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NO.9 섹스도 혈연 학연 지연
“그래서 선배님. 저랑 사귀실래요?”
지연이 말했다.말투에서 그녀의 당돌함이 묻어나온다. 정우는 슬며시 뒤로 재며 그녀에게 물었다.
“나 감당할 수 있겠어?”
“못 할 건 또 뭐가 있나요. 아, 제 외모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야 말씀하세요. 원하는 취향대로 맞춰드릴테니까.”
“내가 대머리가 좋다고 하면 빡빡 깎아오게?”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하죠. 장난인지 진심인지.”
그녀는 당당했다. 그 당당함이 순수함에서 비롯되었다면 좋으련만 그녀의 당당함은 여러 가지 계산이 섞인 추악함이 뒷받침되었다.
“그래. 그럼 나는 양갈래 머리가 좋으니까. 내일부터 그렇게 묶고 등교해.”
“……양갈래 머리요?”
흔히 트윈테일이라고 하는,솔직히 누가 해도 그리 어울리지 않는 머리.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어쩌겠는가. 상품이 그리 원하는데.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곧장 등허리까지 내려오면 머리를 양쪽으로 들어 묶었다. 그나마 부끄러움은 남아 있는지 목덜미쪽에서 묶으려는 걸 정우가 지적하니 그제야 관자놀이까지 끌어올렸다.
이 나이 대 소녀가 하기에는 사뭇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꽤 어울리는 모습을 한 지연이 이제 됐냐는 듯 정우를 노려보았다.
“아, 잠시만.”
정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은혜에게 전송했다. 사진을받은 은혜는 물음표를 백만 개쯤 송신하고는 곧장 달려왔다.
“뭐야, 뭐야뭐야뭐야! 이거 뭐야!”
정우가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지연에게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이거요?”
“나, 나랑 캐릭터가 겹치잖아!”
“저는 원래 양갈래머리가 아니거든요.”
지연은 짜증을 내며 자신에게 손가락질 하는 은혜의 손을 턱, 하고 쳐냈다. 자존심 강한 그녀가 삿대질을 참을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손가락을 얻어맞은 은혜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헉! 하는 표정을 짓고선 지연을 노려보았다.
“서, 선배한테 폭력을…….”
“삿대질도 엄연히 폭력입니다만.”
“……너 친구 없지?”
“무슨 소리를.”
흥, 하고 콧바람을 내뱉는 지연을 보며 은혜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소녀가 자신과 동류라는 걸 체감했다. 강한 척 꾸미고는 있으나 그 본질은 연약한 찐따.
은혜가 정우의 도움으로 그나마 평범해졌다면,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찐따티를 벗어냈다는 게 다를 뿐.
“선배한테는 존대를 써야지.”
“아, 선배셨나요? 작아서 몰랐네요.”
“한 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자신과 동류라는 걸 깨달은 은혜는 찐따만이 가지는 강력한 패시브 스킬을 발동했다. 바로 강약약강. 자신보다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해질 수 있는 그 스킬을.
“─아, 너. 왜 정우한테 엉겨붙어 있나 했더니. 정우한테 고백이라도 하러 온 모양이구나.”
“……왜요, 그럼 안 돼요?”
“그럼 당연히 안 되지!”
은혜는 정우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정우 여자친구니까.”
“……네?”
그 말에 설마 연예인이라는 사람이 여자친구가 있을까, 아니. 있어도 이런 여자일거라 생각못 했던 지연은 멈칫했다.
그리고 은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정우에게 물었다.
“…정말 이런 사람이랑 사귀어요? 선배?”
“와, 아직도 정우 여자친구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있네.”
“선배한테 안 물어봤어요.”
지연은 은혜를 한 번 째려본 뒤 정우에게 다시금 물었다. 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연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 안 돼…… 양다리 남친은 좀…….”
“그런데 마치 내가 널 받아줄 거였다는 듯 말한다?”
“네? 그럼 뭐. 안 받아주실 생각이셨어요?”
“내가 왜?”
“그야, 그야…….”
그제야 지연은 자신에게 내세울 게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예쁘긴 하지만 연예인만큼은 아니다. 몸매가 좋기는 하지만 모델 수준은 아니다.
종합적인 평가는 상위권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것도 아니다.
그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자 모든 일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에게 으스대던 일이나 선배에게 턱턱 손가락질하던 일들이.
“제가 먼저 고백을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았을 때. 그녀는 스스로에게 상당한 고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80점이라도 주관적으로는 140점이다.
제아무리 정우라고 할지라도 쉬이 우습게 볼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가이다.
“미안. 거절할 게.”
그러니까 정우에게 거절당하는 건 상상으로도 해본 적 없는, 있을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다.
