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NO.11&12 또라이 자매가 속삭이길, 정력에는 아연이 좋데요
* * *
늦은 밤, 전화가 걸려왔다.
정우는 전화기를 들어 상대방을 확인하곤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우 오빠.]
“연재야.”
연재의 목소리를 듣자, 오늘 점심, 대뜸 그에게 밉다고 말한 뒤 동아리실을 빠져나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우는 그때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받았다.
모든 히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본인도 구원받는다. 이게 이 세상의 골조였고, 정우의 목표였으니까.
[저, 지금 오빠네 근처에요. 나올 수 있어요?]
“금방 갈게. 어딘데?”
[놀이터요.]
그 말을 들은 정우는 곧장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정우네 집 근처는 상당히 비싼 아파트단지라서, 양아치들이 살지 않는 청정구역이었지만. 그것도 저녁까지다.
늦은 밤, 새벽이 되면 아파트 단지에 있는 고급스런 놀이터 벤치를 노리고 양아치들이 종종 몰려들곤 한다.
경비원이 순찰을 돌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24시간 철통 경비를 유지하는 건 아니었다. 재수없게 연재가 걸려 삥을 뜯기거나, 몇 대 맞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우울감에 찌든 연재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정말 큰일이 생길 지도 몰랐다. 싸울줄도 모르는 주제에 양아치들에게 시비를 건다든가 하는…….
다행히 정우가 내려갔을 때, 연재는 홀로 그네에 올라타 규칙적인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연재야.”
“…오빠.”
새벽 공기를 버티기엔 썩 추워 보이는 복장이었으나, 연재는 아무렇지 않게 정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들썩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그걸 쉽게 꺼내자니 염치가 없어 보일까 망설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먼저 말문을 텄다.
“미안해.”
“……네?”
“내가 잘못했어.”
“오, 오빠가 뭘 잘못해요? 잘못한 거 없어요! 다 내 잘못인걸…… 내가, 내가 그런 애랑 친구가 돼서…….”
“아니야. 연재야.”
정우는 다시금 가슴을 철렁이게 만드는 연재의 말을 들으며, 옆에 있는 그네에 따라 앉았다.
고급 아파트 단지에 있는 그네답게, 안장또한 훌륭했다. 하루 종일도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여기서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만.
“내가…… 욕심을 부렸어.”
“……욕심이요?”
“그래. 나라면 그런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 웃기지?”
“웃기다뇨, 오빠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 말할 순 없었다. 그 말을 꺼낸다면 그녀는 그의 가치를 알면서도 뛰쳐나간 멍청이가 되어 버리니까.
자신이 멍청이가 된다면, 그런 멍청이를 사랑해준 정우마저 바보가 되어버릴까봐.
차마,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오빠는…… 괜찮아요. 그래도 돼요.”
그러나 결국 할 말은 해야만 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모든 말들은 결국 스스로를 병들게 만들 뿐이다.
곪고, 쓰라리고, 그러다 결국 썩어 문드러지면. 그 상처는 두 번 다시 나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흉터로만 남는다.
“나한테 그럴 가치가 있다라…… 여자 하나 행복하게 못 만든 내가?”
“전 행복해요.”
“울면서 뛰쳐 나갔잖아.”
“그건…… 제가 멍청해서 그래요. 제가 멍청해서, 그런 주제에 욕심만 많아서. 그래서….”
연재는 제 살을 스스로 파헤쳤다. 도진이 뒤늦게 파헤치려 했을 때, 더 이상 파헤칠 게 없을 만치 지독하게 긁어 모았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정우는 그네에서 몸을 일으킨 뒤 연재 앞에 주저앉았다. 쪼그려 앉아 연재의 양손을 붙잡은 정우는 그 손에 호호, 숨결을 불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 멍청하네. 이 추운 새벽에, 주머니에 손 좀 넣고 다니지. 피부 다 벗겨지려 하는 거 봐.”
“……괜찮아요.”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
정우는 아예 그녀의 양손을 붙잡아 제 손아귀 안에 가둔 뒤, 연재와 눈을 마주쳤다.
“연재야. 네가 욕심이 많다고?”
“……네.”
“나보다 많아?”
“……네?”
“나는 애인이 열 명 가까이 있는데 그새를 못 참고 한 명 더 늘렸을 만큼 욕심이 많아.”
열 명이나 있었나? 몰랐다. 알 래야 알 수가 있나.
그러나, 그라면 두 자릿수 애인이 있더라도 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한 달에 세 번인가…….’
연재는 그 짧은 사이에 정우의 애인끼리 정우를 돌려다 쓴다면 한 달에 몇 번이나 그를 만날 수 있을지 계산했다.
한 달에 세 번, 일주일에 한 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부족했다. 그것 가지고 어떻게 살아? 오빠는 하루에 열 번을 봐도 부족한데.
그제야 연재는 제가 불행해졌던 이유를, 정우를 포기하고 도망쳤던 이유를 깨달았다.
죽을 거 같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정우의 사랑이 무한해도, 그걸 십 분지 일로 나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한이 유한이 되고, 그 유한마저 갈가리 찢겨 나가다 보면 그녀는 사랑에 굶주리고 목말라 죽게 될 것이란 사실을.
사랑하다 죽으나, 사랑 못 해 죽으나, 그게 그거였다. 오히려 후자가 나았다. 이것 봐라,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무한한 사랑을 홀로 독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건 독이 든 성배였다.
정우는 그녀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겠지만, 그 희생을 다른 이들도 용서할까?
그녀가 하는 짓은 또 다른 주연재를 열 명 더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선 안 됐다. 이 이상 슬픔은 늘어나선 안 된다, 정우 오빠를 힘들게 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돼.
