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NO.10 이 소설 주간 연재인가요?
* * *
얼마 뒤, 연재에게서 문자가 왔다. 정식으로 연재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는 문자였다.
[반응이 좋기는 했어요. 제가 지금껏 썼던 그 어떤 소설보다……]
“그래서? 하고 싶어?”
[하고는 싶죠, 그런데 이건 제 소설이 아니잖아요]
인터넷에 올린 소설은 정우가 쓰는 주인공 시점과, 연재가 쓰는 조연 시점의 두 가지 소설이 하나로 통합되어 올라간 것이다.
설령 연재가 재능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중학생, 다 여물지 못한 그녀의 필력을 보고 사람들은 금세 이 소설이 하나의 소설이 아니라는 걸.
정확히는 글 작가가 두 명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당연히 재미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재밌는 것만 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라, 제의를 보낸 출판사에서도 그리 말했다고 한다.
[제 소설 부분은 자르거나 외전으로 내고, 오빠 소설만 따로 내고 싶다고……]
“걸러.”
[네?]
“거르라고.”
그러나 정우는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인기를 끌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연재와 소설을 쓰는 게 즐거워서, 그녀가 하루하루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쓰는 거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잘라내고 자신의 소설만 담고 싶어? 배가 불렀다. 달달한 수박을 먹으려면 수박씨 거르는 노력 정도는 해야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오디션 때문에 시끄러운데 소설까지 써서 주목 끌 필요도 없어.”
정우는 최근 최종 탈락한 오디션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실력만으로 겨루는 프로그램이었더라면 정우의 우승은 따논 당상이었으나.
공중파 프로그램쯤 되면 실력만이 아닌 인맥과 스토리, 그리고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에 의해 우승자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정우에겐 인맥이, 흔히 말하는 백이 없었다. 가차 없이 잘라내고 악마의 편집으로 갖고 놀기 딱 좋은 인재였다.
방송사들은 그러했다. 악의적인 편집으로 정우를 깎아내리고 우승자를 치켜세웠다.
아무리 우승에 관심이 없었어도 이쯤 되면 어처구니가 나가기 마련이다.
[아, 저도 봤어요. 그거…… 오빠가 우승 못 한 게 말이 안 되는데.]
“됐어.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것도 아니었고…….”
[4강까지 갔는데, 안 아까우세요?]
“아까워해야 하는 건 너 아니냐? 소설 제의가 왔는데 너는 필요 없단 소리를 들은 거잖아?”
[네? 오빠랑 비교했을 때 저 같은 게 부족한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자존감이 턱없이 낮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연재는 정우에게 밀린 사실을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정우는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네 소설엔 네 소설만의 장점이 있는데 무슨. 치킨이 있으니까 백숙은 필요 없다는 거랑 마찬가지지.”
[아, 그 비유 재밌네요. 써도 돼죠?]
“마음대로.”
연재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정우랑 친해진 이후로 그녀는 부쩍 웃음이 늘었다.
그리 좋아할 거라면 자주 전화를 걸라 말해도, 그녀는 마땅한 이유가 없으면 전화를 걸지 않았다.
전화를 할 때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말들을 한꺼번에 내뱉는 것도 고역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게 그녀의 타고난 성격이었으니까.
[오빠, 내년에 고3으로 올라간다고 했었죠]
“그래. 너는 내년에 고등학교 올라간다고 했지? 어느 고등학교 시험 볼 생각이야?”
[비밀이에요]
연재는 쉬잇, 쇳소리를 내며 보이지도 않을 정우를 향해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정우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원서를 썼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기껏 말해놓고서 입학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쪽팔리니까.
공부를 등한시한 대가가 한 번에 덮쳐왔다. 어쩔 수 없었다. 공부가 그리 필요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이제 와 급하게 공부하고 있지만…….
‘합격할 수 있을까.’
그러나 확실한 건, 살면서 이토록 열심히 공부해본 적 없다는 점.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무언가 이루어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오빠. 저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그래.”
뚝, 할 말을 마친 연재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통화를 끊었다. 정우는 끊어진 전화기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고등학교로 온다면…… 얘가 걔인가?’
2년 지난 지금은 잘 떠오르지도 않는 게임 속 히로인 얼굴을 떠올리며. 정우는 그녀가 부디 자신의 학교에 합격하기를 빌었다.
* * *
12월 말.
모든 학생들이 가장 늘어지는 시기였다. 수능 끝난 고3은 물론이요, 내년도 수험생들과 아직 수험이 멀어 보이는 고1 모두.
“겨울 방학이라고 놀지 마라. 너희들은 이제 고3이야, 큰일 났다. 니들.”
담임인 신주희가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그리 이야기했다. 그 말에 무게감을 느끼게 된 고2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칠판을 노려보았다.
어찌 보면 남들보다 앞서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합법적으로 놀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3학년이 된다면. 수험생이 된다면 그들을 쪼아대는 부모님의 성화가 더더욱 커지게 될 테니까.
물론 이 모두 정우에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뭐 하면서 놀까.’