“에……?”
갑자기 그녀의세상이 무너져내렸다.
* * *
세상이 무너졌다. 그녀의 세상이 틀렸다는 게 드러났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건 어렵고 개인을 바꾸는 건 쉽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사상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그를 바꾸기보다 정우를 바꾸기로 했다.
“선배. 이것 좀 드시죠.”
“서언∼배. 더우시죠? 제가 선풍기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선배선배. 이번 주 주말에 같이 놀러 가요.”
자신을 거부했던 정우가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을 선택한다면 그리되리라. 자신이 틀린 게 아니라 정우가 순간 엇나갔을 뿐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치 시종 마냥 정우를 쫄래쫄래 쫓아다녔고, 당연 그 모습은 다른 아이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저년은 뭔데 나대지?”
“한 번 손 볼까?”
“야야, 쟤네 애미가 무슨 장관이래. 건드리지 말자.”
다행히 그녀는 뛰어난 혈연을 갖고 있었다. 본인은 정작 그 혜택을 느끼지 못했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고위 공무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그녀에게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정우는 아니었다.
“야, 저리 가라니까?”
“그럼 저랑 사귀시죠.”
“꺼져.”
“……언제까지고 저를 밀어낼 수는 없을 거예요.”
“응, 아니야.”
지연은 이토록 자신을 밀어내는 상대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대체 뭐가 문제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정우가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그녀를 밀어내던 사람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녀가 먼저 다가갔음에도 그녀를 밀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알지 못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 따위 알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1학년 주지연이라고 합니다.”
“어? 어, 그래. 반갑다. 무슨 일이니?”
“다름이 아니라…….”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제일 잘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세상 모든 일, 학연 혈연 지연으로 해낼 수 없는 건 없다.
“저도 밴드부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게 바로 지연의 방식이다.
* * *
“안녕하세요! 선배!”
다음 날. 정우는 당당하게 밴드부에서 자리 잡고 있는 지연을 보고 의문을 가졌다. 누구나 올 수 있는 건 맞지만 상식적으로 자기 동아리도 아닌 부실에 들어와 앉아 있나?
“너 뭐야? 여긴 밴드부만…….”
“네. 밴드부만 들어올 수 있었죠. 그래서 입부 했는데요.”
“누구 허락 맡고?”
“당연히 선생님이죠. 동아리 가입 권한은 어디까지나 선생님한테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학교의 주인은 이사장이고 그 이사장의 권한을 대신 휘두르는 게 선생이었으니까.
그러나 밴드부는 이 학교의 교장도 주목하고 있는 대형 동아리. 아무나 가입시키지는 않을 텐데.
‘협박이라도 했나?’
밴드부의 고문인 신주희는 어른이지만, 평범한 선생이다. 지연의 부모는 설정상 장관직 고위 공무원이었으니. 일개 선생인 주희가 거절할 수는 없었겠지.
설령 그녀가 거절하더라도 그 윗선. 학생부장이나 교장 선생이도장을 찍으면 그만이고.
“할 줄 아는 건 있냐?”
“가르쳐 주세요.”
“미안한데, 우린 칠 줄 아는 사람만 뽑거든.”
“그건 이상한데요. 동아리면 모르는 사람끼리 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
정우는 그녀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스스로가 포기하고 나가게 해야지.
“들어봐.”
옆에 있는 기타를 들고 가볍게 노래를 부른다. 아무리 점심시간이라지만 학교에서 시끄럽게 록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어쿠스틱 기타가 아날로그 특유의통통 튀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정오에 어울리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역시.’
지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천금만금을 들고 오더라도 눈앞의 이 보석에 비견할 수 있을까.
갖고만 있어도, 그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가치가 올라가는, 주인을 치장하는 가장 뛰어난 보석.
그게 정우였다.
“이 정도는 칠 줄 알아야 해.”
“대박.”
“알았으면 알아서 나가. 알았냐?”
“역시 선배, 갖고 싶네요.”
“뭐?”
지연이 다가온다. 아직동아리 실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와 그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 세계에 침범하지 못한다.
단둘만의 세계에.
“이거, 갖고 싶은데.”
툭, 정우의 가슴팍에 지연의 손가락이 닿는다. 그 너머에는 쿵쿵 뛰는 심장이 있었다. 격하게 뛰지 않는다. 1분에 60회. 느릿느릿하다.
그 심장이 갖고 싶었다. 그의 심장이. 그녀만 보면 분당이백 번이 넘게 뛰게 만들고 싶다.
그녀만 보면 미쳐버리게 만들고 싶다.
“저 주시죠?”
그녀는 원하는 게 있다면언제나 손에 넣어왔다. 그래,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