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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화 〉NO.8 임신예는 임신YES (156/218)



〈 156화 〉NO.8 임신예는 임신YES

팔다리를 완전히 제압당하고,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막을 수 없다. 정우는 순순히 입술을 내어주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헤헤헤.”

그러나 그녀는 순박한 시골처녀마냥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정우가 알고 있는 게임  그녀의 모습이라고는 상상할  없는 모습이었다.

‘뭐지?’

자신의 행동으로 히로인들이 조금씩 변화한다는 건 쉽게   있었다. 누군가의 성향을 바꾼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정우의 매력과 시스템의 힘은 그 어려운 일을 가능케 하였으니.

‘원래…… 원래 이렇게 순박한 아이였나?’

아니다. 적어도 정우가 기억하는 게임 속 그녀는 이러지 않았다. 순박한 처녀? 기회만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주인공의 자지를 노리는 음마였지.

‘왜 다르지?’

무언가가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정우의 머리가 미친 듯이 굴러갔다. 정답을 찾기 위해 몸안에 남은 여유 당분을 모조리 쏟아붓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답을 깨닫는다.

‘……그녀가 먼저 접근했지.’

게임 속에선, 아니. 그 어떤 미연시에서도. 히로인이 먼저 다가오는 작품은 없다. 하물며 여러 히로인이 나오는 작품에서 한 히로인이 주인공에게 먼저 접근하게 만들면 이야기가 쉽게 꼬여버리기에 더더욱.

정우가 현실에서 했던, 이 세상의 모티브가 된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등장하는 그 어떤 히로인도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

주인공과의 접촉이 없다면 엔딩을 볼 때까지 대사 한 줄 안 나오는 엑스트라로 전락한다.

그에 비해 신예는 어떻든가?

‘먼저 다가왔지.’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 동아리실 복도에서의 우연한 부딪힘. 그러나 그때부터 신예는 정우를 알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유명해져서….’

어떤 행동이 그녀의 취향에 딱 들어맞아, 정우에게 고백까지 하게 만들었는지. 그건 정우도 알 수 없다. 게임에서 그런 미세한 연애 감정까지는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확신할  있는 건, 그녀는 이미 달라졌다는 것이다. 속에는 음란마귀를 숨기고 있겠지. 변하지 않는 본성이니까.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먼저 다가와 몸을 허락하는 남자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라. 평생의 사랑을 언약할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귀중한 모습.

천박한 본능만 남은 임신예가 아니라, 17년 인생동안 쌓아온 인간 임신예였다.

“……선배? 화 났어요?”

정우가 굳은 얼굴로 장시간 말없이 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이 든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정우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그다음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본다. 먼저 다가가지 않아 그녀의 본성이 억눌러진다면, 저 탐나는 입술을 그가 먼저 손 대는 일도 없어야 하리라.

그러니까.

딱!

“아악!”

“누, 누가 멋대로 입 맞추래?”

지금은 그저 순수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선배를 연기하기로 했다.

그녀가 절로 어장에 떨어질 때까지.

* * *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정우는 노곤한 전신을 주무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성을 숨기고 행동하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위에 쌓인 가면을 바꿔가면서 행동하라는 건 지난 한 일이었다.

‘힘들어…….’

남녀의 정조가 뒤바뀐 야겜 속 세상. 그곳에선 남자처럼 살 수도, 여자처럼 살 수도 없다.

이세계에 표류된 그는 갈 곳 없는 이방인이요, 네모난 세계에 떨어진 동그라미나 다름없으니.

동그란 그가 네모를 연기하기 위해선, 자신을 깎아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깎아나간 부분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은혜나 부를까.”

이런 네모들의 세상 속에서도, 정우에게 맞는 네모가 존재했다. 그가 직접 다듬고 깎아낸 몇몇 히로인들.

은혜는 가장 오래되고 익숙한, 그야말로 말하는 오나홀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친숙했기에 그녀를 부르는 데 일절 망설임도 없었다.

[지금? 알았어! 금방 갈게!]

늦은 저녁. 갑작스런 부름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친 채 정우의 집으로 달려왔다.

“정우야!”

일 년 넘게 정우의 시다바리를 하면서 겨우내 얻어낸 비밀번호를 두들기며 집안에 들어선다.

정우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양손을 쭈욱 펼치고 기다리는 그를 보면서, 은혜는 조심스레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와 동시에 정우의 팔이 강하게 그녀를 옭아맨다. 전신이 강력하게 조이고, 방금 막 사용된 바디워시의 강렬한 향이 풍겨온다.

“흐으음─ 우리 은혜. 부르니까 바로바로 달려오고. 귀여워 죽겠어.”

“수, 숨 막혀…….”

정우는 정우대로 은혜의 냄새를 맡으며 힐링한다. 그 모습에 은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있었다.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정우를 믿으니까.

