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 귀찮은데.
세상에서 귀찮은게 제일 싫단 말이지.
문에 귀를 대보니 아직도 날 찾으며 으르렁거린다.
아마 저놈들 도로 기어들어갈려면 넉넉잡고 한시간은 있어야 될거다.
......씨발.
넷플릭스로 딱 영화 한 편만 보는거다.
충전기 꽂아놓고 넷플릭스 휘릭휘릭 넘겨가며 재미도 없는 영화를 멍때리며 보다가 그냥 꺼버렸다.
못보겠다 씨발.
어제 영화를 네편이나 봐놨더니 뭘 봐도 지겹다.
밖은 제법 잠잠하다.
시간은 좀 지난 모양이네.
검을 쥐고 일어나 사무실을 조심스레 나섰다.
조용하다.
...됐어.
들어간 것 같다.
가자.
골목으로 들어서니 방향을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메아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누가 또 당했구만.
* * *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현이가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 오빠! 일찍 왔네?"
"어. 좀 일찍 왔어. 있다 저녁때 다시 가볼려고."
마당에 한때 가구였던 것을 늘어놓고 못질을 하며 뭘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리케이트다.
이 집을 완전히 요새화 하고싶은거다.
"수현이 손재주 좋네."
수현이 날 보더니 웃었다.
"할거 없는데 이런거라도 해야지 뭐. 원래라면 게임이나 했을건데, 그냥 들어가기도 싫고."
호오.
계단에 앉아 수현이를 바라봤다.
히키라고 했었지.
"무슨 게임 하는데?"
"와우."
"왜 안해? 재미가 없어?"
와우 재미 없어졌다는 소문은 유튜브나 뭐 그런데서 흔히 보긴 했는데, 난 와우를 해본적이 없단 말이지.
온라인 게임 자체를 잘 안한다.
옛날에 던파 좀 하다가 말았고, 주로 내가 했던 게임들은 RTS류였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신작 꽤 재밌었지.
토탈워 종류도 꽤 즐겁게 했고.
별로라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 취향엔 딱이었어.
수현이 말했다.
"있잖아. 요즘 뭐 이런거 때문에. 이젠 공대가 안 돌아가."
...아.
공격대.
레이드 참여할 사람들이 더이상 접속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구만.
수현이 얼굴 보아하니 꽤나 오랫동안 같이 게임했던 사람들이었나보다.
"게임은 아직 접속은 돼?"
"응. 근데 뭐, 언제까지 될지 모르지. 오빠는 하는 게임 없어?"
난 고개를 저었다.
이미 상태창 렙업해가며 목숨 건 게임을 하고있는데 여기서 무슨 게임을 더 하냐.
"없어."
"흐음..."
수현이 날 빤히 바라보더니 망치를 들고 못질을 통통통 시작했다.
"원래 게임 안해?"
"아니, 옛날엔 게임 덕후였지. 주로 전략시뮬같은거 했어. 요즘은 뭐. 그런거 하기 좀 그렇잖냐."
수현이는 날 힐끗 보더니 흠 거렸다.
"그래도 다행이네. 취미가 맞아야 같이 잘 지내지."
......같이 잘?
약간 말에 뉘앙스가 있는데?
수현이......
살짝 통통하면서 가슴도 풍만해서 안으면 감촉도 좋고... 성격도 꽤 괜찮은 편이고...
아담한게 그냥...
난 손에 턱을 괴며 미소지었다.
"...잘 지내면 좋지."
수현이는 날 힐끗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미소지으며 망치질 할 뿐이었다.
그때 옆집 문이 살짝 열리며 예은이와 소은이가 나왔다.
"어? 성훈씨. 일찍 오셨네요?"
"응. 일찍 왔어."
소은이가 뭐라고 속닥이며 나한테 목례한다.
아마 안녕하세요 였던것 같다.
아침밥 먹을때 봐놓고.
난 웃어주고는 걔들이 나온 집을 턱짓하며 물었다.
"...좀 어때?"
예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는 이젠 좀 괜찮으신 것 같아요. 집 밖에 나오는건 아직 좀 어려워 하시지만요."
"...아기는?"
예은이와 소은이가 방긋 미소지었다.
"엄청 귀여워요."
...음.
난 계단에서 일어나 예은이와 소은이에게 터주며 그 집 문을 힐끗 바라봤다.
예은이와 소은이는 아기가 귀여워서 저 집에 자주 들락거리는 모양이다.
새댁 아줌마는 예은이와 소은이가 자주 와주니까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같고.
...괜찮네.
"성훈씨. 할머니가 점심때 비빔국수 해주신대요. 드실거죠?"
"비빔국수 좋지."
웃어주니, 여자들도 웃어준다.
예은이와 소은이가 올라가는걸 보고 수현이에게 물었다.
"창문 같은건 거의 다 막아놨나본데. 뭐 더 필요한건 없어?"
수현이 통통거리며 망치질을 하다 생각에 잠겼다.
"...필요한거야 많죠. 근데 가능하면 철물점에 직접 가보고 싶어요. 제가 생각 못해던, 저한테 필요한게 아마 있을것 같거든요."
...음.
일리있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 끝내놓고 나면 철물점 근처까지 다 쓸어놓을게. 안전해지면 말해줄 테니까 같이 가보자."
난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좀 쉰다. 점심때 봐."
"비빔국수!"
수현이가 망치를 들어올리며 호응한다.
