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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5화 〉 NO.13 하정우는 끝을 향해 달린다. (215/218)

〈 215화 〉 NO.13 하정우는 끝을 향해 달린다.

* * *

하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여자와 여자와의 사이다.

남녀관계가 아무리 좋아 봐야, 여자끼리 친하지 않다면 양다리에 불과하기에.

하렘 엔딩을 노리는 정우도 그러했다. 열두 명이나 되는 여자들은 정우를 좋아했고, 서로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지 않던 정우는 가장 먼저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아싸 성향의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

“…….”

그러나 정우의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도 아무런 말 없이 시간만을 녹여댔다.

나름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던 정우는 머리를 굴리며 왜 그런가 생각하기 급급했다.

‘아…… 내가 미련했지…….’

흔히 아싸, 찐따라고 불리는 인종들을 같이 붙여 놓으면 지들끼리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아싸라는 건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세상에 틀어박힌 존재다. 관심 분야가 같은 찐따끼리 만난다면 더할나위 없는 절친이 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N극과 N극이다.

N극이 서로 만난들 잘 달라붙을 리가 없다. 아싸찐따 두 사람이 만난다면, 그곳은 그들만의 세계가 두 개 있을 뿐이다.

“저기, 은혜야? 연재야?”

“응, 정우야.”

“네, 오빠.”

“둘이 친하게 지내지 않을래?”

그 말에 잠시 정우를 노려본 두 사람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친한 사이라기보다 철천지원수 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마주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악수를 시작했다.

“됐지?”

“됐죠?”

“……친해 보이지 않는데.”

“악수했잖아.”

“이 정도면 친한 거죠. 안 그래요?”

“맞아. 이 정도면 거의 절친이지.”

두 사람은 놀랄 만치 죽을 딱딱 맞추며 정우에게 대답했다. 이런 점이다. 이런 점 때문에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 했었는데…….

‘그냥 종특이었네…….’

두 사람의 MBTI를 측정하면 아마 INTP이나 INFP 같은,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의 유형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유형의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그래­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맞아. 정우 넌 항상 잘못을 하지.”

“전 그래도 오빠 편이에요.”

“……너희 사실 친한 거 아니냐?”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뜨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가볍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애랑 친할 리 없잖아.”

“제가 저 선배랑 친할 리 없잖아요.”

과연, 정우가 보기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 * *

“ㅡ그럼 오빠, 저 다음 시간이 이동 수업이라서 먼저 가볼게요.”

“그래, 수업 잘 듣고.”

일정이 바쁜 연재를 떠나보내고, 정우는 은혜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 이 귀중한 시간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겼다는 점 때문일까, 은혜는 상당히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이 친해졌으면 좋겠다. 두 사람의 성격상 다른 이들을 먼저 적대하지는 않을 테니까. 누가 저 좋다고 달려들면 싫은 티를 내지는 않는 성격이니까.

정우는 우선 연재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오해. 그러니까 자신이 그녀에게 차였다는 오해를.

“이전에, 연재가 그런 말 했던 거 기억나?”

“무슨 말?”

“내가 연재한테 차였다느니,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연재라느니 했던 말.”

그 말을 들은 은하는 기억난다는 듯 인상 찌푸리며 연재를 노려보았다. 감히 그녀보다 2년 더 사랑받은 자신 앞에서 그딴 망발을 하다니?

그 날부터 그녀를 노려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못했다. 오늘 그녀를 이토록 적대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거, 거짓말이야.”

“당연하지! 정우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나, 나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쟤를 가장 좋아하진 않을 거 아냐!”

“아닌데? 난 은혜 너를 가장 좋아하는데?”

“……어?”

뻣뻣하게 굳은 은혜를 보면서, 정우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림이도 좋아하고, 마리도 좋아해. 예슬 선배나 자희 누나, 아름이나 신예, 아리 아연. 그리고 연재까지. 모두 다 가장 좋아해.”

“……가장이라는 단어는 한 사람한테만 쓸 수 있어.”

“그러고 싶어?”

“……으응. 아니.”

가장이라는 단어는 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다. 그러니 모두를 가장 사랑한다는 정우의 말은 문법에 맞지 않는 사용법이었다.

그러나, 은혜는 그걸 지적할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지적한 건 넘어가도록 하고…… 그녀는 본인 스스로가 최초이자 처음이 될 수는 있어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키도 작고, 가슴도 작고, 머리도 안 좋고, 싸움도 못 해서 널 지켜주지도 못하니까…….”

자존감이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실로 뚫고 들어가는 은혜였지만, 그럼에도 다른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장점이 하나 있었다.

정우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는 것.

“가장 사랑받을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이은혜가 가장 사랑하는 건 하정우였다.

그 사실만큼은 변치 않았다.

그러니, 틀린 문법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자신을 가장 사랑했으면 한다.

