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0화 〉NO.8 임신예는 임신YES (150/218)



〈 150화 〉NO.8 임신예는 임신YES

“뭐─ 그딴 개소리 하려면 꺼져. 나 일 하느라 바빠.”

마리는 정우의 충고를 신랄하게 깎아내리고 전화를 끊었다.

“응? 아…… 어, 응. 그치. 요즘  고민이 많기는 해. 그래서 그런데…….”

고3이 된 예슬이는 밴드냐 대학이냐, 자신의 장래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덕분에 정우의 조언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응. 뭐, 알아서 해.”

자희는 애당초 기계같이 딱딱한 히로인이 정우로 인해 변화했다는 설정을 가진 히로인이었기에, 뭐라 해줄 말도 없었다.

아름이는 정신머리를 뜯어고치기보다, 성벽을 뜯어고치는 게 먼저였고.

주희쌤은 정우 곁에서 알짱거리는 우림이의 존재에 의해 정우와의 관계를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강 문제는 다 해결됐네.’

이제 이 모두를 동시에 어떻게 하는 게 문제였지. 개개인에게 문제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정우는 히로인들과 떨어져 홀로 걷기 시작했다.

자고로 주인공에게 히로인이 붙어 있다면, 새로운 히로인이 나타니기 어려운 법이니까.

고전 RPG 게임에서 파티창에 인원이 가득 차면  이상 새로운 인원을 영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정우가 혼자 다니기를 며칠, 운명이라는 존재는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도 되는 건지, 정우에게 새로운 운명이 덮쳐왔다.

“서, 선배님!”

색다른 명찰. 이전에  번 봤던 얼굴. 익숙한 얼굴에 명찰을 훑어보았다. 임신예. 그제야 정우는 어째서 그녀가 이렇게 낯이 익은지 바로  수 있었다.

“왜?”

“저, 기억하세요?”

“그때 부딪혔던 얘 아니야?”

“맞아요! 네!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하셨던!”

“무슨 일인데?”

“저기, 그러니까…….”

걸어 다니는 자궁, 임신예는 손가락을 배배 꼬며 말을 꺼내는 걸 망설였다. 지금부터 물어볼 이야기가 상당히 민감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민감한 주제도, 그녀의 성감대만큼 민감하랴. 그녀는 자신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 최근에 안 보이시던데! 헤어지신 건가요!”

“……그렇다고 하면 어쩔건데?”

“─아싸.”

“뭐?”

“아, 아뇨!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어요!”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나서, 다시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1학년 3반. 임신예라고 합니다. 정우 선배님.”

“응. 그래서, 무슨 일인데?”

“저기, 그러니까…….”

깨끗하게 타오른 갈색빛 피부가 반짝인다. 겉으로 보기엔 두려울  없어 보이는 용감한 스포츠 소녀이거늘, 행동은 가녀린 문학 소녀 그 자체였다.

“저랑! 사귀실래요!?”

커다란 목소리. 항상 뛰어놀며 목놓아 소리지르는 축구부의 특성상, 목청 하나만큼은 좋았다.

복도 전체가 그녀의 고백으로 가득 찬다. 곧이어 틈새를 타고타고 교실 안까지 퍼져나간다.

안 그래도 일탈 없는 학교에서 고백이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곧장 교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발 빠른 아이들은 벌써부터 문에 기대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었다.

눈앞의 이 소녀는 사람들의 시선은 익숙하다는 듯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정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우는 뭐라 대답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던졌다.

“싫어.”

“네! 그럼…… 네?”

“싫다구.”

설마 자신이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서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그러나 충격은 짧았다. 여기는 복도였고, 시간을 오래 끌면 더 치욕스런 일이 생길지도 몰랐으니까.

“아니, 왜요!? 애인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없으면 무조건 사귀어야 하나?”

“그건 아닌데─ 제가 부족하거나, 그런 거예요?”

‘설마.’

정우는 눈웃음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키는 평균이었으나, 외모는 평균적이지 않았다.

딱 보기 좋게  갈색 피부엔 한 점의 잡티도 없었으며, 여느 운동선수들이 겪는 피부 노화도 그녀만은 비껴갔는지 아기 피부라 해도 좋을 정도로 탱글거렸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 만큼 뱃살이나 군살도 없었고, 운동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치라 할 수 있는 가슴도 있었다.

외모로 치자면 다른 히로인들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 누군가는 그녀와 사귀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

“너 오늘 나랑 처음 보잖아.”

“네? 처음 아닌데요?”

“대화해본 적은 있냐?”

“있죠. 그때도 이야기 나눴는데.”

