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4화 〉NO.3H 여름방학 (164/218)



〈 164화 〉NO.3H 여름방학

“그래서? 그 네 명은 누군데?”

“아직 몰라.”

“미친놈인가 진짜.”

어느 두 사람의 대화 

* * *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정우가 이렇게 된 것도,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예를 들면 악독한 신에게 납치당해, 특수한 방법으로 획득할 수 있는 포인트를 모으지 못하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든가.

[SP : 6638]

‘언제 이만큼이나 모았냐.’

한가득 쌓여 있는 포인트를 보며 정우는 기함했다. 목표 금액인 1만 포인트의 절반 가까이 되는 포인트. 하물며 졸업식까지  년 하고도 반년 넘게 남았다는  떠올려보면 충분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히로인을 여덟이나 공략하고 받은 포인트지.’

그리고 남은 히로인이 넷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아슬아슬했다. 네 명의 히로인을 모으고, 그들과 지금까지 했던 일들,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들을 하지 않으면 포인트를 모으지는 못할테니까.

“하아…….”

“무슨 일 있어?”

“……은혜야.”

은혜가 다가왔다. 이 세상에 와 처음으로 만난 여자이자, 정우의 처음을 가져간 여자.

그럼에도 자존감과 자신감이 떨어져, 항상 불안에 떠는 소녀가.

“아무것도 아니…… 아니다.”

정우는 은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정우와 닮은 아이였다. 정우는 우림이처럼 뛰어나지 않았고, 마리처럼 불우하지 않았으며, 예슬이나 주희, 아름이나 신예처럼 무언가를 타고 나지도 못했다.

그저 은혜처럼 평범한 삶을 살다가 우연히 이 세상으로 떨어졌음에, 그리하여 정우와 가장 닮은 건 은혜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정우와 가장 비슷하게 행동하는 여자였으며, 그건 즉 정우가 행동하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여자라는 뜻이었다.

‘내 선택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아예 뒤바뀌었을 때.’

은혜의 선택을따라가면, 이전의 자신이 고를 법한 선택지를고를  있었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지 이 세상에 남을지 고민하는 지금 가장 필요한 상대였다.

“은혜 네가, 만약에. 만약에 있지.”

“응.”

“우림이나나처럼, 잘생기고 예쁘고, 돈도 많아지고…… 재능도 넘쳐나게 된다면.”

“……지금 자기 자랑하는 거야? 아니면 우림이 칭찬?”

“아무튼 들어 봐.”

“뭔가 이상한데…….”

“그렇게 됐는데, 널 좋아해 주는 남자마저  명이 넘는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난 정우만 사랑할 건데?”

그녀가 답했다.이걸 무언가의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걸까.

정우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좀 더 본질적인, 그러니까 본심을 듣고 싶었다.

“만일 네가 그 남자를 다 꼬셔야 할 이유가 생긴다면?”

“이유?”

“으음, 그러니까…… 그 남자를 다 못 꼬시면, 내가 죽어. 너도 같이.”

“어, 그럼 안 되는데……. 으음, 하지 않을까? 정우 네가 죽는  싫으니까.”

“그러다 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되면?”

“……이거 혹시 무슨 테스트야? 나 선택지 잘못 골랐어?”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그래도 나는, 정우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열 명을  꼬셔도 너부터 생각날걸?”

그게 은혜의 본심이라는 걸 정우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상 무언갈 묻는다는 게 의미 없다는 일이라는 것도 같이.

‘은혜한테는 이미, 내가 있어…….’

이제  정우가 없을 때를 떠올려보라 해도, 그녀의 머릿속에선 싹 지워버리고 난 이후이리라. 떠올리기도 싫은 어두운 과거따위, 거대한 빛 앞에서 쉽게 사라지는 법이니까.

만일 정우가 그녀의 옛날 생각을 알고 싶다면, 그가 아예 사라지고 난 이후에야 가능하리라. 그러니까 정우가죽거나, 그녀를 매몰차게 차버린 이후에야.

“대답고마워.”

“근데 이거 진짜 무슨 테스트 아니지? 나 불안해지는데…….”

“이리 와.”

