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6화 〉NO.3H 여름방학 (166/218)



〈 166화 〉NO.3H 여름방학

“너희들, 여름방학이라고 너무 풀어지지 마라. 내년이면 고3이야 고3.”

“네에!”

“에휴, 들을 생각도 안 하는구만. 그래, 잘 가라.”

담임선생님의 말이 끝나고 아이들이 곧장 반을 뛰쳐나간다. 모든 학생들의 오랜 휴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이라…….’

작년 여름방학에는 뭘 했더라, 바닷가에 갔었다. 사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올해도 바닷가에 가볼까.’

작년에는 셋이었다. 은혜와 우림이, 마리. 이렇게 셋.
올해는 여덟이다. 아니, 주희는 선생이라 못 간다는  생각해보면 일곱.

‘많네.’

그렇다고 히로인들의 취급에 차등을 둘 수는 없는 노릇. 정우는아이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몰려왔다.

‘은혜는 된다고 하고… 우림이도, 마리는 애매하다고. 어쩔 수 없지. 예슬이나 자희 선배는 고삼이라 모르겠다. 아름이는 필참.선생님도 방학이라고 쉴  없다고 하고…… 신예도 훈련때문에  온다고.’

불참 둘.
상황 봐서 셋.
필참 셋.

상황봐서 온다고 하기는 했지만, 정우는 세 명 모두 참가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영복 사러 가야겠네.’

작년에 입었던 수영복은 이미 맞지 않게 되었다. 160대이던 키가 자라고 자라, 무려 180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1년 사이 꾸준한 운동으로 발달한 몸은 몰라보게 두툼해졌다. 만일작년에 입었던 수영복을 그대로 입으라 한다면, 아마 허벅지와 가랑이 사이가  끼어 야동에서나 볼법한 차림새가 되리라.

‘좋아는 하겠지만…….’

애인이 야한 옷을 입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그걸 남에게 보여주기 원하지는 않는다. 단둘이 있을 때 입는 거라면 모를까, 남들 다 있는 수영장에서 그럴 순 없지.

‘옷 고르는 것도 힘드네.’

종종 원래 세상이 그리워진다. 남자가 무슨 옷을 입고 있던, 발가벗지만 않으면 아무렇지 않던  세계가.

* * *

“은혜야, 우리 수영복 사러 가지 않을래?”

“엑…… 내가 왜 여자랑 같이 수영복 사러 가야 하는데?”

대뜸 전화를  우림이 은혜에게 그리 물었다. 은혜는 정우도 아니고 여자랑, 그것도 우림이랑 수영복 쇼핑을 가고 싶지 않았다.

“정우가수영장 가자고 그랬잖아?”

“그랬지.”

“근데 나는 작년보다 가슴이 자라서…… 새로 사야겠더라고. 근데 혼자 가기엔 심심하니까. 짐꾼?”

“내가 니 짐꾼을 왜 해?”

“어때? 내가  사줄게. 나와.”

“……됐어.”

“정말? 그럼 너 입고 갈 수영복은 있어? 설마 작년에 입던 거 그대로 입고 나올 생각은 아니지?”

그럴 생각이었던 은혜는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 작년에   입고 넣어놓아서 먼지가 좀 쌓이긴 했으나, 아무 문제 없는 새 수영복이었다.

그런데 아깝게 왜 새로운 수영복을 또 사냐? 그렇게 말하려 했다.

‘정우가 실망하면…… 어쩌지?’

문제는 이거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수영복을 입고 왔을 때. 그녀 혼자 헌 수영복을 입고 간다면.

만일 그렇다면.

[은혜는 올해도똑같은 수영복이네?]
[촌스럽게]
[아, 우림아. 그래. 우리 저기 가서 놀까? 수영복 예쁘네]

정우가 그리 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안다. 그리 말한 적도 없다. 그러나 찐따의 상상은 언제나 최악을 달리는 법이요, 상상이란 인간이 가진 가장  무기이니.

은혜는 자신이 가진 가장 큰 흉기로 스스로를 찌르고 있었다.

