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NO.11&12 또라이 자매가 속삭이길, 정력에는 아연이 좋데요
* * *
“연재야!”
정우는 부실을 뛰쳐나가는 연재를 잡으려다, 은혜와 우림의 존재를 깨닫고는 멈칫했다.
“가 봐.”
“읍읍! 으읍읍!”
다행히 두 사람은 그가 연재를 붙잡으러 떠나는 걸 용서해주었다. 이러니 쓰레기 같은 남자라 자책할 수밖에…….
부실에 두 애인을 남기고서, 정우는 연재를 찾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는 오빠가 정말로 싫어요.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디서 어긋난 거지? 어디서부터 틀린 거지?
“……연재야.”
힘없이 걸음을 걷는다. 다행히 연재를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재는 부실동에서 나갈 수 있는 학교 테라스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짜, 진짜 좋아했는데…….”
그녀를 위로하려 다가가던 정우는 멈칫하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다가가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아니.’
지금 다가가서 상처를 치료해봐야, 그건 억지로 이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이를 이겨내려면 그녀 스스로 회복해야 했다.
적어도 정우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됐다. 그녀는 정우 얼굴을 볼 때마다 배신감을 느낄 테니까.
“대학생이니까…… 시간은 많겠지.”
정우는 학교를 떠난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상대방은 정우 생각 마냥 시간이 넘쳐 흐르는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아, 누나. 오랜만.”
[그래. 무슨 일?]
“부탁할 일이 있는데.”
[말만 해.]
“어려운 건 아니고…….”
잠시 후, 통화를 끝낸 정우는 울고 있는 연재를 두고서 부실로 돌아왔다.
* * *
방과 후.
연재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정우를 생각하며 자신이 실수했다고 여겼다. 자신처럼 못난 사람이 그처럼 잘난 사람과 만나려면 여러 가지를 양보해야 하는 법이거늘, 제 주제도 몰랐다고 자책하며.
우울증 걸린 환자마냥 비틀거리며 교문에 도착했을 때, 연재는 교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날렵한 바이크와, 그 앞에 서 있는 슈트 입은 여성을.
그녀는 하교하는 학생 하나하나를 감별하듯 째려보다가, 연재를 보고선 터벅터벅 걸어왔다.
일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연재는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주연재?”
“네, 네?”
설마 자기한테 말을 걸 줄 몰랐던지라, 연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상대방은 연재의 명찰을 확인하고 맞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녀를 끌고 바이크로 향했다.
“하, 하지 마세요! 살려주세요! 저 돈 없어…….”
“시끄러워. 일단 타.”
그녀는 그리 말하며 연재를 바이크에 앉히고 헬멧을 넘겨 주었다. 도망치려던 연재는 어차피 바이크 앞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걸 깨닫곤 얌전히 헬멧을 뒤집어썼다.
정체불명의 여성의 허리춤을 조심스레 껴안자, 부아앙, 곧장 바이크가 발진했다.
순식간에 학교를 빠져나간 바이크는 어느 한적한 동네로 향했다. 딱 보기에도 부잣집 오피스텔이었다.
‘여, 여기서 뭘 하려고….’
연재는 여기서 자신의 장기가 털리지는 않을까, 대뜸 공포가 질리기 시작했다.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도 없었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걱정 마.”
“네, 녯!?”
“겁먹지 말라고. 이상한 짓 안 해.”
“이상한 짓 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 소리 하던데요…….”
찌릿,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얼굴에, 연재는 쥐 죽은 듯 조용히 그녀를 따라 오피스텔로 올라갔다.
과연, 부잣집 동네답게 혼자 사는 오피스텔이 그녀 집보다 넓었다. 그녀는 혹여나 험한 짓을 당하지 않을까 미어캣마냥 주변을 계속해서 둘러보았다.
‘법전……?’
범죄자가 갖고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법전이 방안에 가득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로 소독을 하려고 하나? 연재는 덜덜 떨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칼이라도 들면 곧장 도망가야지, 아니 이미 늦었나?
