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NO.10 이 소설 주간 연재인가요?
* * *
입학식은 보통 개학 바로 전주에 진행된다. 입학식을 마친 학생들이 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 그리하여 정우는 연재를 만나 오해를 풀 시간도 없이 곧장 개학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은 학교의 평판과 실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이기에, 초임 교사인 주희가 담임을 맡지는 못했다.
담임은 30년째 이 학교에 부임하던 중년의 아저씨였다. 듬성듬성 깎인 턱수염이 담임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고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물론 너희 인생이니 내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겠다만, 성실하게 공부하는 애들 방해는 하지 마라.”
아이들이 주억주억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도 이젠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고3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정우는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진저리를 쳤다. 2번째 수험생 생활이라는 점도 있었고, 이런저런 치트가 달린 육체를 믿고 있기도 했다.
‘수능 100일 전에 공부 시작해도 만점 받을 두뇌인데 뭐…….’
치트나 다름없는 스킬의 힘은 학습의 여부와 상관없이 여러 지식과 기술을 가능케 만들었다.
그리 사기적인 능력을 갖고도 수능 따위에 헉헉대는 건 미련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무엇보다 정우에게는 이 능력을 갖고도 이루어내기 상당히 어려워 보이는 격무가 존재했으니까.
‘이제 1년 남았나.’
게임 속에 존재하던 열두 히로인을 모조리 공략하고, 현실에선 미처 해내지 못했던 하렘 엔딩을 달성하는 일.
온갖 보정과 수십 번 넘는 도전에도 기어이 달성하지 못했던 하렘엔딩을 단 한 번에, 그것도 현실에서 해내기란 무척 지난한 일이었으나…….
‘거의 다 왔어.’
게임 속에선 불가능한, 현실이기에 가능했던 여러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정우는 그 어려워 보였던 업적을 달성하기까지 한 발자국만 남기고 있었다.
이제 단 세 명.
고작 2년 동안 아홉 명에 달하는 여성을 꼬셨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어렵지 않은 일이 시작하기도 전에 꼬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 *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주연재는 한숨을 퍽퍽 내쉬며 자신의 반 뒷문을 열었다.
입학식 날 참가하지도 않고 집에 홀로 돌아가는 바람에, 같은 반에 누가 있는지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라, 입학실 날 보지 못한 그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그런 시선을 모조리 무시한 뒤, 그녀는 자기 이름이 적힌 자리로 가 착석했다.
그녀가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짝궁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본다.
“안녕! 너 입학식 때 못 본 거 같은데, 왜 안 왔어?”
“……아파서.”
“아파? 몸이 안 좋구나! 괜찮아? 비타민 먹을래?”
연재는 살짝 인상을 쓰며 그녀를 바라봤다. 명찰을 보고 그녀의 이름이 도아리라는 걸 알아낸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러나 아리는 마치 주인 만난 개마냥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아, 왜∼ 비타민 맛있는데.”
“너 많이 먹어.”
“난 이미 먹었어! 두 개나!”
“그래, 세 개 먹어.”
“비타민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오줌 누래지거든.”
아리는 그리 말하며 비타민을 내밀었다. 자꾸자꾸 밀어내도 다가오는 이 손길이 귀찮아진 그녀는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고마워.”
“응!”
비타민을 받아들자 이번엔 언제 먹을 거냐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연재는 곧장 포장을 뜯어 비타민을 입에 집어넣었다.
셨다. 그것도 아주.
“아하하! 시지!? 그치!?”
“……어.”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는 게 뭐 그리 즐거운지, 아리는 미친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이끌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연재는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걸 그리 바라지 않았기에 칠판을 바라보며 짝궁을 무시했다.
한참 웃음을 터트리던 아리는 웃음을 그치곤 연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리야. 도아리.”
“주연재.”
“연재구나! 이름 예쁘네!”
“……너도.”
“고마워! 그럼 이제 우린 친구지?”
아리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연재도 학창시절을 혼자 보낼 자신은 없는지라, 밥이라도 같이 먹을 친구를 구해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이 이제 막 친해지려 했을 때, 교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와…… 진짜야?”
“진짜야…… 나 입학식 때 봤는데…….”
“여긴 왜 왔지?”
소란스러운 교실, 연재가 고개를 들어 앞문을 바라보자 정우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우 오빠?’
어떻게 그녀의 반을 알고 찾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째서 자신을 찾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정우를 피해 다녔으니까.
스스로 분수에 맞지 않은 인연을 잘라냈으니까.
정우가 발을 옮겨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 주변 아이들이 소근대기 시작한다.
“연재야, 안녕? 오랜만이네.”
“……네, 오빠.”
“진짜 우리 학교로 왔네. 다음에 문자 할 테니까 꼭 받고.”
연재는 그가 자신을 위해 연기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과한 친분보다,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라는 게 더 좋았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도와줄 일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그리 말을 남기며 정우는 교실에서 빠져나갔다. 멍하니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리는 곧장 그녀의 손을 툭 쳐내며 말했다.
“우린 이제 적이다.”
* * *
복도에서 그를 알아보는 아이들에게 미소 지어주며, 정우는 아까 전 만났던 연재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녀 옆에 앉아 있던 소녀에 대해.