“나보다 다른 년을 더 사랑하는 건, 안 돼.”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정우는 그리 말하며 은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따스한 손길이다. 은혜는 그 손길을 느끼며 조심스레 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랑해.”

“나도.”

아쉽게도 무언가를 할 시간은 없었다.

그보다 빠르게 쉬는 시간이 끝나버렸으니까.

* * *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학년이 오른 이후 첫 시험.

대부분의 아이들이 긴장감 가득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고 있을 때, 몇몇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시험에 임했다.

그중 한 명이었던 연재는 시험지를 내려다보며 정우가 귀띔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ㅡ이번 중간고사에서 가장 성적이 높은 사람은 소원권 하나.

성적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도 공부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론 소원권으로 말도 안 되는 부탁ㅡ 다른 여자들과 헤어져 달라거나, 자신만 만나달라는 터무니없는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고 미리 들었으나…… 그럼에도 정우와의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모든 여자들이 놓치지 않았다.

‘무조건 1등 해야 해.’

그리고 놀랍게도 이번 시험에서 무조건 소원권을 얻을 수 있는 필승법이 있었다. 바로 시험 범위 내의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올백을 맞으면 된다.

올백을 맞는다면 다른 이들이 몇 점을 맞든 간에 상관없이 소원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설마 다른 이들이 올백을 맞을 리도 없을뿐더러, 맞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정우도 그 정도 융통성은 있다. 올백을 맞는 사람이 여럿이라면 그 모두에게 소원권을 내려 주리라.

“자, 시험 시작­!”

시험관의 목소리와 함께­ 연재는 시험지를 뒤집었다.

아주 쉬운 문제가 나열되었다. 다행이다.

그녀는 올백을, 정확히는 소원권을 노리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 * *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서, 며칠이 흘렀다.

시험 점수가 나오게 된 날.

정우는 시험 전에 내걸었던 내기에 대해 후회했다.

“……아니, 이게 뭔.”

“정우 네가 그랬지? 이번 시험에서 1등을 하면 소원권을 주겠다고.”

“……우리들중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사람을 말하는 거였는데.”

“그게 그거지. 어차피 1등을 하면 우리들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을 거 아냐?”

우림은 그리 말하며 점수가 적힌 시험지를 내밀었다.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사회탐구 제2외국어까지. 모두 백점이었다.

그리고 우림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 나…! 이번에 진짜, 진짜 힘냈어! 응!”

평균 점수가 70점이던 은혜도.

“……뭐, 그리 어렵지는 않았어요.”

눈가에 다크 서클이 가득한 연재도.

“선배, 그럼 이제 소원권 하나 있는 거죠?”

공부와는 담을 쌓은 걸로만 보였던 아리도.

올백이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학년이 오르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시험이기 때문일까, 이번 시험의 난이도가 조금 쉬웠던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올백이 다섯 명이나 나오다니?

“그래. 소원권. 언제든지 말해.”

“나! 나나! 나부터 할래!”

그 말에, 힘겹게 백점을 맞은 은혜가 번쩍 손을 들며 주목을 끌었다. 정우가 발언을 허락하자, 그녀는 그동안 꿈꾸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놀이공원 교복 데이트! 단둘이!”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소원권 안 써도 될 텐데.”

“무조건 단둘이!”

“아­ 알았어.”

“그럼 정우야, 나도 소원권 바로 쓸래.”

은혜의 소원을 들은 우림은 곧장 배시시 웃으며 소원권을 사용하겠다 말하였다.

무엇이든 좋다는 듯 고개 끄덕이자, 그녀는 곧장 은혜를 지목했다.

“얘 소원권 취소. 그게 바로 내 소원이야.”

“ㅡ야!! 소우림! 이 미친년아!”

우림의 소원을 듣자마자 젖을 쥐어뜯고자 달려드는 은혜를 한 손으로 막아내며, 우림은 과연 가능하냐는 듯 고개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고민하던 정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런 식의 사용은 불가능하다 전해주었다.

“그런 건 안 돼.”

“에잉­. 시시해.”

“소원권이니까.”

물론 그런 식의 사용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정우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없었다. 자기들끼리 소원권을 마구잡이로 사용해준다면 나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싸움을 붙이면 두 사람의 사이는 되돌릴 수 없을 만치 멀어진다. 소원권을 나눠준 이유가 서로 친해지길 바라서였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소원권의 사용처를 모두 들은 연재는 소원권으로 소원권 행사를 방해할 수 없다는 걸 듣고서, 가볍게 손을 들었다.

“저, 오빠. 소원이요.”

“뭔데?”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랑 다 같이 섹스하고 싶어요.”

“……뭐?”

정우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묻자, 연재는 일일이 소원권을 받은 4명을 지목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네 명, 그리고 정우 오빠까지 해서 5P 섹스. 해보고 싶다고요.”

당연한 말이지만, 정우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체풀만족 섹스를 누가 거부하겠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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