자신이 이 세계에 떨어진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그 말은 즉 이 세상을 즐길 시간이 1년 남짓 남았다는 뜻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순순히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으나, 벌써부터 축 처져서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1년밖에 남지 않은 청춘. 즐겨야 했다.
그러나 이 세상을 게임쯤으로 여기는 정우와 달리, 이 세상에서 나고 자란 다른 사람들은 고3이라는 자리에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은혜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정우야! 미안! 나 오늘도 학원에 가야 해서…….”
“학원 다녔었나?”
“아빠가 끊어줬어.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하다나…….”
은혜는 방학 중에도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 나도 같이 있고는 싶은데…… 이래저래 약속이 많아서.”
“바쁘면 어쩔 수 없지.”
“미안해, 같이 있어 줘야 하는데.”
새 생명 얻은 우림이는 뒤늦게 부모님의 인맥을 소개받느라.
“연말이라 바빠.”
“어.”
마리는 일하느라 바빠서.
“나 며칠 뒤에 NY 라이브 공연한다! 놀러 와!”
“NY……? 뉴욕? 누나 뉴욕에서 공연해?”
“아니! New Year! 새해 특별 공연!”
그러던 와중, 일행 중 가장 바쁠 한 사람이 정우를 초대했다.
TV에도 나오는 대규모 공연으로.
* * *
새해 특별 공연.
이는 큰 인기를 끈 아이돌이나, 수십 년 경력 가진 장년 가수나 할 법한 대형 이벤트였다.
그녀쯤 되는 천재라도 고등학생의 나이로 오는 건 불가능했고, 엔딩에나 짤막하게 ‘그런 일도 있었다’쯤으로 묘사될 정도로 커다란 행사.
그런 공연에 예슬이 출연한다는 사실에 정우는 상당히 크게 놀랐다.
‘대체 이게 무슨…….’
상상을 뛰어넘어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녀 단일 루트 엔딩에서나 볼법한 공연을 벌써 맡게 되다니.
정우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다잡으며 그녀가 쉬고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벌써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는지 복도에도 공연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스태프들을 무시하며 대기실로 향하자, 안쪽에선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Α─♪
가사 하나 없이 멜로디만을 흥얼거리는 콧노래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실력이 얼마나 일취월장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젠 못 이기겠네.’
자신이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른 신변잡기에 힘을 쓰는 동안. 노래 하나에 열중한 예슬은 어느새 자신을 뛰어넘었다.
청출어람이라고, 자신보다 밑이던 그녀가 어느새 자기 위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자각하니 기분으 씁쓸했다.
정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문을 두들겼다. 그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예슬은 곧장 소리쳤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서 여러 악기를 두들기던 예슬이 활짝 미소 지으며 그를 반겼다.
“오랜만이네!”
“누나, 오랜만.”
“깜짝 놀랐지? 일부러 숨겼지롱.”
“수능 조진게 이것 때문이었어?”
“어? 아니, 그건 그냥 내가 공부를 안 해서…….”
“누나 나중에 논란 생긴다니까. 음표도 못 읽는 음악천재 성예슬. 이런 기사 나와.”
“에이, 뭐 어때.”
예슬은 피식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정우를 끌고 악기 앞에 앉혀 연주를 종용했다.
어려울 것도 없다. 정우는 천천히 베이스를 튕기기 시작했다. 예슬도 그 옆에서 기타 줄을 튕겼다.
두 사람의 하모니가 순식간에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흥이 돋은 예슬은 아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I'm the bad girl.”
영어 등급은 9등급이면서, 노래 발음은 원어민 뺨치게 혀를 굴러가며 노래를 부르는 예슬을 보며 정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같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두 사람의 듀엣.
이 노래가 마지막이 될 거라는 듯 애달프게.
“오, 개쩔어. 나중에 앨범 만들면 너랑 듀엣으로 만들어야겠다.”
“나 몸값 비싼데.”
“괜찮아. 나 돈 많아.”
“돈이 아니라 몸으로 받을 건데.”
“히히, 변태 같은 놈.”
예슬은 정우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밖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수많은 스태프들과 연주자들이 뛰어다니며 소음을 만들었다.
큰 소음이 나더라도 새어나갈 걱정은 없었다. 리허설 시간까지는 많이 남았으니, 누군가 들어올 걱정도 없었다.
“들키면 안 되는데.”
“고삐리가 발랑 까져서 섹스 스캔들 터트리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긴 하지.”
“네가 먼저 하자고 했다? 들키면 네가 나 책임져야 해.”
“결혼이라도 해달라고?”
“그럼 더 좋지.”
“……글쎄.”
“그럴 땐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는 거야.”
예슬은 정우에게 접근해 입을 맞췄다. 방금전까지 먹고 있던 달달한 스포츠음료 맛이 났다.
곧이어 나눈 정사는 그보다 더 달콤했다.
* * *
그 날 예슬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공연을 폭파시켰다.
“Eat your SPAM!”
사전허가 없이 바꿔 부른 가사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그녀는 방통위로부터 한 달간의 방송 출연 금지를 받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