없고, 본다고 곤란한 내용의 문자도 없다.


‘어차피 비밀번호도 걸려 있고.’

은혜는 끝까지 걱정된다는 듯 정우에게 주의를 주었다. 정우는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마리는?”


“아…… 밤새고 왔다고, 아직 자고 있어.”

아예 안대까지 준비했다며, 그녀는 마리의 대담함을 설파했다. 하긴, 그녀는 고등학생이지만 실전에서 뛰는 요리사이기도 했으니까.

“피곤하겠네.”

“그래서 깨우면 죽여버린다고, 선생님도 못 꺠워.”

“그건 재밌겠네.”

“응응, 그리고그리고─.”


고작 며칠,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은혜는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 마냥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우림이가 불쌍하다는 듯 은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뭐야?”

“아니, 우리 은혜. 불쌍해서.”

“뭐?”

“얼마나 이야기할 친구가 없으면 이렇게 정우한테 다 토해낼까. 괜찮으면 나도 같이 들어줄까? 남자한테 말하기 힘든 것도 있잖아.”

“뭐, 뭐라는 거야! 꺼져!”


거칠게 손을 튕겨내고, 우림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친구가 없는 게 사실이겠지.


“나랑 똑같네.”

“으, 응?”

“나도 반에서 이야기할 친구가 없어서, 은혜처럼 할 말이 많은데.”

그렇기에 정우는 오랜만에 은혜의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은혜가 아무리 눈치가 없거니, 정우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는 걸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으, 응! 이야, 정우랑 나랑 완전 천생연분이네! 누구랑 다르게.”

은혜는 우림이를 노려보며 그리 말했다. 우림이는 아무런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 *


“정우야, 휴대폰 꼭 봐! 알았지?”

“알았어, 알았어.”

휴식시간이 끝나고, 출발할 시간이 되어 버스로 돌아온 정우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몇몇 아이들을 확인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시선을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 다음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찾았다.

‘뭐 이리 따듯해?’


그의 휴대폰은 마치 방금 전 까지 누군가 사용했던 것처럼 따끈따끈했다. 풀충전해 가져왔던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푸하하.
꺄하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때리는 웃음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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