보아라. 지금처럼 결국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는가.

“저녁 먹었어?”

“으음, 먹긴 했는데…….”

“그럼 가볍게 만들테니까, 먹을래?”

“조금만. 조금만 하면 먹을래.”


실제로 배가 부르기도 하고, 나름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라 식단 조절도 하고 있던 은혜였지만, 정우의 음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랑이라는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최고의 실력을 지닌 그의 음식은,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부모보다 월등히 뛰어난 솜씨였으니까.

“기다려.”

정우는 웃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은혜도 졸졸졸 따라 부엌까지 기어 들어왔다. 자신이 도울 일이 뭐가 없을까 뒤적거리던 그녀는 테이블을 닦고, 그릇을 놓았다.

잠시 후, 정우는 프렌치 토스트와, 남은 식빵으로 만든 츄러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둘 다 설탕이 잔뜩 묻은, 야심한 밤에 먹었다간 그대로 뱃살로 돌아갈 무시무시한 칼로리 폭탄이었으나…….


“─잘 먹겠습니다.”


칼로리 폭탄이라는 뜻은, 맛이 폭발한다는 뜻이다. 달콤한 향기와 설탕이 반짝이며 내보이는 윤기는, 일반인의 의지로 감히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와삭,  입 베어 물면 섹스에 버금가는 쾌락이 입안을 맴돈다. 식욕이 어찌하여 성욕과 더불어 3대 욕구에 속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은혜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정우도 원시시대 때부터 내려온 수컷의 욕구와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선 그리도 충족시키기 어려운  본능을.

“맛있어?”


“응!”

“많이 먹어.”

“……아냐. 이것만 먹을래.”

무심코 많이 먹겠다고 대답하려던 은혜는 눈앞에 보이는 음식들의 칼로리가 스쳐 지나갔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설탕을 쳤으니 높겠지. 칼로리 높은 걸 많이 먹으면 살찌겠지. 그러니 참는다.

이 일련의 과정 끝에, 그녀가 선택한 건 지금 있는 음식을 최대한 아껴가며 먹는 거였다.

깨작깨작,


다람쥐마냥 음식을 먹는 그녀를 보면서, 정우 마음속 수컷이 눈을 뜬다. 육신은 건강하기 짝이 없는 남고생. 눈앞엔 작고 여리여리한, 거기에 귀엽기까지 한 여고생이 입을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이에 반응하지 않는 남자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정우는 음식을 먹던 그녀를 탁, 붙잡았다.

“……?”


은혜는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순진무구한 표정이 정우의 음심을 자극했다.

쪽.


“으읍!?”


입술에 붙어있던 설탕 알갱이들이 마구잡이로 부딪히고, 입안에 있던, 침으로 녹아 질척해진 빵 쪼가리가 이리저리 두 사람 사이를 옮겨 다녔다.


“자, 잠깐. 양치도 안 했는데에─.”

“괜찮아.”

달달한 향기가 풍긴다. 향균 스킬이 있는 정우의 혀로 그녀의 잇몸을 샅샅이 훑으면, 그걸로 양치도 끝난다. 혀와 혀를 섞으면 냄새도 나지 않는다.

남는 건 그저 그녀 본연의 냄새. 은혜라는 인물이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페로몬.


“맛있겠다.”


“뭐, 뭐?”

“내가 해준 음식을 네가 먹었으니, 나도 너를 먹어도 되지?”

“아니, 갑지가 뭔…….”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은혜는 그저 고개만 돌리고 모른  정우에게 몸을 맡겼다. 이런 걸 정우가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은혜는 정우가 조형한, 세계에서 유일한 암컷이었다.

다시금 입이 맞춰진다. 음봉에 손이 오르고, 열기를 띤 열락만이 방안을 감싼다.


* * *

“……그래서, 나를 덮친 거라고?”


“덮치다니. 우리 같이 즐긴 거잖아.”


“우우…… 우리 정우가 이젠 정말로 미쳐가는구나…….”

잠자리를 나누고, 정우에게서 비밀이라기에도 뭐한 사실을 들은 은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후배에게 점잖은 남자 선배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몸서리쳐서 자신을 그 감정의 해소용으로 사용하다니.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한 가지 의문에 빠졌다.

“……근데 왜 하필 나야?”


“응?”

“우림이도 있고, 아름이도 있고…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를 부른 거야?”


은연중에 한 가지 대답을 고대하며. 은혜는 그리 물었다. 과연 정우도 은혜와 함께해온 세월이 헛된 것은 아닌지 곧장 입을 열었다.

“네가 제일 편하고 좋으니까.”

“흐흐, 내가 제일 좋다. 이거네? 우림이나, 마리나, 다른 선배들보다. 내가?”

“으음, 가장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지.”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은혜는 풀어진 얼굴을 내보였다. 정우는 그녀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은바, 그녀가 가장 암컷 같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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