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NO.10 이 소설 주간 연재인가요?
* * *
“와, 오빠. 진짜…… 진짜 하정우네요…….”
“그럼 뭐 내가 가짜냐?”
연주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정우는 헛된 소리를 하는 아리와 아연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리 가볍게 말하고 있기는 했으나, 정우가 가진 연주 능력을 표현하자면 능력치 100.
전세계에서 한두 명의 거장만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이며, 몇몇 분야에선 한 시대에 그 누구도 등정하지 못할 수 있는 경지다.
심지어 정우는 피아노뿐만 아니라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등등. 현 인류가 발명한 모든 예술 분야의 경지에 올랐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은 평생 듣지 못했을 연주의 극한을 들은 것이다.
‘돈 주고도 못 들을 연주를 들었으니…… 오늘 밤 모텔 터져 나가겠네.’
애인이라면 이런 환상적인 경험을 한 날에 섹스를 하지 않을 리 없고.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로 오늘을 영영 잊지 않고 간직하리라.
그정도로 황홀한 연주였으니.
“저기, 정우 선배.”
아연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정우에게 말을 걸었다. 정우는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과분하다고 여긴 건지, 고개를 처박고선 입을 열었다.
“저도 선배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빛나는 사람?”
“네. 누구나 뒤돌아볼 정도로 유명한 스타가.”
그 말에 아리도 똑같이 눈동자를 빛냈다. 두 사람은 타고난 관종이었다. 관심을 먹고 사는 생물.
토끼로 태어났다면 진즉에 외로워 죽어버렸을 성격의 두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난 덕에 지금껏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엔딩에 가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먹는데 성공하기까지 하니…….
“물론이지.”
정우는 그 사실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세계선에서 두 사람이 유명해지는 일은 없겠지만.
‘아니, 나랑 연관됐으니 그것도 아닌가…….’
눈에 띄게 기뻐하는 두 사람을 보며 정우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 * *
“조심히 들어가.”
“넵! 선배님도 조심히 들어 가십쇼!”
“안녕히 가세요.”
별이 하늘을 가득 메운 저녁, 아리와 아연을 떠나보내고 연재와 단둘이 밤길을 걷는다.
자연의 적막함이 지구에 내려앉았으나, 이제 막 시작이라는 듯 화려하게 날뛰는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도시는 조용할 날 없다.
“기분 나빴어?”
“……아뇨.”
“기분 나빠 보이는데.”
그 말에 연재가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라간 괴이한 미소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정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뱉었다. 연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우가 웃는 이유를 찾았다.
“이상해요?”
“아니, 괜찮아. 응.”
“……이상하구만.”
자신의 웃는 얼굴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연재는 천천히 손을 떼며 웃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찹쌀떡 같은 그녀의 양 볼이 볼록 튀어나왔다. 꼬집는 걸 넘어 한입 베어 물고 싶어지는 볼따구가.
“귀여워.”
“갑자기 뭐에요.”
“우리 연재, 왜 이렇게 하는 짓이 귀엽지?”
정우는 그녀의 툭 튀어나온 볼을 쭉 잡아당겼다. 잡기 좋게 부풀어 올라 있었기에 당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살짝 고통을 느낀 연재가 인상을 찌푸리긴 했으나, 정우가 좋아하니 그러려니 했다.
“……그마해여.”
“알았어 알았어.”
10초 정도 볼을 상납한 연재는 뭉개진 발음으로 말을 내뱉었고, 정우는 3초 정도 더 갖고 놀다가 손을 놓았다.
“오늘 데이트, 즐거웠지?”
“……네. 뭐, 싫진 않았어요.”
“다음엔 더 재밌을 거야.”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다. 단둘이 알콩달콩색콤한 상황을 만들어놓았는데, 거기서 아리와 아연이 나타날 줄이야.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여기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모텔로 가 거사를 치루고 있을지도 몰랐다.
‘뭐…… 맛있는 건 아껴 먹을수록 더 맛있는 법이지.’
다만 꼭 그게 오늘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아직 1년이나 남아 있었고, 그 시간 안에 연재를 함락시킬 방법은 수두룩했다.
“잘 가, 다음에 또 보자.”
“네.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원래는 제가 해야 하는데.”
“뭐 어때. 우리 집도 여기서 금방인데.”
정우는 그 말을 남기고 연재와 헤어졌다. 연재는 저 멀리 떠나가는 정우의 뒷모습을 안절부절하며 지켜봤다.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걱정되긴 매한가지였다.
‘오늘…… 선을 넘을 수 있었는데.’
연재는 떠나가는 정우를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상기했다. 그것만으로 하복부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 못 이룰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오자, 휴대폰에서 불이 나고 있었다.
진짜로 불타고 있는 건 아니었고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전화기에 확인을 해보니 수십 통의 문자와, 그보다 못한 수준의 전화가 와 있었다.
주로 전화를 건 사람은 마리였다.
[김마리 : 야]
[김마리 : ㅑ]
[김마리 : ㅑ]
[김마리 : ㅑ]
…….
정우는 가볍게 답장을 보내고 머리를 말렸다. 돌아와 보니 마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뭐하는 데 전화를 안 받아?]
“씻고 있었는데.”
[그래? 좀 빠딱빠딱 씻어라 임마]
“무슨 일인데?”
자리에 앉아 TV를 켜며 마리의 말에 집중했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거는 건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별 건 아니고, 너 요즘 뭐하고 다니냐?]
“나? 나야 뭐…… 똑같지. 평소랑.”
