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NO.3H 여름방학
지상 20미터. 시속 70Km/h. 체감 속도 100km. 워터파크 최대의 어트랙션. 워터 루프를 발견한 우림이는 오늘도 반려 당했다.
“아, 가슴이 너무 크셔서…… 중간에 다치실 수가있으시거든요.”
“네…….”
몸무게 100kg이 넘는 사람도 탑승할 수 있는 놀이기구였으나, 가슴 길이가 100cm가 넘어가는 우림이는 탑승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혜에게 속삭였다.
“재밌게 놀다 와. 알았지?”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뭐가? 나는 그저 타고 싶어도 못 타는 놀이기구를 은혜가 무서워서 못타고 내려오는 게 아닐까 걱정되서…….”
“타면 될 거 아니야! 타면!”
은혜는 그리 말하며 위로 올라갔다. 정우와 마리도 그 뒤를 따랐다. 우림이는 아름이와 아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은혜야, 무서워?”
“아, 아니! 하나도 안 무서운데?”
은혜는 애써 용기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대기 시간 30분. 이 30분 내내,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차라리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면 모를까, 칼 든 살인마라도 쫓아오는 것 마냥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절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괜찮아. 안 죽어.”
뒤에서 정우가 은혜의 정수리 위에 턱을 올려놓으며 말했다.평소라면 좋았을 그 압력도, 지금은 그저 심장이 빨리 뛰게 만드는 원흉 중 하나였다.
“당연히 안죽지…… 안 죽는 건 아는데…….”
“그럼 뭐가 걱정이야?”
“그냥 무섭잖아! 넌하나도 안 무서워!?”
“아니, 그야 뭐…… 죽는 것도 아니고. 무서워할 이유가 있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0대의 싱싱한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과 다르게, 어지간한 일은 다 겪고 푹 삭아버린 정우의 두뇌는 귀신이나 새로운 모험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니까.
그가 겁먹는 건 돈과 흉기를 든 범죄자였지,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놀이기구 따위가 아니었다.
“근데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어느새 줄은 줄어들 대로 줄어들어, 10분 남짓 기다리면 탑승할 수 있어 뵈였다. 20분 넘게 기다리고 10분만 더 기다리면 탑승할 수 있는데, 무섭다는 이유로 도망치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후우, 후우……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은혜는 뭐가 그리 무서운지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정우는 쿡쿡 웃으며 등 뒤에서 조용히 서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뭐야, 마리 너도 겁먹었어?”
“……뭐?”
“아니,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하길래.”
“……아무것도.”
“진짜 겁먹은 거야?”
그녀답지 않게 조용한 어투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고, 마리도 겁먹을 정도로 이 놀이기구가 그리 무섭다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가 뻣뻣하게 굳은 건 놀이기구 따위에 겁먹어서가 아니다. 고작 이런 장난감에 겁먹을 정도로 겁쟁이가 아니었다.
마리는 그저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정우의 얼굴에 굳은 거였다. 원래부터 어느 정도 봐줄 만한 얼굴이었으나, 지금은 아예 그녀의 심장을 직격 하는 스타일이었다.
고작 머리 모양, 눈빛 좀 바뀌었다고 사람이 이렇게 바뀐다는 걸 깨달은 마리는 최대한 정우와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안 그래도 그가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녀서 심란한 와중에, 그에게 다시 한 번 반해버린다면. 정신 나간 다른 애들처럼 그에게 종속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본인의 마음을 잃고, 그가 원하는 바대로 움직이는 사랑의 노예가 되기는 싫었다. 사랑이 축복이자 저주라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네. 탑승하시고, 팔다리 모으시고. 절대 고개 들지 마세요.”
잠시 후, 그들의 차례가 왔다. 동그란 원통 안에 들어간 마리는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3, 2, 1. 전자 카운트가 울리고. 바닥이 사라진다.
중력에 의해 초당 9.8m씩 가속하기 시작한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시속 70km에 도달한다. 체감 속도는 가히 100km에 달했다.
자동차나 바이크에 탄 것도 아닌 맨몸으로 느끼는 제로백은 가히 영혼이 탈곡되는느낌과 견주어 볼 만했다.
