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NO.8 임신예는 임신YES
[나를 놀리듯 갖고 노는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복수]
1. 성공해라.
2. 역으로 놀려주라.
3. 아무것도 아닌 척 무시해라.
[여친 있는 남자 빼았는 법]
니가 더 예쁘면 됩니다.
개념 누르세요, 안 누르면 쥰내 처맞을 준비하고 10초 안에 굴다리 밑으로……
“……개쓸모없네.”
인터넷에는 없는 게 없다는 친구의 말에 따라, 집에 와 인터넷을 뒤적거린 신예는 자신이 찾는 정보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컴퓨터를 종료했다.
‘선배는 나를 놀리는 게 틀림없어.’
자신에게 호감을 내보이고,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고, 데이트까지 하고. 입술까지 맞췄으면서.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운다?
‘나를 이용했거나.’
아니면 그 여자의 질투심을 꽃피우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남자는 종종 그런 수를 쓴다고 들은 적이 있다. 여성의 성욕과 집착을 이성적으로 휘두르는 방법이라고.
‘그게 어딜봐서 이성적이야?’
이용당한 여성의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비이성적인 일이 아닌가. 그녀는 적어도 그렇게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비운의 여주인공이 될 생각은 없었다.
‘빼았는다.’
왜, 요즘엔 서브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을 빼앗는 드라마도 자주 나오지 않는가. 그녀가 주연을 차지한다 하여 불만을 가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훈련. 빠지겠습니다.”
“……뭐?”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동아리 고문이자 감독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지금 중요한 시기다.”
“저도 그렇습니다.”
“천재니 뭐니, 떠받들어진다고 자만하는 거냐? 노력은 결코 이길 수 없다. 특히 체력에선 더더욱.”
노력한 범재는 나태한 천재를 이긴다. 적어도 체육계에선 통하는 말이다. 천재가 범재를 압도하는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계 내에서.
천재가 10분 동안 3골을 넣는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80분 동안 4골을 먹히면 진다.
축구란 그런 스포츠다.
“허락 못 해.”
“그럼 축구 그만두겠습니다.”
그녀의 강경책에, 감독이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뭐가 너를 그렇게 만든거냐?”
“사랑이요!”
열렬한 사랑. 꿈이고 뭐고 모두 포기할 수 있는 맹목적인 사랑.
이 한 순간을 불태우기 위해 제 몸을 불사르고, 잿더미만 남아 평생을 후회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불타는 순간만은 그 무엇보다 뜨겁게 타오르리라.
“……좋다. 일주일이다.”
“감사합니다!”
신예는 감독에게서 허락을 받고 공식적으로 축구부 훈련에서 열외되었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보통은 축구부에서 제명 당할 테니까.
‘일주일인가!’
144시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애처롭게 타오르는 일주일의 시작이었다.
* * *
“선배!”
“…신예?”
해가 막 떠올라 광명을 비추기 시작한 아침. 정우는 운동장이 아닌 등교길에서 신예를 마주했다.
“지각?”
“아뇨! 이번 주는 휴가에요!”
“휴가? 분명 이번 달에 시합 있지 않았나?”
“네, 뭐. 있긴 한데…… 괜찮아요.”
신예는일정을 대강 얼버무리며 정우에게 달라붙었다. 팔 한 짝을 내주며, 정우는 덥다는 듯 그녀를 떨처내려 했다.
“더운데.”
“아직 아침이라 선선하잖아요.”
“……그래, 뭐. 알았다.”
“그리고 선배, 오늘은 선배들이랑 같이 밥 먹으면 안 돼요?”
“……선배들?”
“네. 그 가슴 큰 선배라든지.”
‘봤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정우는 신예가 그날, 학교 난간에서 있었던 일을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질투심이라면서 인기척 하나 없는 음습한 곳에서 입을 마추더니, 우림이도 다 계획이 있던 것이다.
“안 될 건 없지만…….”
“그럼 됐네요!”
신예는 싱글벙글 웃으며 정우와 함께 학교로 등교했다. 등굣길, 운동장을 주회하는 축구부 학생들이 신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노려보는데.”
“훈련 빠져서 부럽나 보죠.”
“하긴.”
슬슬 아침 햇살도 따스해지기 시작하는 초여름. 지긋지긋한 아침 훈련이 지겨워질 무렵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신예 홀로 훈련을 빠지는 것도 모자라 남자랑 꽁냥대고 있으니, 몰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럼 선배님! 점심시간에 뵙겠습니다! 충성!”
그렇게 자기 반까지 정우를 질질 끌고온 신예는 왼손으로 경례를 하고서 자기 반으로 들어갔다. 오른손으로 정우를 끌어안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경례는 오른손으로 하는 건데….’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 * *
은혜는 친구 하나 없는 아싸다.
우림이는 이곳저곳 발이 넓은 인싸였고.
마리는 유명한 불량배였으나, 바꿔 말하자면 그쪽 사람이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는 인물.
예슬이도 수상 경력 하나 없는 무명 뮤지션이었고.
자희까지 가면 말할 것도 없다.
그동안 정우가 사귀었던 히로인들은 모두 무명이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였고, 그렇기에 그들과 사귄다고 해서 무슨 큰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예는 다르다. 벌써부터 온갖 경기에서 주목을 받는 슈퍼스타였고, 프로 입단이 확정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스트라이커였다.
그런 그녀가 웬 남정네를 끌고 다니는 건 큰 소란을 불러오기 적절했다. 특히 정우와 관련된 온갖 뜬소문이 더해지자 그녀를 만류하는 손길이 여기저기서 달려들었다.
