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
[자동시전 : 가속]
"캬아-아--아---"
날랜 고양이같은 자세로 어린......
작은 좀비 뛰어들어오고 있다.
공중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눈은 어디를 보는건지 촛점이 없다.
난 검을 들었다.
팔뚝에 얹은 후, 숨을 들이켰다.
"...흡!"
힘껏 찔러넣었다.
파각!
관자놀이부터 관통되었다.
...어른보다 가볍게 들어간다.
난 검을 뽑지도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아-아읅!"
콰당탕!
작은 좀비 벽에 머리를 찧으며 엎어졌다.
머리에 꽂아놓은 검이 바닥에서 팅팅하며 흔들거린다.
"............"
고요하다.
조용하다.
나는 그냥 서있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숨쉬며 서있었다.
...생각을 멈추자.
나는 살았고, 이 놈들은 죽었다.
그 뿐이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
문 밖을 내다봤다.
휑한 삼김 진열대와 반쯤 박살난 선반이 얼핏 보인다.
난 허리를 굽혀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작은 좀비의 머리를 밟았다.
검을 뽑았다.
팍!
피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
눈을 들어올렸다.
벽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검......
피에 젖어 붉게 물들어 있다.
빛을 기분나쁘게 반사한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아재 시체의 앞치마를 붙잡고 검을 닦았다.
...잘 안 닦이는걸.
...검은...어떻게 관리해야 되지?
...물로 씻어도...되나...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검을 닦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숨을 들이켰다.
검집에 검을 넣은 후, 허리에 꽂았다.
피와 머리칼이 엉겨 굳어 까맣게 되어버린 삼단봉을 잡고 허리춤에 꽂았다.
두개의 검과 삼단봉을 챙기고는, 대형 도끼를 들어올렸다.
...묵직하네.
밖을 내다봤다.
조용하다.
나는 시체를 밟고 창고를 나섰다.
[레벨이 3 올랐습니다.]
...21렙 됐네.
좋아.
체력에 3점을 넣어 18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대형마트는 무리다.
대형 아니라 작은 마트도 못 가겠다.
가속을 벌써 네번이나 썼고, 체력도 거의 거달나려고 해.
제대로 회복하고 다시 나오자.
편의점에서 아직은 싱싱한 과일팩 따위들과 요거트, 빵, 라면 같은 것들을 집어 가방에 쑤셔넣었다.
...할매.
고춧가루랑 멸치 갖다달라고 했었지.
대형 마트 말고 좀 작은데로 가보자.
푹 쉬고 나오면 동네 슈퍼 정도는 별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을거다.
빵빵해진 가방을 어깨에 메고 편의점을 나왔다.
지금 몇시지?
오후다. 아마 네시?
저녁은 먹을 수 있겠네.
...돌아가자.
* * *
저녁식사는 꽤 화기애애했다.
할매도, 수현이도, 예은이도, 소은이도, 내가 피칠갑을 하고 나타났음에도 호들갑 떨지 않아줬다.
가방에서 우르르 쏟아내며, 고춧가루랑 멸치는 좀 기다려주셔야 겠다고 말하자 할매가 슬픈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시요, 총각. 고생했어."
여자들은 내가 밖에서 뭘 하고 왔는지, 몇명이나 죽였는지, 죽인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그런건 일체 묻지 않았다.
마치 밖에서 있었던 일은 밖에서 있는 일이고, 여기와는 상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저녁식사를 마쳤다.
약간 현실도피 하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꽤나 안정감 드는걸.
밖은 지옥인데 여긴 잔잔하게 콩나물무침의 맛에 대해서 평하고 배우려 들고 있으니.
와중에 능동적으로 뭘 할려고 하는건 수현이었다.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털털하게 지내던 공대생다운, 얘한텐 뭔가 그런 바이브가 있다.
예은과 소은이 집안에서 현실도피를 하고있을 때 - 예은은 일본어 교재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소은은 방구석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 수현이는 자기 집 장농을 뜯어내어 창문을 틀어막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쓸모있는 여자다.
내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수현이는 내가 갖다준 공구를 이용해 집을 요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꽤 괜찮은 파트너십이다.
안을때 감촉도 신음도 좋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옥탑방에 누워있다.
오늘 10렙업했다.
오늘만 10명을 죽였다.
아니, 10마리다.
난 자꾸 버릇처럼 저 좀비들을 사람취급 할려고 드는데, 그러면 안된다.
저건 인간이 아니고, 살아있지도 않다.
저건 마리다. 명이 아니다.
감정을 줄 대상도 아니고, 의사소통이 되는 대상도 아니다.
그래.
아직은 서투르다.
저 놈들을 무의식중에 사람처럼 볼려고 하니.
점차.
조금씩이라도 감정을 걷어내야 되겠지.
죽이면 죽일수록 그것은 수월해진다.
한가지 확실한건, 10렙업을 해도 나는 약하다는거다. 앞으로도 계속 렙업을 해야되고, 계속 죽여나가야 된다.
...자자.
이튿날 아침, 완전히 회복해 집을 나섰다.
목표는 동네 슈퍼.
편의점 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단독주택 골목으로 들어가야 된다.
난 고요한 골목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따금씩, 몇 집 건너 한 집씩 으르렁대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집안에서 발생해 온 가족을 몰살시킨 놈도 있는거다.
종말이 시작되고 얼마나 많은 좀비들이 일거에 발생한건지 모르겠다.
엄청나게 많을거다.
그러니 전세계가 단 며칠만에 기능정지 되어버렸겠지.
슈퍼가 나타났다.