“마시고 싶은 건?”
“네, 네? 저…… 프, 프라푸치노요.”
“뭐?”
“아, 아아! 죄송해요!”
자신의 마지막 음료라고 생각해서, 되도록 큰 걸 바랐는데. 그걸 들은 여성은 한숨을 퍽퍽 내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예예, 거기. 프라푸치노 하나랑 아메리카노 하나요.”
“저, 저기… 어디에 전화를….”
“프라푸치노 먹고 싶다며?”
탁, 그녀는 물을 끓이던 커피포트의 전원을 내리고 얌전히 앉아 주문한 음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연재 입장에선 지옥과도 같은 침묵이 시작되었다. 영원과도 같던, 그러나 실제론 그리 길지 않은 10분이 흐르고 그녀가 주문했던 음료가 배달되었다.
배달 온 음료를 눈앞에 내려놓은 그녀는 연재에게 프라푸치노를 권했다.
“자.”
“가, 감사합니다….”
연재는 이걸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눈앞의 여성이 아무렇지 않게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걸 보고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쪼로록, 프라푸치노는 달았다. 달디단 프라푸치노. 초콜릿 칩이 아그작 씹히며 당분을 보충해주었다.
제정신 아니었던 그녀의 뇌는 조금씩 돌아가며 이 상황이 이상하고 위험하다는 경종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녀는 몸싸움에 자신이 없었다. 초등학생이랑 싸워도 질 자신이 있을 정도로.
“고민부터 말해 봐.”
“……예?”
“네 고민, 말해보라고.”
“저기, 그전에… 여긴 뭐 하는 데인가요……?”
“……? 보면 몰라? 내 집인데.”
“그, 그게 아니라…… 장기 매매 그런 거…….”
“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연재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없어진 연재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프라푸치노를 들이켰다.
잠시 후, 제 소개도 아직이었다는 걸 깨달은 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자희야. 네 선배고.”
“……선배요?”
“응. 나도 너랑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밴드부 출신이거든.”
“그, 그럼 졸업한 선배가 왜……?”
“누가 부탁을 해서.”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연재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 누구라는 게. 정우 오… 선배인가요?”
“맞아. 하정우.”
“그리고 선배도, 그 정우 선배랑 친한 사이…?”
“친한 걸 넘어섰지.”
새로운 애인이다.
연재는 순식간에 그 사실을 파악했다. 아니,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발을 벌려놓았길래 여기저기서 제 애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머릿속에 정우가 브이,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랑스럽지만 재수 없었다. 지금은 재수 없는 경향이 더 컸다.
순식간에 정우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연재는 자희를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과연,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집에 법전이 있는 걸 보면 법대생이나 고시생일 수도 있겠다.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다. 삼위일체 완벽한 연재의 상상상위호환.
“……정우 선배가 저한테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 말도.”
“…그럼 그, 선배는.”
“언니라고 불러. 편하게.”
“어, 언니는 왜 저한테?”
“네가 힘들어 보인다고. 도와달라기에.”
힘들어 보인 다라,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이 본인이면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자희를 자신에게 보낸 이유가 있으리라. 연재는 그게 궁금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를 보낸 건 아닐 테니.
“……정우 선배가, 제가 운명이라고 그랬어요.”
“그래?”
그래서 제 마음을 실토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히려 일면식 없는 사람이니만큼, 속마음을 풀어놓기가 더 편했다.
자희는 후릅,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며 연재의 말에 경청했다. 연재는 자신이 이렇게 달변가였나 싶을 정도로 논리정연하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운명이라는 게 한 사람만 있으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저한테도, 다른 사람한테도, 심지어는 제 친구한테도. 운명, 운명, 운명. 그렇게 남발해도 되는 건가요?”
“그랬구나.”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랑이라는 걸 어떻게 그렇게 마구잡이로 뿌리고 다닐 수가 있어요!?”
“사랑이 뭔데?”
“…네?”