“……수영복도.”

“응?”

“수영복도 사주면, 갈게.”

“그래, 몸만 와. 몸만.”

은혜는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하루 동안 우림이의 짐꾼이 되기를 자처했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용돈만으로 살아가는 고등학생에겐, 새로운 수영복 같은  사치품에 해당했으니까.

‘진짜, 짜증나.’

돈이 없다는 게 이렇게나 서글프다는 걸, 그녀는 몸소 깨달았다.

* * *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며칠인가 흘렀다. 따스한 여름 햇살이 유리를 꿰뚫고 집안을 투시한다. 집안은 금세 후끈해져, 그만큼 에어컨이 빡세게 돌아간다.

시원하다 못해 냉골이 될 정도로 차가워진 온도에 정우가 이불을 꽁꽁 싸매며 몸을 일으킨다. 일어나자마자 에어컨 온도를 올리고 욕실로 향한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곧장 짐을챙겨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예슬과 자희도 결국 참가하기로 해, 고삼이 껴있는데 일박을 하고  수는 없다는 이유하에 워터파크에서 하루 놀고 오기로 결정됐다.

‘사람 존나많겠네…….’

여름방학은 성수기다. 전국에서 모든 학생이 몰려드는, 물보다 사람이 많은 시기. 그런 시기에 수영장을 가는 건 미친 짓이다.

정우는 그 미친짓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 정우야!”

은혜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든다. 은혜와 우림이, 마리와 아름이가 먼저 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정우는 되물었다.

“선배들은?”

“조금 늦는데. 출발 전에는 온다나 봐.”

“그래?”

정우는 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학 동안 무얼 할 거냐는 사담과 워터파크에 가서 뭘 할 거냐는 질문.

그런 잡담을 떠들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예슬과 자희가 도착했다.

“이야, 미안. 늦었지?”
“난 일찍 일어났어. 얘가 늦었지.”

“나도 방금 막 왔으니까. 괜찮아. 누나.”

“크으─ 이 누나라는 단어를 듣고 싶었다니까?”

예슬이 치근덕대며 정우에게 달라붙었다. 정우는 그녀를 질질 끌며 버스에 올라탔다.버스는 곧 출발했고, 3시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친.”
“와…….”
“사람이 개많네 진짜.”

미리 예상 하긴 했으나, 워터파크는입구부터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벌써 부터 귀가 욕구가 샘솟았다. 차라리호텔방을 빌려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들어가자.”
“응.”

인터넷으로 미리 표를 구매해, 표를 구매하지 않고 발급받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발급받은 표를 들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워터파크에 발을 디딜  있던 건,그로부터 3시간 후.

땀이 끈적하게 등을 적시고, 옷은 몸에 달라붙어 불쾌감이 하늘 끝까지 솟구쳤을 때.

정우는 그제야 워터파크에 입장할 수 있었다.

‘샤워를 하고 들어가야겠네…….’

수영장에 샤워장이 따로 있는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시원하게 물로 몸을 적시고, 수영복과 구명조끼를 입은 정우는 그제야 밖으로나와 여자들을 기다렸다.

“혼자 오셨어요?”

그러나 그가 잠시 일행을 기다리는 사이, 옷뿐만 아니라 마음가짐까지 한 꺼풀 벗어던진 사람들이정우에게 접근했다.

구명조끼로도 감출 수 없는 튼튼한 몸매와, 샤워하면서 살짝 물에 젖은 매혹적인 머리칼이 벌들을 꼬시는 꿀마냥 여자를 끌어들였다.

“아뇨.”

“이런 잘생긴 남자를 혼자 두고 가는 거 보니 정신머리가 덜 됐네. 그냥 우리랑 놀죠? 저희가 오늘하루종일 에스코트…….”

“야, 꺼져.”

“─누군데 반말을…….”

정우에게 말을 걸던 여성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마리가 서 있었다. 혼혈답게 샛노란 머리칼과 찢어진 삼백안이 그녀를 노려본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한 꺼풀 벗어던진 수영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아, 일행이, 있으셨구나… 얘기를 하시지.”