[또 여자 꼬시고 다니지? 네 애인은 직장에서 쌩고생하는데?]
“애인이 외롭게 하니까 그렇지 뭐.”
[내 잘못이네. 그치?]
“……미안.”
[미안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마리는 이런 부탁을 건네기 껄끄러웠는지,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너, 피아노 잘 치지?]
“잘 치긴 하지.”
[우리 보스가 영상을 보더니 너한테 부탁 좀 해달라고 해서]
“……무슨 영상?”
[너 식당에서 피아노 치는 영상]
벌써 유통된 건가. 정우는 새삼 21세기 인터넷의 대단함을 느끼며 마리의 말을 이어 들었다.
[우리 식당에서 연주 한 번만 해주라]
* * *
마리의 부탁은 이러했다.
다음 주에 식당에 높으신 분들이 들리게 되었는데, 아예 식당을 대관했다고 한다.
덕분에 사장인 유나도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됐는데, 손님이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보안과 여러 문제 때문에 아무나 초대할 수는 없는 데다, 그리 많은 사람을 부를 수도 없다.
그 와중에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을 보았다고 한다.
정우가 아쿠아리움에서 피아노를 치는 영상을.
“얼마 준다는데?”
[……할 거야?]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유나의 부탁이었다. 마리의 상사. 레스토랑의 사장.
그녀가 미쳤다고 건물을 마리에게 넘겨주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은퇴하고 사장 자리는 넘겨줄지도 모른다.
그런 걸 생각하면 유나에게 빚을 지워두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권장해야 할 선택이었지.
[……그럼 사장한테는 하겠다고 말해둘 테니까, 나중에 빼면 죽는다]
“에이,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 할 사람인가? 아, 맞다. 그럼 나도 부탁 하나 있는데.”
[뭔데?]
“요리사복 입고 해주라.”
[끊어]
삐이이──
정우는 귓가를 울리는 종료음을 들으며 침대에 누웠다. 부탁한 건 다음 주 주말이었으니까, 당장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 * *
“세상에, 이 새끼들은 타임머신이라도 개발한 건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최근엔 10년 뒤 미래 감성으로 봐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게임들이 쏟아져서, 그 게임들을 하다 보니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적당히 옷을 챙겨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마리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식당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대기하던 직원이 정우를 막아섰다.
“아, 오늘은 하루종일 예약이 되어 있어서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초대받아서 온 연주자인데요. 하정우라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확인됐습니다.”
직원은 명단을 이리저리 체크하더니 정우에게 명찰 하나를 건넸다.
목에 명찰을 맨 정우는 식당 안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들렸던 곳이라 길을 헷갈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늘 실수하면 설거지부터 다시다!”
“뛰지말고 빨리빨리 움직여!”
“이 새끼들아!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몇 안 되는 손님만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주방은 여전히 분주했다. 주방을 지나쳐 가장 안쪽, 사장실로 향한 정우는 그대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쪽에서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우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쪽에선 인상 가득 쓴 유나가 또 무슨 일인가 해서 고개를 들었다가, 정우 얼굴을 보고 인상을 폈다.
“이게 누구야! 우리 만능 엔터테이너 아니야!”
“오랜만이에요.”
“앉아, 앉아. 오느라 힘들었지?”
“도심지 한복판에 건물 세워놓고 할 말이에요?”
“아, 너무 티났나?”
유나는 싱글벙글 미소지으며 정우에게 물었다.
“뭐 마실래? 커피? 코코아?”
“아무거나 주세요.”
“그래. 그럼 커피로 한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옆에 준비된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두 개 꺼내더니 정우에게 건넸다.
하다못해 믹스 커피도 아니고 캔커피라니, 고급 원두로 직접 타주는 수제 커피를 바랐던 정우는 약간 실망한 눈치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살짝쿵 미소를 터트리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한시가 바빠서 말이야…… 커피 탈 시간도 없다니까?”
“아니, 코앞이 주방이고. 널린게 뜨거운 물 아니에요? 탈 시간도 없어요?”
“응. 없더라고.”
안부를 전하던 그녀는 기어코 정우를 부른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문화부 장관님께서 우리 식당에 오시거든. 해외 귀빈을 데리고.”
“오, 누군데요?”
“글쎄, 무슨 명장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쪽엔 관심이 없어서…… 아무튼 유명한 사람이라는데. 그 사람이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비서실에서 연락이 와서.”
장관은 은연중에 진짜 연주자를 불러 클래식을 공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나 초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실력자 중에 이런 일에 응해줄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 정우가 찍힌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걸 본 건 아주 우연이었다. 클래식 연주가 가능한 실력자를 찾는 도중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연이 없을 영상이었으니까…….
그 영상을 본 그녀는 순식간에 영상의 주인공이 정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에 빠졌다.
요리를 잘하는 걸로도 모자라 음악까지 잘하다니? 신이 공평함을 모른다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동시에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 기회였다. 적당히 쓸만한 연주가를 구할 기회.
“그래서 말인데, 요즘 아이돌은 얼마나 받냐? 내가 단가를 잘 몰라서…….”
“안 주셔도 돼요.”
“아니, 그럴 수는 없지. 그래도 네 시간을 뺏는 건데.”
“저 말고 마리나 좀 챙겨주세요. 돈 말고 휴가 같은 거.”
“으음…… 그래도.”
유나가 곤란해했으나 정우는 돈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애당초 무엇보다 큰 보상을 받기로 하지 않았던가?
‘요리복…… 여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