“야, 그 선배 소문이 안 좋던데…….”
“차라리 내가 아는 오빠랑…….”
“옆반에 잘생긴 애가 너 좋다고 난리인데…….”
수많은 유혹과 선동이 그녀를 부추겼다. 원래의 임신예라면, 그러니까 정우가 알고 있는 그녀였더라면 이를 지나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갔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임신예는 다르다. 그녀는 일개 유혹에 넘어가는 쉬운 여자가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꿈까지 포기하는, 광기로 물든 전사였다.
“다 꺼져!”
그녀의 입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험한 말이 뿜어져 나온다. 이 일은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어 나중에 그녀가 스타가 되었을 때 풍문으로 돌아오겠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먼 미래의 일을 신경 쓰기엔 그녀의 머릿속이 정우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걸 신경 쓰면서까지 정우를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고단수가 아니었다.
애당초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하는 법. 그녀는 지금껏 머리를 고생시키지 않고 살아왔다.
딩동댕동─
“선배!”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그녀는 전력질주하여 정우의 반으로 달려갔다. 치고 달리기를 무기로 사용하는 스트라이커답게 그녀의 달리기는 가히 F1 스포츠카에 필적했다.
“어, 빨리 왔네?”
“그럼요! 당연하죠! 선배를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요!”
어느 치킨집 CF 가사마냥 돌림노래를 흥얼거린 그녀는 곧장 정우의 손에서 도시락을 뺏어 들고 앞장서 나갔다.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있다는 것마냥.
그녀는 제 발로 걸어 정우와 처음 마주했던 동아리 교실로 향했다. 이곳이다. 이곳에서 사랑이 싹트었다. 결국 사랑이 싹튼 자리에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정우와 그 히로인들이 점심시간에 식당 대신 사용하는 밴드부 부실의 문앞에서, 침을 꼴딱 삼킨 신예는 문을 드르륵 열고 고개를 퍼뜩 숙였다.
“1학년 임신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듬과 동시에 뒤에서 정우가 그녀를 지나쳤다.
“오늘은 우리가 일등이네.”
“아…….”
긴장한 나머지, 사람이 있는 것도 확인치 않았다. 부끄러움에 그녀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이 모인 건, 그로부터 5분이 더 지난 이후였다.
* * *
“아아, 정말이지. 점심시간에 추가로 수업하는 선생이 어딨냐고. 그치? 정우야. 너무하지 않아?”
은혜가 자연스레 정우에게 달라붙으며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는 신예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신예는 그게 텃세를 부리는 거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얘는 또 뭐야? 단발? 예쁘네…… 몸매도 좋아 보이고…… 피부도 타고…… 이번엔 이런 취향인가…….’
그냥 은혜가 낯을 너무 많이 가리는 바람에, 그저 소심하기에 신예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정우가 먼저 신예의 소개를 시작했다.
“이쪽은 임신예. 1학년이고 축구부야.”
“축구부……!”
“임신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은혜는 축구부라는 말을 듣고 양아치를 연상하며 그녀를 극도로 경계했다. 자고로 아싸와 운동부의 상성은 극악이었으니.
“신예라고? 나는 소우림이야. 잘 부탁해?”
“김마리.”
그러나 이 자리에는 낯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마리는 건조하게 자신의 이름만을 알렸고, 우림이는 방긋 웃으며 손까지 내밀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손을 내민 우림이를 보며, 그리고 그녀의 잊을 수 없는 폭유를 보며. 신예는 그녀가 정우와 입을 맞추며 자신을 비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이, 선배의 연인…….’
다른 두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 아름답지 않거나, 그리 가슴 크지 않았으니까.
과하긴 하지만, 다다익선이라고.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하에. 신예는 우림이 정우의 애인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친구거나, 뭐. 밴드부 부원이라고 생각하며.
‘이 가슴만 넘으면, 선배는 내 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빛이 뜨겁게 튀기기 시작했다.
인싸들의 기 싸움에, 은혜는 무언가 불안함을 느끼고 슬금슬금 움직여 정우 옆으로 피신했다.
“아, 오늘은 선배들도 오기로 했어.”
“정말? 웬일이래.”
“오늘 학력평가래.”
“점심 길겠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슬과 자희가 부실로 들어왔다. 신예는 퍼뜩 일어나 인사를 날렸고, 예슬과 자희는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 착석했다.
“이야, 이젠 일학년까지 건드려? 대단해! 대단해!”
예슬은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정우의 허벅지를 퍽퍽 치기 시작했다. 여성이 먼저 남성에게 하기에는 지나치게 성적인 희롱.
‘어라?’
그러나 정우는 화내지도, 그녀를 말리지도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밴드부의 부장이자 선배라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치기에는 권위에 눌린 느낌을 내보이지 않았다.
‘설마…….’
정우는 말했다. 특별히 사귀는 사람은 없다고.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건 지금 사귀는 애인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도 안 말리는 카사노바나 할 법한 소리가 아닌가.
“아, 정우야. 이거 맛있다.”
“입가에 묻었다.”
은혜가 도시락을 까먹으며 입가에 양념을 묻히고 배시시 웃자, 정우는 손가락으로 입가를 닦아 양념을 치운다.
그 누구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암…… 밥 먹으니까 졸리네. 야, 잠깐 네 다리 쓴다.”
“내가 무슨 베개야?”
식사를 마친 마리가 자연스럽게 정우의 허벅지를 베고 잠에 든다. 연인 사이에서나 할법한 일이었으나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설마…….’
신예는 자신이 노리는 골망에, 이미 골키퍼가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도 쉬이 골을 넣기 힘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