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3화 〉NO.9 섹스도 혈연 학연 지연 (173/218)



〈 173화 〉NO.9 섹스도 혈연 학연 지연

갖고 싶다. 지연은 정우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그리 말했다. 정말 로맨틱한 대사였다. 만일 두 사람이 연인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이였다면 이 자리에서 옷을  벗고 사랑을 나눴을지도 모르지.

그래, 적어도 타는 사이였더라면.

“너 이거 성추행인 건 알지?”

“네?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실수에요! 실수!”

정우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린 일을 지적하니 지연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남자가 여자 가슴을 만질 수는 있으나, 여자가 남자 가슴을 함부로 만질 수는 없는 세상이다.

그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마찬가지. 별 사이도 아닌 후배가 할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흐음─이걸 어떻게 할까.”

정우는 셔츠에 묻은 그녀의 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그대로 들고 가서 증거로 제출하면 그녀의 인생은 끝난다.

이렇게나 확실한 증거를 갖고 눈물 몇 방울 짜주기만 한다면 사람 인생 하나 망치기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였으니까.

 사실을 본인도 잘 알고 있는지 지연은  마려운 개마냥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경찰서에 가져갈까∼?”

“아, 아니. 선배. 저기, 제가 잘못을 하기는 했는데…….”

“그런데?”

“가슴 좀 만진 거 갖고 경찰까지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본인도 말하다가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지연은 중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정우는 마치  어처구니 없는 전략에 넘어갔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그도 그런가……?”

“…네! 그래요! 애당초 남자가 성희롱 당했다는 기록만 있어도 욕먹는다고요. 너도 좋아서 당해준  아니냐고. 하물며 선배는 연예인이잖아요? 타격이  클걸요.”

“네 말도 맞네.”

남자가 힘으로 여자를 억압할 수 있는 이상, 여자가 단순히 힘만으로 남자를 억눌러 성추행했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물론 힘이 강하든 말든 성희롱은 할 수 있는 거니까 법적으로는 처벌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어떨까. 막지 못한 남자에게도 책임이 전가된다.

“그럼 이렇게 할까?”

“어떻게요?”

“가서 음료수 좀 사와. 여섯 명이 먹을 만큼. 아, 돈은 줄게?”

그러니 정우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밀리는 척 그녀를 빵셔틀로 써먹는 것도 있을  있는 일이었다.

지연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저 도구가 될 뿐이라는 걸, 그와 연애 관계는 꿈도 꾸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금방 다녀올게요.”

약점이 잡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정우에게서 카드를 건네받고 매점으로 향했다.

그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아이들이 동아리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후후 웃고 있는 정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약간은.”

잠시 후, 그녀들은 음료수를 가득 안고 들어온 지연을 보고 그가 무엇에 기뻐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성욕 덩어리 사내는 기어코 새로운 여자를 거느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그녀들에게 썩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지연을 괴롭히기로 마음먹었다.

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들도 나름 1년 더 나이 먹은 선배였으니까.

* * *

“야, 나 과자 좀 사다 줘.”

“……제가 왜.”

“어허. 사다 달래도?”

“돈, 주세요…….”

“그래. 아, 남는 돈으로는 너도 뭐 하나  먹어.”

지연은 동아리의 마스코트가 되어 모든 아이들에게 귀염받았다. 모든 사람의 빵셔틀이 되었다는 말과 동의했다.

선배들의 심부름을 할수록 지연의 자존심과 자존감은 벼랑 끝 바위 처럼 깎여가기 시작했다.

하물며 그녀가 선배들의 빵셔틀이나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을  더욱 그러했다.

“야,  선배들 빵셔틀이나 하고 다닌다며? 내 것도 좀…….”

“씨발련이!”

그러나 약점 잡힌 선배들과 다르게 이름 모를 같은 학년이 시비를 거는 건 참지 않았다.

그녀는 싸움을 일으켰고, 상대방과 어딘가 부서질 정도로 싸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혈연을 이용해서 무마시켰다.