이부자리에 누워 폰으로 만화를 보고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벌써 점심땐가?
문을 여니 덩치 큰 아재다.
"아, 선생님. 국수 드시러 오랍니다."
오. 밥이다.
옥탑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물건은 좀 갖고 왔습니까?"
덩치 큰 아재가 웃으며 말했다.
"예, 선생님. 거기 진짜 그 무서운 것들이 다 죽어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새 옷이랑 간식거리 갖다주니 마누라가 그제야 좀 먹더라고요. 마누라가 초콜릿을 워낙 좋아해서."
으음.
아재 마누라 취향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걸.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지어 줬다.
"다행이군요."
"예, 선생님.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주인집에 들어가자 할매가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리고 덩치 큰 아재는 국수 두그릇을 받고는 연신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저 국수 아마 저 아재가 슈퍼에서 갖고 온 것일거다.
자기가 재료 갖고와놓고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다니. 참... 성실한건 좋은데,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살아남기 힘들겠는걸...
...요즘 같은 분위기라...
점심식사는 꽤나 화기애애했다.
비빔국수도 개꿀맛이다.
살짝 매우면서 달콤하고 고소한 것이 후루룩 넘어간다.
...종말인데 이런 분위기의 식사라...
확실히... 드물지.
아마 이 동네에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공포심에 질려 집 밖으로 함부로 발도 못 내딛고 있을거다.
이 집이 특이한거다.
뭐, 나쁘지 않아.
저녁 8시.
집을 나서다 수현이랑 마주쳤다.
"어? 오빠. 어디가?"
"넌 어디가?"
수현이가 눈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오빠 방에. 오빠는?"
"...마트에."
수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이시간에 마트야 마트는. 위험해. 그냥 내일 가."
아니, 가속이 다 충전됐는데요.
안 쓰고 자버리면 아깝잖아 이년아.
렙업해야 된다고.
"안에 들어가있어. 금방 갔다올게."
"아이 참. 가지마. 응?"
으음...
얘 원래라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보고 잘 갔다 오라는 뉘앙스로 이것저것 갖다달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꽤나...
흠... 낮에 분위기도 그렇고.
...귀엽네.
난 웃고는 수현이를 당겨 안으며 젖을 만졌다.
그리곤 귓가에 속삭였다.
"금방 갔다올 거니까, 잘 씻고 기다려."
"으유!"
내 가슴을 탁, 친다.
쎄게 치진 않는다.
난 웃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옥탑방 문 여닫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웃으며 대문을 나섰다.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메아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비명소리, 어제오늘 좀 자주 들리는 것같다.
아마 뭐 좀 구하러 가게 같은데 들렀다가 발각되어 도망치다 잡혀버리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가게마다 거의 좀비들이 들어있으니.
내가 알 바도 아니고, 내가 다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하곤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난 한가로운 기분으로 마트를 향해 걸었다.
수현이가 만들어 준 리프팅 벨트, 허리에 넉넉하게 차고 다니니 서부시대 총잡이같다.
으아아아악-
오, 또 들려온다.
난 비명 메아리를 들으며 미소지었다.
서부시대 총잡이라... 맘에 드네.
마트에 도착해 오징어 점포 너머로 한번 쓱 들여다 봤다.
내가 죽여놓고 나온 그대로다.
음, 시체들 손이랑 발 같은데가 좀 뭉개지고 뒤틀려 있는데.
좀비들이 뛰쳐나오면서 밟은 모양이다.
오징어 점포 너머를 한 번 확인하고는, 진열대를 밟고 넘어갔다.
자, 해보자.
여기부터는 잘 살펴서.
점포 진열대 옆의 문으로 밖을 살짝 내다봤다.
없다.
놈들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거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
공포영화 속 띨빵하게 죽는 놈들처럼 갑자기 팔을 물어뜯기거나 그 지랄 날 순 없다.
검을 뽑았다.
슈릉-
한걸음 한걸음을 주의깊게.
문으로 나와 포장대와 박스더미, 그리고 화장실 근처를 잘 살피며 조심스레 걸어나왔다.
마트는 환하다.
아까 도발한 탓에 바닥이 좀 온갖 상품들과 과자 따위로 어지러워지긴 했다.
그것 외에는 그저 똑같다.
...자, 해볼까.
...도발을.
"...스으으읍...!"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외쳤다.
"언리미티드 빠와!"
...씨발, 깜빡했다.
멋진 도발문구 알아오는거.
마트 여기저기서 두더지 게임하듯이 불쑥 불쑥 솟아오른다.
대가리가 홱홱 돌아가며 이 쪽을 본다.
심장이 두근댄다.
생각이 없어진다.
시야가 선명해진다.
와라.
난 검을 두 손으로 쥐고 외쳤다.
"오비완 케노비!"
나도 이젠 내가 뭐라고 씨부리는지 모르겠다.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나온다.
"크아아악! 캬아아아악!"
놈들이 발작적으로 괴성을 지르며 와라락 우두두 달려왔다.
난 미소지으며 놈들을 바라봤다.
온다, 온다...!
움직이지 않고, 검을 들어올려 어깨에서 눕힌다.
찌르기 직전이다.
"카아아아악! 크롸라라락!"
우당탕 콰당탕! 하며 진열대 하나가 엎어졌다.
놈들이 들이닥친다!
왔다!
가속!
"아!"
[자동 시전 : 가속]
'아' ?
뒤에서, 꽤 멀리서 들려왔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