정우는 불안해하며 허둥지둥거리는 은혜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가볍게 입맞춤했다. 키스는 무엇보다 확실한 애정표현이며, 가족 아닌 남녀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에헤헤. 한 번 더.”

앞으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그녀는 먼저 손을 내뻗어 정우에게 다가왔다. 고된 질문에 답해준 보답이라는 생각으로, 정우도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쪽쪽, 입술이 부딪치고, 은근슬쩍 혀가 그 안을 넘본다. 여기서 그를 용인했다간 순식간에 선을 넘어버릴지라, 정우는 그녀를 가볍게 밀어냈다.

“여기까지.”

“으음…… 우리 최근에 안 하지 않았나? 나 요즘 참기 힘든데…….”

“네 한계를 깨트려. 은혜야.”

“히이잉.”

은혜와 헤어지고, 그녀에게서 깨달음을 얻은 정우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내 생각대로 해라. 이건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여덟 다리나 걸쳐놓고, 여덟이나 열둘이나 그게 그거니까. 당당하게 해라. 차라리 그게 낫다.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야.’

정우는 최근 자신에게 냉혹한 태도를보이는 마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게, 관심을 주지 않아 관심을 끌려는 수법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넘어가 줘야지.’

* *

“야, 부주방장. 지명 들어왔다.”

“……지명이요? 우리 그런 것도 해요?”

“몰랐어? 주방장님은 종종 가서 하시는데.”

“예이. 알겠습니다.”

마리는 선임 요리사의 말에 하던 일을 마치고 예약실로 향했다. 그녀가 일하는 레스토랑은 어지간한 월급쟁이들은 밥  끼 선뜻 먹기도 어려울 정도로 비싼 고급 레스토랑이었고.

그런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를 지명까지 해가며 한 끼 식사를 하는 사람은 레스토랑의 단골 손님으로 붙잡아야 하는, 최중요손님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부주방장 김마…… 너 여기서 뭐하냐.”

“안녕. 전화 안 받길래  봤어.”

“꺼져.”

“나 손님인데? 돈 내고  손님한테 이래도 돼?”

“……시발 진짜.”

곧바로 방을 나가려던 마리는 곧장 테이블카를 끌고 와 반찬을 세팅하고, 요리할 준비를 마쳤다. 화로에 불을 붙인 그녀는 요리를 시작한다.

몸을 쓰는 거라면 무엇이든 잘하는 그녀는, 기어코 십 년 넘게 수련한 배유나의 요리 실력을 배껴오는데 성공했고.

타고난 재능. 무엇을 맛보든 그 맛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즐길  있는 절대 미각을 통해 이를  단계  높게 완성 시켰다.

“맛있게 드십시……발. 습관 돼서 존대가 다 나오네. 맛있게 먹어라.”

그녀는 새침한 태도를 보이며 완성된 요리를 내놓았다. 정우는 자신이 어떤 방법을쓴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요리를 완성 시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재능이 없었고, 미세하게 남아 있던 가능성마저 스킬을 통해 닫아버렸으니까.

피와 땀을 흘려 얻어낸 기술이 아니라, 시스템 창을 툭툭 조작해 얻어낸 스킬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성장할 가능성을  스스로 박살 낸다.

“맛있겠네.”

“그럼, 누구 덕분에.”

마리는 양팔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댔다. 다른 손님 앞에서 이런 태도를 취했다간 그대로 잘리겠지만, 그녀가 그만큼 정우를 신용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정우는 손짓해 옆에 앉으라 했지만, 누가 지나가다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고개를 저었다.

“내 걱정말고 처먹기나 해.”

“우와, 요리사님. 말투가 너무 험하시네요. 민원 넣어야 하나.”

“여물어, 내가 먹여준다?”

“포상인데?”

빈정거리는 정우에게 한숨을 내쉬며, 마리는 조용히 그에게 턱짓했다. 정우는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집어 들었다.

밑반찬이나 밥은 다른 요리사들이 할 테니까, 평가할 부분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마리가 직접 해준 요리.

장어에 특제 소스를 바른 장어구이였다. 남자 몸에 좋다하여 이 세계에선 더더욱 인기를 끄는 특별 보양식.

그만큼 가격도 비싸서, 평소엔 구경도 못 하는 음식이지만.

“응. 맛있네. 잘 구웠는데?”