덕분에 가지고 있던 고민마저 모조리 사라진 지금.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물을 뱉어내며 마리는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고바로 옆자리. 물세례를 맞고 강제로 머리 스타일이 고정된 정우를 발견했다.
‘안 되겠어.’
내려오면서 어디 긁힌 걸까, 그녀는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화상이 틀림없다.
* * *
“와, 무슨 식당에 사람이 빠지질 않네.”
“그러게.”
식당에 온 정우는 3시가 넘어서야 겨우 6인 식탁을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점심시간을 훨씬 지난 시간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물보다 많다. 워터파크에서는 흔한 일이었고, 별로 맛있지도 않은 레토르트 음식을 먹기 위해 비싼 돈 내고 몇 시간 줄을 서는 것도 흔한 일이다.
“와, 샌드위치에 콜라 팔아놓고 만원을 받네.”
마리가 나온 음식의 상태를 살펴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가 주방장을 한 대 후려패고 싶은 표정이었다.
정우는 그런 그녀를 말리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싸구려 소스 향이 강하게 풍겨왔다. 그러나 노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쓴 몸은 싸구려 샌드위치도 고급 스테이크 못지 않게 받아들였다.
땀 흘린 뒤 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고, 실컷 뛰어 놀고 먹는 음식이 그 다음으로 맛있다고. 정우는 지금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따.
“이 다음은 뭐 할거야?”
“뭐 할거냐니?”
“보니까 여기 입장권 가진 사람은 저녁부터 놀이공원 무료입장이 가능하더라고. 놀이기구는 못 타지만 밤에 퍼레이드 한다는 데. 그거 보러 갈래?”
온종일 제대로 된 기구는 타지도 못 하고, 파도풀에서몸만 둥둥 띄었던 우림이가 말했다. 그녀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던 정우는 그리 하자고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 파도풀에서 몸이나 담그다 빨리 넘어가자. 또 입장하는데 하루 종일 걸릴랴.”
“그래.”
우림이의 제안에 여섯 명은 금세 식사를 마치고 파도풀로 향했다. 오전의 깨끗했던 물이 때와 기름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들어가기 꺼려졌지만, 수영장이 다 그렇지 뭐. 정우는 사람을 헤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안쪽은 새로운 물이 공급되어 깨끗한 편이었다.
마리나 은혜, 우림이도 뒤따라 들어왔다. 구명조끼만큼이나 가슴이 둥둥 떠 그녀를 띄어 올렸다. 농담삼아 말했던,그녀는 구명조끼가 필요 없을거라는 말이 진짜로 일어났다.
그렇게 안에서 파도를 즐기며 놀던 중, 정우는 마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마리는 곧장 고개를 피해물 안으로 잠수했다.
그래 봐야 공기 가득 찬 구명조끼에 의해 다시 올라왔지만,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다시 잠수한다.
그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정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푸확, 하고 수면 위로 빠져나온 마리는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정우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또다시 잠수한다. 혹여 쥐라도 걸린 게 아닐까, 걱정된 정우는 물 안으로 손을집어넣어 그녀를 끌어 올렸다.
“뭐, 뭐야.”
“어라, 괜찮네?”
“당연하지, 이거 놔.”
평소라면 떽떽 소리 질렀을 마리가 오늘따라 얌전했다. 이상함을 느낀 정우가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방금전까지 물 안에 있던 사람치고는 너무나 뜨거웠다. 정우는 그녀의 몸을 살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니야?”
“뭐?”
“머리가 뜨거운데. 몸도 떨고 있고.”
마리는 그런 거 걸릴 리가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그럴지도 모른다 말하며 천천히 파도풀에서 빠져나왔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열을 억지로라도 이해하려면 그편이 제일이었다.
진짜든 아니든, 그녀는 감기에 걸렸다는 핑계로 수영장을 아예 빠져나왔다. 다른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집으로 복귀했다.
직장에서 구해준, 싸늘한 원룸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옷을 세탁기 안으로 벗어던지고 욕실에 들어갔다. 욕조 하나 없는 작은 화장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리는따듯한 물을 맞고 있으면, 이제야 자신의 행동이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혹여나 정우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정우에게 미움을 받는 게 아닐까. 평소라면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생각들이가득 차오른다.
