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NO.2H 수학여행
우우웅─
배가 기적을 울려 도착을 알린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통제에 따라 배에서 하선한다. 선착장에 반별로 정렬한 아이들은 또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하루종일 버스에 타고서, 배를 타고 또 2시간. 그런 주제에 또 버스에 탄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아이들도 있었으나, 이 버스가 향하는 곳은 숙소였다.
즉, 지금부터 여행이 시작된다는 뜻이랬다.
숙소에 도착한 아이들은 각자 조별로 열쇠를 받고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아이들은 가장 먼저 탄식을 토해냈다.
“에이, 방 개좁네.”
3명, 4명이 빈틈없이 꽉꽉 달라붙어야 잘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방. 아이들이 서로 친한 방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정우처럼 사이가 별로인 아이가 끼어있는 조는 큰 문제였다.
“야, 너는…… 어쩔 거야?”
“응?”
“이번 여행, 어떻게 할 거냐고. 우린 같이 따로 다닐 생각인데.”
“아아, 나도 다른 애들이랑 같이 다니려고.”
“너 혼자 다니다가 사고 치면 어떻게 해?”
“아니지, 지금부터 사고 치러 가는 거 아니야? 걸레잖아.”
“하하하하, 그런가?”
아이들은 기회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 정우를 놀리기 시작했다. 잠긴 방.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 삼인성호라고, 막말로 그들이 나가서 정우가 주먹을 휘둘렀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진짜 그러진 않겠지만…… 언어폭력도 폭력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도끼를 휘두르며 평야를 내달리던 시기에 이런 놈들은 죄다 목이 베여 후손도 남기지 못했을 텐데. 남을 비방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는 건가.
“사고는 안 쳐. 만일 무슨 사고를 쳐도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러니까, 이 조의 조장은 난데, 네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게 내 책임이 된다니까? 이해 못해?”
“너야말로 지금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정우는 그에게 다가갔다. 이름도 모른다. 그리 친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렇게 시비를 건다는 건, 처맞을 각오를 하고 왔다는 뜻이겠지.
주먹을 쥔다. 그리고 휘두─르려다가 정우는 앞에 있는 놈이 남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긴 현실이 아니었지.’
이렇게 계집애처럼 굴어도 그를 계도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평생 이런 식으로 살아갈 테고, 큰 화를 입어도 바뀌지 않겠지.
“내가 진짜 사고를 치면, 너 따위가 대체 어떻게 책임진다는 건데?”
“……뭐?”
“만일 사고를 치게 되면, 네 책임이란 말은 절대 안 나올 정도로 대형사고일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말라고.”
정우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기 전에 그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 전화번호는 왜?”
“조장이니 뭐니 할 땐 언제고, 전화번호도 모르면 연락은 어떻게 해?”
결국 그는 정우에게 전화번호를 상납했다. 번호를 입력한 다음 그게 맞는지 확인까지 한 다음에, 정우는 방을 나섰다.
선생님들은 이미 술판을 벌이러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 학생들을 통제하거나 관리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미쳤네.’
아무리 자유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이면 학생 중에 사고를 치는 녀석이 반드시 나온다. 100%, 무조건, 절대로.
그리고 그럴 때 책임지고 뒷정리를 해야 할 선생들이 만취한 상태여서야, 아무런 대처도 못 하고 유야무야 시간만 끌겠지.
시민들은 요즘 학생들의 실태니, 철밥통 공무원들이 엉망이니, 사진을 찍고 신고를 할 테고.
‘음. 각 나왔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정우가 할 건 없다. 그냥 사건에 휩쓸려 물 흐르듯, 바람 흐르듯 따라 흐르면 된다. 이런 대형 사건은 해결하면 아이들에게 밉보이면 밉보였지, 떠받들어지지 않기에.
수학여행의 미래를 직감한 정우는 한시라도 빨리, 사건이 터지지 않았을 때 수학여행을 즐기고자 재빨리 숙소를 나갔다.
* * *
“와아. 니가 정말 정신이 나갔구나?”
“뭐가?”
“오토바이를 빌려?”