...음?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난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조심스럽게 슈퍼로 다가갔다.
슈퍼 창문 너머로 남자가 보인다.
덩치가 꽤 있는데.
...좀비겠지.
난 검을 들고 천천히 슈퍼로 들어갔다.
다행이 차양이 쳐있어 내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부스럭, 부스럭.
...어?
덩치 큰, 티셔츠와 블랙진 차림의 남자가 라면을 가방에 쑤셔넣고 있다.
등밖에 안 보여도, 확실하다.
저건 물건을 집고 있는거다.
좀비... 아니다.
난 슈퍼 안을 둘러보며 낮게 말했다.
"저기요."
흠칫!
덩치 큰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홱 돌아봤다.
몽키스패너를 들고있다.
공구에... 피가 묻어있는데?
"너, 너, 주, 주, 죽여, 죽여버린, 누, 누구."
덩치에 걸맞지 않게, 잔뜩 겁에 질려있다.
난 검을 슬쩍 내리며 손바닥을 보였다.
"난 사람입니다. 저... 좀비들이 아니에요. 먹을것 좀 구하러 왔습니다."
덩치 큰 남자는 수염이 덥수룩했다.
며칠 면도 못 한 모양인데.
땀을 질질 흘리며 턱을 덜덜 떨고있다.
숨을 몰아쉬면서 날 빤히 쳐다본다.
...내 말은 들은건가?
"먹을거, 구하러 왔다고요. 아저씨하고 똑같아요. 그거, 내려놔요."
허공에서 발발 떨리는 몽키스패너를 가리켰다. 아재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너, 너, 휴, 흉기 들고 있으면서, 나, 나보고, 내려, 놓으라고. 나, 나 찌를거지. 너!"
...돌겠네.
너무 겁먹었다, 이 아저씨.
어차피 가속이 있으니 여차하면 가속 박고 칼 꺼내서 찔러 죽여버리면 된다.
난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됐지요? 어디 사는 누구고 그런건 묻지 맙시다. 먹을거 구하러 왔고, 아저씨도 알아서 챙겨서 가면 돼요. 알겠어요?"
밖에 혹시 인기척이 들리진 않는지 힐끔 내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재는 내가 검을 집어넣자 좀 안심했는지 천천히 몽키스패너를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땀 질질 흘리며 바들바들 떨고있다.
난 아재를 힐끔 쳐다보곤 슈퍼로 천천히 들어갔다. 혹시라도 저 멍청한 놈이 덤비면 바로 가속 박고 대가리 찔러죽인다.
아재도 나를 힐끔거리며 라면에 손을 가져갔다.
선반 하나를 지나가자 슈퍼 안쪽에 안방이 나왔다. 이부자리 하나랑 TV가 놓여있는 방이다.
진짜 낡은 슈퍼네.
이런거 존나 오랜만에 본다.
말 그대로 동네슈퍼다.
그 방 안에, 할매가 엎어져 있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뚝배기 제대로 깨졌네.
난 아재를 힐끗 돌아봤다.
저 아재가 했나본데.
몽키스패너로.
...뭐, 그럴 수 있지.
난 슈퍼 안쪽의 선반을 둘러보며 고춧가루를 찾아봤다.
오, 있다.
그런데 멸치는... 없네.
저쪽 냉장고쯤에 있을려나?
진열된 고춧가루중 두봉지를 집어 가방에 넣고, 냉장고 쪽으로 가봤다.
김치랑 단무지, 건어물 같은게 들어있다.
...시선이 느껴지는데.
냉장고를 열면서 옆을 쓱 돌아보니, 아재가 날 쳐다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다.
"...왜 봅니까? 할 말 있어요?"
덩치 큰 남자가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날 보면서 말했다.
"아... 저... 어디 사십니까?"
...뭐라는거야.
냉장고 안에서 커다란 멸치 한봉지를 발견하고 꺼냈다.
...디포리?
...이 넙데데한 멸치는 왜 흑마술 주술같은 이름을 하고있냐.
아무거나 챙겨가지 뭐.
김치도 챙기고.
하나 하나 들어서 가방에 쑤셔넣고 있는데, 여전히 시선이 느껴진다.
옆을 보니 아재가 계속 날 보고있다.
...좀 웃고있는 것 같기도 한데.
수염 덥수룩해갖고 어설프게 웃고있으니 좀...
"아저씨는 어디 사는데요?"
아재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전 요 건너편에 마누라랑 같이 살고 있어요. 갓난 애기도 있고... 먹, 먹을걸 좀 구하러 왔습니다."
음... 애기라.
힘든 시기에 애기를 낳았네...
종말이 올 줄이야 물론 몰랐겠지만.
아재가 말했다.
"호, 혼자 다니기 좀 무섭지 않으십니까...? 보니까 검도 있고... 그거 진검 맞죠?"
...아.
이 대화가 어디로 가는지 알겠다.
이 아재, 무서우니까 같이 다녀줄 사람이 필요한거다.
집에 마누라랑 애가 있다고?
흠...
이 아재, 덩치도 있고.
겁은 많지만 힘은 좀 쓰겠는데.
...동료라.
...딱히 동료를 가지고 싶단 생각은 안 했지만, 바로 엊그제만 해도 창고 안에서 주먹질 좀 하는 놈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긴 했었어.
...도움 될래나 이 아저씨?
난 옆에 있던 참치캔과 오징어 안주 따위를 우르르 집어 가방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예. 진검 맞습니다."
대충 빵빵하네.
지이익-
지퍼를 잠그고 어깨에 둘러메곤 슈퍼 입구로 걸어갔다.
그러며 아재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