“아니, 제가 먼저 맞았다니까요?”

“너도 많이 때렸잖아. 그리고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며?”

“그게 무슨…….”

선빵을 얻어맞은 학생은 억울하다는  항의했으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강 이런 식으로 끝난다. 군대에서 배워온 일 처리와 눈감아주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구시대 꼰대들의 향연.

거기에 약간의 인맥과 촌지가 더해진다면 학교 내에선 귀족에 가까운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지연은 귀족처럼 대우받는  기분이 좋았다. 짜릿했다. 최근 잠자고 있던 물욕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선배도 내 대단함을 알아야 하는데.’

이 주지연이, 과거엔 왕의 핏줄이었던 주씨 가문 35대손 주지연이를 밀어내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자신이라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

‘우량주가  몸값 떨어트려서 코앞에 떨어져 있으면 냉큼 물어야지…… 더 떨어질 줄 알고 입 벌리고 있으면 그게 떨어지나? 원래 가격 회복하지.’

정신회복성. 회복탄력성이 뛰어나다 못해 히어로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수준인 그녀는 금세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래. 나는 대단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선배가 허접한 거야. 하긴 그래, TV. 그까짓게 뭐라고…….’

연예인이라는 간판에 눈이 멀어 잠시 판단이 흐려졌었다. 이래선  되지. 잘못된 판단을 할 뻔했다. 자기 자신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매도할 뻔했다.

결국 선배에게 다시금 선포하기 위해 동아리실로 향한 지연은 부실에서 입을  닫고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정우를 발견했다.

“선! ……배?”

휙, 무심하게 휘두른 4B연필이 스케치북을 스쳐 지나간다.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던 헛손질이 하나의 그림으로 점점 덧칠해져 간다.

그건 예술이었다. 그녀가 만들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예술적인 화폭. 자신의 상상을 생각대로 그려낼  있는 솜씨. 세계에 이름을 떨칠 수 있는 대화가의 자질.

‘저런 걸 보여주면…….’

알고는 있었다. 그에게 재능이 출중하다는 걸. 연예인이라는 길은 그런 거다. 외모든 매력이든 재능이든 무언가 하나 특출나지 않으면 도저히 해먹을 수 없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건,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뜻이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 지연아.”

막 몰입 상태에서 빠져나온 정우는 자신을 찾아온 지연을 보고서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평소 그가 보여주지 않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나오는 나긋한 말투가 그녀의 귀를 간질인다.

그건 독이었다. 강철같이 무장한 그녀의 심장을 녹여 내리는 산(酸)과도 같았다. 항상 매몰차게 대해 져 왔던 그녀는 그런 취급을 버티지 못했다.

“무슨 일?”

“아,아아…… 그러니까…….”

그러나 그녀의 자존심은 이대로 얼버무리는 걸 참지 못했다. 그녀의 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결국에 그녀는 최악의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다.

“선배. 사랑해요. 저랑 사귀시죠?”

패닉셀. 자신이 추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쌓여 그녀를 밀어트렸다. 말도 안 되는 나락 밑으로.

“그래? 나 집중했더니 목이 마른데.”

“…금방 사올 게요.”

이게 아닌데- 싶다가도, 정우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게 된다. 틀려먹었다. 사랑이란 비이성적인 광기가 이성을 마비시켜간다.

* * *

그 뒤로, 지연은 점점 더 지극정성이 되었다. 정우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치고 올라가기만 했다.

그녀는 처음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한 사람의 가치는 올라가는데, 다른 한 사람의 가치는 그대로라면. 그건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고도   있었다.

지연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연애 시장에서 가치란 매력이요, 매력 없는 여자는 연애 시장에서 가장 값어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토록 열심히 정우의 시다바리를 드는 건 그녀의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녀가 그토록 자신을 깎아내릴수록 그녀의 매력은 점점 더 볼품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면  되는데.’

