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87)

즉시 유지 장갑을 눌러봤다.

희미한, 하얀 색깔의 연기가 손 안에서 솟아 오르더니 갈색 장갑 한 쌍이 나타났다.

엄청 부드러운 진한 갈색의 가죽장갑이다.

손등과 손바닥만 감싸도록, 손가락이 뚫려있는 부드러운 가죽장갑.

뭐지 이건?

손에 껴봤다.

감촉 좋다.

손에 착 달라붙는게, 꼭 내 손을 정밀하게 재서 제작한 물건같다.

손목에 버튼까지 눌러서 틱, 잠그니까 완전히 손에 찰싹 달라붙어 편안하기가 그지없다.

...뭐냐 근데 이 장갑은.

양쪽 손을 붙여서 문질러 봤다.

...안 문질러진다!

아예 꿈쩍도 안 한다!

오, 좋은데.

이거면 뭘 손에 들고있다가 놓칠 일은 없겠어!

난 일어서서 검을 뽑아내 봤다.

슈릉-

우와, 그립감!

개쩌는데?

근데...

검에서 뭔가 연기가 부스스 하고 올라온다.

검날에서는 별로 연기가 안 난다.

검의 뾰족한 끝에서 주로 집중적으로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뭐지?

서서히 연기가 사라진다.

...오오...

광택이...!

검이 눈부실 정도로 광택을 일으키고 있다!

방금 대장간에서 완성되어 나온 검같다!

피가 엉겨붙어 있던 희미한 자국 같은것도 완전히 사라졌다!

"...오오."

빛깔이 장난이 아닌데?

날을 슬쩍 바라봤더니, 전등빛을 찬란하게 반사하고 있다.

그냥 깨끗해지기만 한게 아니야.

날카로워지기까지 한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다, 방구석에 널려있던 과자봉지를 발견했다.

그걸 갖고와서, 검 위로 들어올렸다.

검날을 위로 향하게 하고는, 봉지를 떨어뜨렸다.

스르륵-

"...!"

...비닐봉지가...

분명히 엄청 질길텐데, 단숨에 검을 통과하듯이 잘려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스르륵 하는 느낌 뿐이었다.

면도날보다도 날카롭다.

"...미친."

...유지 장갑.

손에 든 무기를 최상의 형태로 유지시켜주는 장갑인거다.

...개쩌는 아이템을 얻었다.

난 검을 바라보며 벅찬 심정을 느꼈다.

손등의 문신 따위는 까맣게 잊을 정도다.

유지 장갑...

성능 어느정도인지 한 번 볼까?

방 안을 두리번거려 봐도 별로 썰어볼 만한게 없다.

"......"

...찾았다.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쨋든 찾았다.

욕실 문짝이다.

두터운 나무문.

...어떨려나.

검을 내밀어 문을 슬쩍 찔러봤다.

약간 뿌직 하는 느낌과 함께 검이 살짝 들어간다.

"......"

좀 더 힘줘서.

푸욱, 하고 검이 쑥 들어갔다.

거의 힘을 쓰지도 않았다.

팔을 밀어넣었을 뿐이다.

두터운 나무 문짝이 무슨 라면박스처럼 뚫린다.

...개쩌는데.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또 하나의 진검.

그것도 빼서 들어봤다.

새롭게 쥔 진검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다 스르륵 사그라들었다.

전등빛을 반사하는게 아까와는 다르다.

두 손으로 검을 쥐고 문짝을 찔러봤다.

푸욱, 하고 들어간다.

뺄때도 그리 힘이 들지 않는다.

문짝에 얇은 구멍 세개가 생겼다.

"...좋아."

이젠 쌍검을 쓸 수 있겠어.

그동안 검 두자루 갖고 쌍검으로 운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두개골을 뚫는데 꽤나 힘껏 찔러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제대로 뚫을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그럴거면 하나를 제대로 두 손으로 잡고 팍! 찌르자. 그게 그동안 검 하나만을 사용했던 이유다.

이런 두터운 나무문도 별 힘들이지 않고 찌를 수 있다면, 이젠 확실히 두 개의 검을 운용할 수 있다.

"...후우..."

유지장갑, 좋은걸.

검을 검집에 넣어놓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새로운 전문화, 어쩌다 고르긴 했지만 쓸모는 있어. 게다가 문신과 장갑까지 먹었으니 그리 나쁘지 않다.

좋아.

내일부터는 다시 레이드다.

...어디를 가볼까...

주상복합 건물과 대형마트 건물.

이 근처에선 그 두군데서 가장 많은 사냥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 뭐.

중형마트 하나는 쓸어놨고, 아무리 인라인 동호회라도 그거 다 털려면 적어도 1,2주는 걸릴거다.

주유소 맞은편, 주상복합 건물.

수현이가 원활하게 작업할수 있게 거길 완전히 쓸어놔서 그쪽 거리는 최대한 안전하게 확보해두자.

내일부터는 새로 시작하는거다.

1레벨부터.

* * *

아침이다.

...젠장.

문신을 못 보이겠어.

긴팔 남방을 입고, 유지장갑을 끼고 내려갔다.

피 묻기 싫어서 입었다고 했더니 별 말 안한다.

...언젠간 보이겠지만, 뭐.

아침은 바지락 된장찌개와 김치전.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멸치볶음도 맛있고, 고구마전도 맛있고, 콩자반도 맛있다.

할매손맛, 쩌는데.