그런 외모와 성격을 타고난 그녀답게, 그녀는 연애에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껏 성에 차는 남자가 없어서 연애를 하지 않았을 뿐.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든지 사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내재 되어 있는 탓이다.

‘사람을 딜도 취급하는 거지.’

시원스러운 성격 탓에, 그녀는 성행위도 시원스럽게 개척했다. 단언컨대 모든 히로인 중에서 그녀보다 빠르게 호감도를 올리고, 성행위를 할 수 있는 히로인은 없다.

게임에서 만난 지 하루 만에 성행위를 나눌  있는 캐릭터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게 게임이라면 괜찮다. 어차피 야겜이고, 어차피 딸치려고 하는 거고. 이것저것 재면서 꽁꽁 숨기는 것보다, 시원하게 개방하는 게 유저 입장에선 좋다.

현실이라면 큰 문제가 된다. 흔히 말하는 먹버남이 여자가  모습이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을 먹고 버리지는 않겠지만….’

바람은 수두룩하게 피운다. 좆 무서운 줄 모르고 보지 마구 휘두르다가 다른 남자에게 뒤지도록 맞고 한 대 더 맞아서 죽는다.

그런 여자에게 몸을 쉽게 허락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어 보인다. 튕기고 튕기고,  튕겨서 고급스러운 척을 해야 한다.

이게 현실이고, 만일 그녀와 사귈 마음이 있다면 그게 좋은 선택은 아니겠지만. 정우는 그녀와 사귀기보다, 그녀와 엔딩이 보고 싶었다.

“그런  대화라고 하진 않아.”

“그럼 지금 한 대화로 충분하지 않아요?”

“말이 안 통하네. 너 존나 귀하게 자랐나보다.”

“그래 보여요? 잘 보셨어요. 귀하게 자란 딸이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못 참거든요.”

후, 정우는 가볍게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귀하게 자란 딸이라, 그래봐야 우림이보단 못하겠지.

그러나 정우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보다, 그녀가 오해하고 있는 사실 몇 가지를 짚어 주었다.


“일단 오해하고 있는 게, 나는 아직 헤어지지 않았거든.”

“……며칠 째 혼자 다니시잖아요.”

“며칠 동안 따라 다녔나 봐?”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눈에 보여서….”

“그래? 계속 신경이 쓰였나 보네?”

“……아니에요. 그냥 보여서.”


신예가 부정하는 모습을 보며, 정우는  이야기가 의외로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더 많은 시선이 끌릴 거라는 사실도 쉽게 알 수 있었고.

“야.”
“넵!”

“나랑 사귀고 싶냐?”

“그렇습니다!”


마치 군대에 막 입대한 신병처럼, 그녀는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모습이 사뭇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따라 와.”


“네?”


“사귀고 싶다며.”


정우는 그녀에게 손짓했다.


“따라 와.”


정우는 그녀를 데리고 룸카페로 향했다. 고등학생들의 모텔로.


* * *

“한 분당 음료 한 개 필수구요, CCTV로 녹화되고 있으니 엄한 짓 하시면 안 됩니다.”


하도 많은 학생들이 모텔처럼 이용하고 가서인지, 알바생은 깊은 빡침을 숨기며  사람에게 말했다.


물론,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었기에,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음료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


단둘만의 공간. 고백까지 했는데 이런 공간에 데려온다는 건, 신예가 생각하기에 그린 라이트였다.


쪼로로록.

음료수를 쪽쪽 빨아 마시며, 곧장 바닥난 음료수를 보며 얼음을 깨작 씹어 먹기 시작한다.


데구르르, 얼음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콰득, 그리고 그녀의 입안에서 깨져나간다.


이빨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얼음을 순진하게 깨먹고 있다가, 정우 앞이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멈칫하고 그를 바라본다.

정우는 무표정으로 얼음을 깨먹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제송해요.”


꿀꺽, 차마 그 앞에서 얼음을 뱉을 수는 없었던 신예는 얼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속 안으로 각지고 차가운 무언가가 들어갔다. 기도가 쓸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뭐가?”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해보니까 선배한테 민폐가 된  같더라고요.”

“그걸 이제 알았어?”

“아하하.”

그녀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걸 알려주고 싶었다.


“저, 선배를 처음 본 건 운동회때였어요.”

“운동회?”

“네. 선배 혼자 막 무쌍찍던 그때 있잖아요.”


“아, 그때.”

주희를 꼬시기 위해  좀 썼던 그때를 떠올랐다, 설마 다른 여자를 꼬시기 위해 놓은 덫에 걸려든 여자가 또 있을  몰랐다.


‘이런  일석이조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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