그녀의 매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그럴 기회가 쉬이 생기지 않았다.  불안은 그녀의 행동 패턴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무슨  있냐.”

“…아뇨. 아무것도.”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지연을 보고 그녀가 무언가 고민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그녀 입장에선 하찮은 사랑 이야기라는 건 몰랐으나 여전히 한심하긴 매한가지.

“한숨 쉬지 마라. 고개 숙이지 마라. 고민 품지 마라. 돈이든 인맥이든, 쓸  있는 건 다 쓰라고 가르쳤을텐데.”

“……네.”

“요즘엔 항상 기죽어 있더구나. 나이대가 나이대니. 사랑이라도 하는 거냐.”

“……아뇨. 그런 건.”

“하고 싶으면 해라. 말리진 않으마. 그러나 너무 매달리진 마라.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인연이라고 해봐야 결국…….”

“아니라니까요!”

헉, 저도 모르게 소리친 지연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살살 기었다. 그녀에겐 소리 높여 말하는 일조차 죄악이었다.

실제로 말을 끊고 소리 지른 지연을 보며, 어머니는 불타오를 듯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리도 지르는구나. 걔가 그리도 마음에 들더냐?”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됐다. 네가 그런모습을 보일 정도면…… 얼굴 한 번 보고 싶은데.”

“네?”

그녀의 어머니는 젓가락을 내려놓고선 말했다.

“그래, 뭐 하는 얘냐?”

* *

정우는 오디션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예슬과함께 촬영장으로 왔다. 벌써 6화 촬영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2화가 방영됐고 사람들도 슬슬 정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정우 참가자. 오늘은 뭘 보여줄 생각인가요?”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는데요.”

“……네. 매번 그리 말하고 놀랄 만치 대단한 걸 꺼내곤 했죠. 천재의 오만함이라는 건가요?”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우는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준비했다.

연습은 하지 않는다. 노력도 하지 않는다. 남들이 보면 오만하다고 욕할 수준의 행보. 그러나 결과를 보고 나면 그들의 분노는 쾌락으로 변모한다.

정우가 실제로 연습을 했건 하지 않았건 그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항상 최상위였기 때문이다.

‘연습을  했으면 이런 기량이 나올 수가 없는데…….’

프로도 혹독하게 연습을 한다. 킥복싱 프로에게 태권도 발차기를 시킨들 잘 해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같은 발을 다루는 스포츠니 어느 정도는 해내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프로라 부를 수준은 아닐 것이다.

정우도 그러해야 했다. 그가 발라드를 부르고 나서, 시티팝, 트로트, 하물며 아이돌 노래까지 부르게 했다.

정우는 그 모든 걸 완벽 그 이상으로 해냈다. 음악의 신이 있다면 바로 나라고 외치기라도 하는 듯.

“노래하겠습니다.”

건성건성,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 편집된 영상에선 천재의 여유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선보인 실력마저 천재를 자칭하기에 불편함 없는 수준이었으니.

“아…… 끝났나요?”

“네.”

“정우 군에게는 매번 새로움을 느끼네요. 저는 10점 주겠습니다.”
“저도요. 10점.”
“10점이요.”

30점 만점. 또 이런 식이다. 정우는 살짝 짜증을 부리며 무대를 내려갔다. 그리곤 정우만을 위해 준비된 개인실로 향했다.

개인실에서 다른 촬영진들의 무대를 구경하고 있을 때 방송국 PD가 누군가를 데리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PD님? 이분은……?”

“자네가 정우인가? 으음, 마스크는 나쁘지 않은 수준인데…… 이런 놈팽이가 뭐가 좋다고.”

“누구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여성은 나이는 조금 들어 보였으나 그를 능가하는 카리스마를 품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을 정도로.

“나 주지연 애미 되는 사람일세.”

“……아, 네.”

“곧바로 본론을 꺼내지. 우리 딸이랑 헤어져주게.”

그 말을 들은 정우는 당황했다.

‘아니, 사귄 적도 없는데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정우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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