“흥, 당연하지. 밥이랑 김치도 같이 먹어. 직접 담근 거니까.”

“네가?”

“그럼. 내가 거들먹거리면서 농땡이를 피웠을까 봐?”

마리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주방장의 수제자가 되긴 했으나, 동시에 주방의 막내이기도 했다.

요리 실력을 인정받아 부주방장의 자리를 따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 다 일하는 데 혼자 농땡이 피울 수는 없으리라.

그런 식으로 실력만능주의가 되어 버리면 주방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실력 없는 몇몇 요리사들이 반발할  뻔했으니까.

“그래서? 왜 왔어?”

“음식이 먹고 싶어서?”

“하, 네가 해 먹는 게 가성비가 더 좋을걸. 솔직히 나 같으면 이 가격 내고 여기서  먹어.”

“그야 넌 그럴 실력이 있으니까.”

이런 레스토랑의 음식이 비싼 이유는 가장 먼저 신선한 재료를 매일 바꿔 쓰기 때문이요,  번째론 고된 노동을 하는 요리사들의 실력이 음식 맛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요리 실력만 있다면 대충 근처 슈퍼나 대형마트에서 재료를 구해다 사 먹는  백배 정도 싸게 먹힌다. 그리고 마리는 이 레스토랑의 부주방장을 맡을 만큼 출중한 요리 실력을 가지고 있고.

“아예 다음번엔 우리 집에 와서 요리해줄래?”

“내가 왜?”

“그냥…… 기분 삼아서?”

“싫어. 여기서 하루 종일 요리하는데 느그 집에서도 요리 하라고?”

“그럼 내가 해줄게.”

그제야 마리는 정우가 요리를 해달라는 게 밥이나 차려달라는게 아니라, 그와 하루 어울려달라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들은 대체 왜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는지, 직설적이고 단순한 걸 좋아하는 그녀 성격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밀당이 효과가 있긴 하네.’

마리는 주방 선임 요리사에게 들은 조언이 효과가 있었다는 걸 떠올리며, 정우를 보았다. 고작 요 며칠 연락을 끊고, 얼굴 좀  봤다고 이 자기애의 화신 같은 남자가 안절부절하여 이런 소리를 하다니.

“나 혼자야?”

“응?”

“초대하는  나 혼자냐고.”

“물론이지.”

아직 낚아 올리기엔 이른 시간인 거 같지만, 마리는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케쥴을 떠올리며 시간이 비는 날을 찾아냈다.

“다음 주 화요일이면 괜찮을  같은데…….”

“그래. 그럼 그때 우리 집에서 보는 걸로 하고, 요리사 님? 이거 맛이 좀 이상한데요.”

“갑자기 뭔 개솔…….”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먹던 장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마리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팔이 떨어질 때까지 들고 있을  같은 그의 행동에,

그가 이런 모습을 보여줌에 놀라 입을 살짝 벌리며 그가 내미는 장어를 받아먹었다.

그녀가 만들었기에, 장어는 맛있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평소에 먹는것보다 더욱 맛있었다.

그녀의 절대미각으로도, 그 이유를 파헤칠 순 없었다.

* * *

다음 주.

정우는 이번 주가 시험이라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다. 시험 문제가문제 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고등학생 수준을 뛰어넘은 지능과 지식을 갖고 있었으니.

문제가 되는 건, 고등학교의 시험 날은 학교가오전 중에 끝이 나며.

그리고 정우는 오늘 마리와 약속을 잡아 놨다는거였다. 그것도 하루 종일 놀기 위해.

‘뭐 하고 놀지……?’

당연히, 평소 하교 시간인 오후 5시를 생각하고 계획을 짜놓았던 정우는 12시부터 대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야.”

“어. 어? 왔어?”

“뭐해? 혼자서.”

마리가 도착했다. 정우는 둘이서 할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게 없으면, 뭐.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은  연인 관계라는 거 아니겠나.

그리고, 20대 초반에 군대에서 열심히 굴렀던 기억이 있는 정우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가장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마리는 10대 청춘을 바쳐가며 몰래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쉴 시간이 부족하리라.

“아무것도. 가자.”

그러니, 오늘은그저 푹 쉬게 해주는 게 정우의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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