‘쟤가 왜 여기 있냐…….’
도아리. 별명 또라이. 셋 남은 히로인 중 하나. 예측불능 사차원 소녀. 얼굴만 예쁘면 뭐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소녀이기도 했다.
게임 속 그녀의 기행은 모두 그녀의 외모에 눌려 별 거 아닌 장난으로 치부되곤 했다.
만일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 가장 귀찮으면서, 동시에 가장 쉬운 상대가 될지 모르지.
정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교실로 돌아왔다. 꼴에 고삼이라고 모두들 교과서나 참고서를 펼쳐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애쓴다 애써.’
쯧쯧, 혀를 차며 정우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반에서 공부 좀 할 거 같은 아이들이 몇몇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기, 정우야…?”
“응?”
“너, 전교 1등이지? 이것 좀 알려줄 수 있어?”
“싫은데.”
“그러지 말고…….”
“아니, 나는 천재라서 가르치는 거 못 해.”
정우는 그리 말하며 책상을 뒤져 손에 잡히는 교과서를 대충 꺼내 들었다. 그리곤 상대방에게 건넸다.
“아무데나 펼쳐봐.”
“펼쳤어.”
“몇 페이지?”
“52페이지.”
“─가야 할 때는 언제인가, 때를 알고 가는 자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거짓말이지?”
책에 적혀 있을 내용을 고대로 읊어주자, 상대방은 농담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녀에게 다른 페이지도 시험해보겠느냐 말했다.
몇 장 넘기며 테스트해본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우의 성적이 그 놀랄만한 재능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은 것이다. 본인은 무얼 어찌하든 그를 따라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몇몇 아이들이 그의 재능에 흥미를 보이긴 했으나, 정우는 쌀쌀맞게 행동하며 그들을 모두 쳐내었다.
이제 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히로인도 아닌 일반인과는 더더욱.
열 명에 가까운 여자와 사귀며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와 지낼 시간은 물론이요 여가시간마저 부족한 게 현실이니까.
‘아…… 예슬 누나랑 자희 누나도 입학했겠네…….’
고등학생의 싱그러움도 좋지만, 때론 대학생의 자유로움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아쉽게도 이 세상이 대학생까지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자자, 야들아. 책 펴라. 첫날이라고 놀 거라고 생각한 놈은 없제? 니들 고삼이여 고삼─”
교실로 들어온 선생의 잔소리를 들으며, 정우는 잡념을 떨쳐냈다.
지금은 연재의 오해를 풀고 그녀와 다시 가까워질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은혜가 말하기를─
─벼, 별말 안 했는데? 그냥 여러 가지 안부 인사나… 정우 너랑 무슨 사이냐 묻길래 그것도 좀….
남들에게 대놓고 정우와의 관계를 설파하지 않는 은혜가 연재에게 대뜸 그런 말을 한 건 정우의 잘못도 있었다.
그가 먼저 연재에게 아는 척을 했고, 은혜는 연재가 정우와 친한 사이거나 자신들과 같은 관계가 되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로 인해 만들어진 오해가 연재를 괴롭히고, 안 그래도 상상력 좋은 연재는 그 오해를 더더욱 크게 부풀렸을 뿐이다.
부풀어 오른 오해는 강력한 한 방으로 터트려야 했다. 풍선을 찌르는 바늘처럼.
[놀러가도 돼?]
정우는 그리 메시지를 보냈다. 곧장 연재가 메시지를 확인했음을 확인한 정우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연재에게서 한 마디 답장이 도착했다.
[네]
이미 하교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시간. 그녀도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했으리라. 정우를 집에 맞이할 준비를.
몇 분 걸어 연재의 집에 도착한 정우는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삐걱거리는 전자음과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문을 열고 연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했는지 살짝 젖은 머리칼이 돋보였다.
“들어가도 돼?”
“……들어오세요.”
정우는 미소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난방을 틀었는지 살짝 열이 나는 온도였다.
마의를 벗어던지자 연재가 살짝 흠칫하며 놀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우가 원래 이렇다는 걸 떠올리곤 다시 얌전해졌다.
“왜, 오신 거에요?”
“우리 사에에 뭘, 오고 가는 데 이유가 필요해?”
그 말을 들은 연재는 입술을 곱씹기 시작했다. 그리곤 희번득 눈을 뜨며 정우를 노려보았다.
“우리 사이라…… 무슨 사인데요?”
“응?”
“무슨 사인가요? 그냥 같이 일하는 사이? 아는 오빠 동생 사이?”
정우는 대답을 보류했다. 연재가 더욱 폭발하길 기다렸다. 연재는 붉으락푸르락하며 정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숨도 쉬지 않고 정우의 대답을 기다리던 연재가 숨을 확 들이켰을 때.
“무슨 사이면 좋겠는데?”
“흡, 뭐, 뭐라고요?”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면 좋겠는지, 말해 봐.”
“그야…….”
말할 수 없었다. 정우에겐 애인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주 조금이라면 욕심을 부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한, 아주 친한 오빠 동생 사이요…….”
한 발자국 모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