밖으로 나가 아이들을 만났을 때, 사고는 이미 터져 있었다. 마리가 오토바이를 빌려 그 위에 올라타 있던 것이다.
“야, 이거 생긴 건 이래도,125cc 아래야.”
그리고 그녀는 품속에서 당당하게 면허증을 꺼냈다.
“즉, 합법.”
고등학교 2학년, 만 16세가 넘은 그녀는 원동기 면허를 취득했따. 쓸 일이 없어서 괜히 딴 건가 후회하기는 했지만. 개똥도 약에 쓰인다고, 뭐든 가지고 있으면 기회가 온다.
“멋지지. 뒤에 탈래?”
“아니, 장롱을 뭘 믿고…….”
“에이, 그래도 내가 시험 만점으로 합격했는데.”
마리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핸들을 돌렸다. 엔진이 팽팽 돌아가며 배기를 뿜어댔다.
“어, 정우야. 여기서 뭐…… 와, 마리 너 오토바이 샀어?”
“산 게 아니라 렌트.”
“면허 있었어!?”
“그럼. 날 뭘로 보고.”
은혜와 우림이 뒤늦게 도착하자, 마리는 오토바이 자랑을 하더니 섬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다며 홀로 어디론가 떠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우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막 사는구나…….”
제주도는 도로가 많고 길이 잘 트여 있어서 마리처럼 초보 운전자가 많이 들린다고 하던데, 제발 사고나 안 났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도 갈까?”
“마리 두고?”
“저거 있으니 위치만 알려주면 알아서 오지 않을까?”
“그런가?”
그러나, 마리를 두고 간다고 해도. 차도 없고, 마리처럼 면허도 없는 그들이 대체 어딜 간단 말인가?
“그래서, 어디 갈 건데?”
“후후, 이럴 줄 알고 며칠 전부터 미리 예약해뒀지.”
우림이는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그들 앞에 정차했다.
“소우림 고객님, 맞으십니까?”
“네.”
“……너, 설마.”
“응. 네 생각이 맞아.”
그녀는 싱긋 웃으며 방금 막 도착한 사람을 소개했다.
“여행기간 동안 우리를 태워다 줄 기사님이야.”
금수저란, 머릿속에 박힌 상식부터가 다른 사람을 뜻한다. 그녀가 그러했다.
“최고의 여행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기사가 말했다.
* * *
남아일언중천금. 이 세상에선 여아일언중천금일까. 기사는 자신이 한 말을 지켜냈다.
“운이 좋으시네요.”
“네?”
“마침 오늘 제주도 감귤 축제가 있거든요. 귤을 공짜로 먹을 수도 있고, 감귤주랑 감귤 요리를 맛볼 수 있답니다.”
거기에 밤에는 감귤색 폭죽까지 터트린다고 한다.
‘감귤한테 무슨 죄지었나?’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감귤투성이 축제였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기사가 서울말을 잘 쓰기는 했지만, 그녀도 제주도 출신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제주도 사람 아니면 이런 일은 못 하지.’
제주도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평소엔 제주도에서 살아야 하니 제주도에 집도 있어야 했다.
이걸 모두 만족하는 사람은, 그냥 제주도 사람이었다.
“재밌겠네요.”
“재밌답니다. 맛도 있구요.”
그녀의 안내를 따라, 그들은 축제장으로 향했다. 축제장에서 내리자, 입구에서부터 상큼한 감귤 냄새가 퍼져왔다.
“드셔보시겠어요?”
축제장에서 감귤이 가득 든 상자를 들고 다니던 한 여성이 어눌한 서울말로 감귤을 건넸다. 정우와 아이들은 감귤을 받아 그 자리에서 껍질을 까먹었다.
맛있었다.
“서울에서 오셨나 봐요?”
“네, 뭐.”
“재밌게 놀다 가세요.”
정우와 아이들은 그대로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주는 감귤주스도 먹고, 감귤 스테이크도 먹고, 먹고 마시고 놀았다.
‘어라, 시야가…….’
그렇게 한참을 놀고 마시던 정우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우림이와 은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설마 이거…….’