얌전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자희가 처음으로 되물었다. 연재는 잠시 멈칫한 뒤에 사랑이란 무언가 설명했다.
“유일한 것, 아무 하고나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럼,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가?”
“당연하죠─!”
“어째서?”
“어째서냐니……!”
당연히, 상식적으로. 그것 외에는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애초에 따지고 보면 그녀 또한 정우가 그런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임을 알고, 아니 그런 사람이기에 사랑한 게 아니던가?
이제 와서 상식이니 뭐니 하기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있지, 2학년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살았어.”
“……네?”
그런 연재를 내버려 두고서, 자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마침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던 연재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고 살았지.”
“네…….”
“그때까진 그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공부만 하며 살고, 시키는 대로 법대에 들어가 법조인이 되자고…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지.”
“……그게 어떻게 운명이에요?”
“똑같지 않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우리를 조종하나, 부모님이 나를 조종하나.”
이토록 운명이란 누군가에겐 아주 사소할 수도, 누군가에겐 아주 중대한 사안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운명을 깨부숴준 게 정우야.”
“어떻게…….”
“그런 건 내 인생이 아니라고, 내 스스로 움직일 의지를 부여했지. 지나가던 마법사께서 인형에게 자아를 부여한 거야.”
평생 제 주인이 보여주던 것만 보던 인형이, 스스로 세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자희는 지금도 그때 기분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곤 말했지. 이게 내 운명이라고. 네가 알고 있던 건 가짜라고.”
“……멋진 이야기네요.”
“이걸 듣고도, 뭔가 와닿는 게 없니?”
“딱히….”
“운명이 꼭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거지. 넌 네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 정우는 좀 더 행복한 길을 보여줄 뿐이지.”
“……조금 더 행복한 길.”
그 말을 들은 연재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좀 더 행복한 길이라, 과연 그런 게 존재할까 싶었다.
* * *
“……잘 마셨어요.”
“뭘, 집까지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저런 오토바이를 타고 그녀가 사는 집 근처로 갔다간, 온갖 양아치들의 먹잇감이 되리라. 그걸 잘 알고 있는 연재는 집까지 걸어가겠다 말했다.
다행히 이곳은 집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라탄 연재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창가에 기대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그녀가 있든 없든 굴러가고 있었다. 정우도 그녀가 있든 없든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왜냐? 그녀보다 나은 여자를 열댓 넘게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행복……이 뭐지?’
그걸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고 기분이 나빠진다. 이건 불행인가? 그럼 정우를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그럼 기분 나빠질 일이 없으니까.
다만, 그녀는 이미 정우를 떼놓고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무얼 하든지 정우가 떠올랐다.
이렇게 얌전히 창가 밖을 보고 있을 때에도, 정우와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땐 참 행복했는데…… 그리 생각하니 또 가슴이 서글퍼지기 시작한다. 그렇담 이게 불행인가?
정우를 생각하는 게 어떻게 불행이란 말인가?
정우는,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뿐인데.
정우를 불행하게 느끼는 건, 오직 그녀의 의지일 뿐이거늘.
집에 도착한 연재는 이미 집에 계시던 부모님을 발견했다. 두 분은 늘 그렇듯 싸우고 계셨는데, 평소 고개를 처박고 얌전히 방에 들어가던 연재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불행해요?”
“응?”
“뭐?”
“두 분, 불행하냐고요.”
평소라면 들어가 있으라고 말할 두 사람도, 연재의 표정을 보고선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잠시 싸움을 멈추었다.
“아, 아니. 우리가 왜 불행하겠니? 행복하단다.”
“그럼 왜 싸워요?”
“싸움은 원래 다 하는 거야….”
“사랑하지 않아요?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지 않냐고요.”
“연재야, 사랑하니까 싸우는 거란다.”
사랑하니까 싸운다.
싸우니까 불행해진다.
그럼 사랑은 불행인가?
‘정우 선배가…… 오빠가, 불행일 리가 없잖아.’
연재는 그를 깨닫곤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