“씨이발…….”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뒤, 그녀는 냉장고를 열었다. 이렇게 기분이 꿀꿀 할 때는 술이 최고다. 미성년이라도 요리사인 그녀가 술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취익, 캔맥주의 뚜껑을 따고 한 입 들이킨다. 시원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오른다. 쓸데없는 잡념이 강렬한 맥아 향에 쓸려 내려간다.
‘안주 땡기네.’
그녀는 곧장 일어나 요리를 시작했다. 간단하게 집어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 홀로 안주에 맥주를 들이켠다.
언제나 혼자였기에, 이런 일은 익숙하다. 홀로 술을 들이켜는 일이나,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홀로 울려 퍼지는 TV 소리를 안주 삼는 일 같은 거.
고독은 익숙하다. 익숙하니 괜찮다. 전혀 아프지 않다.
‘시바아알…… 우울해.’
마리는 식탁에 몸을 기대며 엄마가 어째서 결혼을 했는지, 왜 매일 같이 술을 까마시고 들어와 폭력을 휘둘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영혼마저 시린 이 고독함이 사람을 홀로 있지 못하게 만든다. 술이 만들어낸 가짜 열로 몸을 속여본다. 그러다 집구석에서 마리를 보면 순간 기억이 되살아나고, 자신이 이런 꼴이 된 게. 이 모든 고통이 그녀 탓이라고 여기고 주먹을 휘둘렀으리라.
그리 생긴 죄책감은 더더욱 그녀의 영혼을 차갑게 식힌다. 영혼이 술을 탐하고, 술은 또다시 죄책감을 마비시킨다.
악몽의 연쇄다. 지옥 같은 사슬.끊어내야 한다. 다만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외로워…….’
사무치는 외로움이 그녀를 덮친다. 그녀는 그렇게 잠에 들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그녀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한기와 뻐근함에 비명 질렀다.
“으아아아…… 몸 왜 이래…….”
뚜둑, 뚝뚝 끊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로 몸을 던진 그녀는 전신이 덜덜 떨린다는 사실을 느꼈다.
감기였다.
[뭐? 감기 걸렸다고?]
“예…… 주방장님. 그래서 못 갈 거 같은데.”
[아니, 휴가 가서 뭔 짓을 했길래…… 그래, 뭐. 아픈 애한테 할 말은 아니지. 그냥 이 기회에 푹 쉬어라. 몇 안 남은 방학이니까.]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마리는 죽이라도 해 먹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나 부엌에 딱 선 순간, 모든 게 귀찮아졌다.
나태와 우울이 그녀를 덮쳤다. 외로웠다. 이럴 때 누가 대신 간호해줬으면 했다. 이래서 결혼이니 연애니 하는 구나 느꼈다.
‘남들은 이럴 때 부모가 간호해 줄 텐데.’
다른 10대 청소년들은 부모님이 약이니 죽이니 사다 줄 거라는 걸 깨닫자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더욱 지끈거렸다.
빈속으로 침대에 누워 끙끙거린다. 먹은 게 있어야 체력이라도 회복할 텐데, 먹은 것도 없어서 체력도떨어졌다.
그렇게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땀을 흘리고, 고통에 신음하던 그때. 누군가 도어락을 해체했다.
스륵, 스르륵.
‘누구지…….’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온 걸 보면 도둑이나 강도는 아니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을 털어서 얻을 것도 없었고, 번호를 아는 걸 보면 아마도 이 집을 구해다 준 주방장이겠지.
“많이 아파 보이네.”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덕분에 머리가 지끈거려 무슨 말을 하는지, 누구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조용히 부엌으로 가 요리를 시작했다.
파를 송송 써는 소리와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 식욕 없는 상태임에도 코를 벌렁거리게 만드는 냄새.
‘누구…….’
살짝 눈을 뜬다. 커다란 덩치. 그것만으로 마리는 부엌에 있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우가 왔다. 그녀가 두 번 반한 사내가.
그녀의 심장을 세 번째로 훔쳐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