이름 모를 그녀는 곧장 꼬리 말고 도망쳤다. 마리는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정우를 향해 열불을 냈다.

“너는 저런 것도 안 쫓고 뭐하냐?”

“네가 있잖아?”

“내가 무슨 불량배야? 사람들한테 시비나 걸고 다니게?”

“확실히 마리 넌 불량배보단 마피아가 어울리지.”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니, 다른 네 사람도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우림이와 자희였다.

“저년 가슴은 계속 커지네. 시부랄 거.”

마리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고, 우림이를 한 번 쳐다본다. 두 사람의 슴부격차는 두 사람이 가진자산만큼이나 차이 났다.

실제로 우림이는 구명조끼가 없어도 물에 둥둥 뜰 정도로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며 다가왔다. 그 괴물 같은 가슴에, 다른 사람들도 시선을 빼앗겼다.

“야호, 정우야. 어때? 마음에 들어?”

우림이는 터질듯한 구명조끼 앞섬을 풀어헤치며 새로 산 물방울 무늬 수영복을 자랑했다.

 바탕 수영복에 검정물방울이 방울방울 져있어서, 마치 젖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완전 젖소 같네.”

“칭찬 고마워. 정우 너도 작년이랑은 많이 다르네.”

“그래?”

“응. 완전…… 꼴려.”

마지막 한 마디는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 우림이는 그대로 은혜를 앞으로 내밀었다. 빼빼 말랐던 작년보다 적당히 살집이 붙어, 말랑말랑한 뱃살을 가지게 된 은혜는 살찐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지 슬쩍슬쩍 몸매를 가리려 하고 있었다.

“은혜 너도 예쁘네.”

“그, 그래? 요즘엔 살이좀 쪄서…….”

“괜찮아. 보기 딱 좋은데.”

“그런가?”

칭찬받은 그녀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 실실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질투심이라도 불태웠는지, 예슬이 자기 몸을 들이댄다.

“울 동생. 누나 수영복은 칭찬 안 해줘?”

“그래. 예슬이 누나도 예뻐.”

“에이, 빈말 같은데.”

정우는 다른 사람들을 흘깃, 바라본 뒤 무려 일곱 명이라는 대인원을 이끌고 어트랙션으로 향했다.

워터파크에서만 즐길  있는, 물을 이용한 놀이기구. 물론 성수기에 몰린 사람들 때문에놀이기구 하나를 타려면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겪었다.

거기에 더해서, 몇몇 놀이기구는 탑승이 불가하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 가슴이 100cm를 넘으면 잘릴 위험이 있어서요.”

“……네.”

놀이동산에서도 그러했듯, 우림이는 놀이기구에 탑승하지 못했다. 이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희와, 우림이의 시다바리를 드는 아름이가 놀이기구에서 내렸다.

결국 놀이기구에는 은혜와 마리, 예슬과 정우만이탑승했다. 사실 딱 4인용기구라서 밸런스도 맞았고.

[출발합니다]

말과 동시에, 그들이 타고 있는 대형 튜브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가속하기 시작했다. 물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린다. 중력과 풍압이그들을 괴롭힌다.

촤악─!

중간에 커다란 물싸다구를 맞은 정우는 머리를 완전히  올리고 올백 머리를 했다.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가 사라지고, 눈에 물이 들어간 정우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아…….”

“……왜?”

마리가 그를 바라보고 탄식을 내지른다. 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 묻자, 마리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시치미를 떼기 시작했다.

‘아, 씨발……  갑자기 심장이…….’

마리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큰 눈동자에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는데,어째서 자신은 삼백안에 매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건 그녀가 태어나서단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유전자 때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서양인인주제에 눈이 작고 확 찢어진 날카로운 외모의 미남을 꼬셨다.

그리고 그 취향은 그대로 전해져, 그녀는 자신처럼  찢어진, 나쁜 남자의 얼굴상을 좋아했다. 방금 정우는 그녀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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