정우는 그제야 자신이 퍼마시던 음료수가 감귤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등학생인데 단체로 음주를 하다니.
‘어떻게 하지.’
그러나 술에 취한 정우의 머리는 현명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냥 놀아!’
‘오, 천재적인데.’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으헤헤, 정우야아아…….”
술에 취한 은혜가 정우에게 엉겨 붙었다가, 그대로 골아떨어진다. 우림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몽롱한 상태인 게 한눈에 들어왔다.
“뭐야, 니들.”
“어, 마리야아아─ 아베마리야아아.”
“……미쳤냐?”
그때, 오토바이를 끌고 도착한 마리가 세 사람의 용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되도 않는 개그를 치는 정우는 강하게 노려보았다.
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알코올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니들 술 먹었냐?”
“아니…… 음료수야, 음료수.”
“음료수는 지랄, 먹고 취하는 게 음료수야? 그럼 콜라 먹고 운전해도 음주운전이겠네.”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 사람이 차를 타고 온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 차를 끌고 온 기사를 찾았다. 다행히 기사는 축제판에도 술을 마시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축제를 즐기며 대기했다.
“기사님. 애들 취한 거 같아서요. 돌아가야 할 거 같은데.”
“아, 태워다 드렸던 곳으로 데려다 드리면 될까요?”
“네.”
“뭐야, 벌써 돌아가게? 그럼 나 한 잔만 더…….”
“안 돼. 미쳤냐? 이 이상 먹으면 쌤들한테 들켜.”
마리가 정우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잡아당겼다. 정우는 힘없이 그녀에게 끌려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퍼어엉-!
‘아, 폭죽이네.’
아름다운 오렌지 색 폭약이 하늘을 물들였다. 폭죽은 감귤 모양이었다.
* * *
“조심해서 들어와.”
정우를 끌고 어찌어찌 들키지 않고 숙소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마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단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방안에는 그녀와 헤어져 다른 반 아이들과 놀기로 했던 한 아이가 홀로 티비를 보고 있었다.
“아, 어서…… 누구, 야?”
“어, 야. 잘 됐다. 너 잠깐 나가 있어.”
“어? 아니, 그게. 그러니까…….”
“너 우림이 알지? 오늘은 우림이 방에 가서 자라.”
“아, 혜영이다. 안녕! 혜영아!”
마리의 말을 듣고 설마 남학생과 그렇고 그런 일을 벌이는 건가 생각했던 혜영은, 뒤따라 들어온 은혜와 우림이를 보고 안심했다.
‘설마 여자가 셋이나 있는데, 하겠어?’
그런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우림이와 친구였고, 우림이 방의 애들과도 친한 사이여서. 흔쾌히 방을 바꿔주었다.
“야, 대충 씻고 자라.”
“으응.”
오랜만에 술에 취했다가 깬 정우는 자신이 술 취한 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곤 살짝 수치심에 고개를 떨궜다.
애도 아니고, 술에 취해 투정을 부리다 고등학생한테 끌려 오다니. 쪽팔렸다.
대충 양치를 하고 바닥에 이불을 깐 정우는 그대로 누워 잠을 청했다. 은혜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우림이도 졸린 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흐아암…….”
좁은 방에서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하다가, 정우는 마리와 맞닿았다. 술냄새 나는 게 싫다고 끝자리에서 자던 마리는 정우와 부딪히자 살짝 눈을 뜨며 물었다.
“……뭐야.”
“…….”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정우는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주물렀다.
“작아…….”
술에 취한 바람에 말이 헛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수습하기 보다, 본심이 더더욱 빠르게 튀어 나왔다.
“아, 아니. 작은 건 맞는데…… 나는 작은 가슴도 좋아해.”
“……미친놈.”
마리는 몸을 돌리며 정우에게 등을 보였다. 정우는 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정우는 가슴은 만지면 커진다는, 민간요법을 떠올리고 마리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리곤 껌딱지 같은 가슴이 커지도록 빌면서 애처롭게 주물렀다.
“……뭐야.”
“이러면 가슴 커진대.”
“……하지 마.”
그러나 떨쳐내진 않았다. 정우는 마리의 가슴을 주무르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