“욕심이 참 많네요.”
“……그렇지?”
“그런데 오빠, 그래도 오빠의 욕심은 저한테 안 돼요.”
연재는 그네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우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연재는 순식간의 자기 머리 위로 치고 올라가는 정우를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팍에 쿡쿡 머리를 박았다.
“오늘만 해도, 이렇게 오빠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게 내가 박은 대못이다 좋아하고 있는 걸요.”
“그건…….”
“위로해주실 필요 없어요. 저는 욕심쟁이고, 오빠도 욕심쟁이고. 끼리끼리 잘 만난 커플이니까요.”
다만, 자신이 조금 더 욕심을 부리겠다. 추하게도 탐욕스럽게 살겠다.
“오빠, 하나만 더 욕심내도 될까요?”
“뭔데?”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해주세요. 아리랑 잤다는 거.”
“……아아, 그리고?”
“그러고 나면…….”
연재는 생각했다. 정우를 행복하게 하는 건 내 의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차피 정우가 여기서 여자를 더 늘린다고 한들, 슬퍼하거나 그를 거부할 여자는 없으리라.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중요한 건 자신이 할 일이었다. 자신이, 자신이…….
‘내가 죽어서.’
그녀가 희생해서 나머지 열 명의 화합을 이룬다. 아주 쉬운 일이다. 일단 그러기 위해선, 다른 열 명에게 찔리기 위해선 그 모두를 한 자리에 모을 필요가 있었다.
“다들 한 자리에 모아주세요.”
“어…… 음…….”
어셈블.
정우는 한 영화의 대사를 떠올리며 마지못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집으로 올라온 정우는 일단 다른 아이들과 문자를 보냈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주말에 꼭 모여달라는 문자를.
다행히 비성수기에 무슨 일이 있는 시기도 아니었기에, 모두가 모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다만, 정우는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 컨트롤 할 자신이 없었다.
‘얘는 왜 다 모아달라고 한 거야?’
연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겠다는 눈빛이었던지라, 정우는 도저히 그녀의 부탁을 거부할 수 없었다.
차라리 하렘이 깨지는 게 낫지, 어떻게 히로인이 죽는 걸 두고 보겠는가?
깨진 그릇은 붙이기라도 하지 사라진 그릇은 대체 어떻게 보충하란 말인가?
“주말이 되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 또 처음이네.”
그리고 주말이 되었다. 정우는 지금부터 찾아올 히로인들을 대접하기 위한 음료와 음식, 그리고 온갖 놀잇감들을 준비했다.
여차할 때 쓰기 위해 미약과 술마저 준비했다.
가장 먼저, 은혜와 우림이 찾아왔다.
“정우야, 무슨 일이야?”
“일단 자리에 앉아 있을래?”
“어머, 이건….”
“……우림아, 지금은 비밀로 해줘. 알았지?”
은혜는 싱글벙글 웃으며 생일 파티라도 하는 건가 하며 자리에 앉았고, 우림이는 거실에 놓인 음식과 식기의 갯수를 보고서 금세 무슨 일이 일어날지 파악하곤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다음으로, 자희와 예슬이 도착했다. 두 사람은 대학생이 되어서 더욱 미모를 뽐내게 되었음에도, 정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여, 정우. 왜 불러섭Yo?”
“……랩은 때려치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엄청 못 한다.”
“…그 정도야?”
“무슨 일인지 대충 알겠네.”
“모두 도착할 때까지만 좀 비밀을 지켜줘.”
아름이와 신예가 도착했다. 일하다 온 마리도 뒤늦게 도착했고, 연재가 아리와 주희를 데리고서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왔다.
열한 명, 정우를 포함하면 열두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모였음에도 집안은 적막이 흘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주희만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어, 어어… 애들아, 오늘 뭐 정우 생일 아니니?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제 생일 아니에요.”
“아, 그래? 그럼 무슨 일로…….”
“오늘 여러분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정우는 히로인들을 바라보았다. 이리 모으고 보니 장관이었다. 다들 각양각색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이 많은 사람들과 동시에 사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의견이었다. 암묵적으로 정우가 바람 피는 걸 용인하던 그녀들이라 할지라도, 이리 한자리에 모인 걸 보고서도 침착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어찌 말문을 터야 할지 모른 채, 정우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그때, 연재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 여러분을 부른 건 저예요.”
“연재야? 네가 왜…….”
“선생님은 앉아 계세요.”
“아, 응. 알았어….”
젊음의 혈기로 주희를 제압한 연재는 자신을 바라보는 열한 쌍의 눈동자 앞에서도 주늑 들지 않고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연재는 심장이 터질 거 같은 기분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어제, 저는 정우 오빠를 찼습니다.”
순간, 적막보다 더욱 조용한 마이너스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조용하다는 게 오히려 이렇게 스트레스일 수가 있구나, 연재는 그리 생각하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발로 찬 게 아니라, 연애적인 관계에서 찼어요. 그러고도 정우 오빠는 저한테 매달렸죠.”
“……뭐라는 거야. 야, 저 말 진짜야?”
마리가 정우에게 물었다. 정우는 조심스레 고개만 주억거렸다. 지금까지 틀린 말은 없었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의도적인 속임수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정우 오빠는 저를 더 사랑하고, 여러분을 덜 사랑한다는 뜻이 되겠네요.”
“뭐?”
“뭐라는…….”
“푸흡.”
열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웅성거리기 시작하니,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 연재는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자신의 승리 선언을.
“오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제가, 특별히 여러분들이 정우 오빠와 만나는 걸 허락해 드릴게요.”
정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