아니, 예은이 작품인가?

요즘 할매가 꽤 관절이 안좋은지 별로 안 움직이는 것 같은데.

예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한마디 헤줬다.

"맛있다."

"고마워요."

예은이도 웃으며 대답해줬다.

예은이가 만든거 맞네.

요리솜씨 일품이야.

누가 데려갈건진 몰라도 좋은 여자야.

역시 집밥이 최고다.

정신없이 집어먹었다.

그러며 들었는데, 소은이는 원래 웹툰작가 지망생이었던 모양이다. 집에서 만화를 주로 그리는데 꽤 재밌다며 다음편 언제 그리냐고 수현이가 묻고있다.

흐음.

만화 그린다는건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구나. 재밌다니 언제 한번 읽어볼까?

낯을 많이 가리던데 내향적인 성격이라 그림 쪽으로 취미를 가진 모양이지.

"오빠. 오늘 뭐 할거야?"

쩝쩝거리며 먹는데 수현이가 물어왔다.

꿀꺽 삼키고 말했다.

"음, 오늘 저쪽 큰 건물 주차장으로 가볼려고. 거기까지 완전히 쓸어놔야 철물점 가는 길이 안전해지거든. 지금도 안전하긴 한데, 더 확실히 해둘려고."

수현이가 배시시 웃더니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알았어. 다치지 말구. 알았지?"

무슨 애 다루듯이 등을...

난 피식 웃고는 훈이라는 덩치 큰 아재를 바라봤다.

이제 훈이 아재와 새댁 아줌마는 우리랑 같이 밥 먹는다. 어제 저녁때 같이 삼겹살 구워먹으면서 꽤나 친해졌나보다.

방금 밥 먹으면서 들어보니 새댁 아줌마도 중형마트에 가볼 생각인가보다.

집 밖에까지 나올 생각을 다 하고, 확실히 여러모로 멘탈이 많이 회복됐어.

아기도 햇빛 좀 쪼여주면 좋겠지.

집 안에 있는 것 보다야.

난 훈이 아재한테 말했다.

"수현이 철물점 간다고 하면 같이 좀 가주겠습니까? 아마 제법 많이 필요할건데, 무거울거 거든요."

훈이 아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이고. 그럼요, 선생님. 안그래도 우리집도 창문이랑 이것저것 해주고 해서 저야 도울 수 있으면 얼마든지 돕지요. 수현씨, 무거운거 그냥 저한테 맡겨요. 제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수현이가 웃었다.

"고마워요. 언니, 오늘 형부 좀 빌릴게."

새댁 아줌마가 미소지었다.

"그래."

오오.

웃기도 하네.

웃으니까 더 미인인걸.

아줌마 웃으니까 예전에 TV에서 봤던 그 누구냐 황신예인가 하는 여자 연예인이랑 꽤 비슷하다.

훈이 아재, 여자 잘 만났네.

어떻게 저런 여자를 홀랑 가로챘대냐.

그래도 뭐.

난 수현이를 힐끗 봤다.

아줌마하고는 확실히 다르다.

수현이는 좀 더 귀여운 인상이다.

동물로 치면 래서팬더같이 생겼달까.

귀여움 레벨로 치면 여기 여자들 중엔 원탑이다.

얘도 조그맣고 귀여운게 나한텐 딱 좋지.

같이 있을때도 적극적이고.

"한 선생님. 인라인 동호회 사람들하고 같이 그거 작업하자고 했던거 제가 말해둘까요?"

작업?

아아, 시체 모아다 태우는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 좀 해주세요."

"아유, 걱정 마세요. 제가 다 말해두고, 그 사람들하고 같이 해둘게요."

성실하네, 이 아재도.

겁 많은게 문제이긴 한데, 성실성 하나는 알아줘야 되겠다.

수현이도 그렇고, 훈이 아재도, 또 요리 잘하는 예은이도 그렇고...

...같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은 조합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즐거운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다.

자, 이제 가볼까.

옥탑방에 돌아가 리프팅벨트에 검 두자루를 걸어놓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설땐 항상 조심해야된다.

주위를 살피며 대문을 나서자 눈에 띄는게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눈에 띄지 않는게 있었다고 해야 되겠다.

슈퍼쪽에 있던, 푹 썩어가던 쳐늙은 양아치 네마리의 시체가 없었다.

훈이 아재가 어디로 치워버린 모양이다.

시체가 있었던 자리에서 기분나쁜 자국이 슈퍼 안쪽으로 이어져 있다.

...슈퍼 안에다 저 네마리 던져놓은 모양이네.

어차피 슈퍼는 요 며칠간 훈이 아재가 하루종일 왕복하며 모조리 털었을테고, 이젠 됐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 뭐.

다 털어버린 슈퍼 같은거야 다시 볼 일 없긴 하지.

편의점 쪽으로 걸어가, 도로로 들어갔다.

넓은 8차선 도로.

편의점에서 거의 일직선.

편의점 앞 삼거리 신호등에 정차해 있는 수많은 차량들로 시야가 거의 차단된, 건너편 건물.

주상복합 건물을 향해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인도 옆 정차된 5톤 트럭 옆에 도착해, 몸을 굽히고 앉았다.

크르르르- 크르르르-

공기를 타고 희미한 울림이 들려온다.

저 놈들은 잠도 안 잔다.

밥도 안 먹는다.

그러면서 여지껏 살아있다.

...살아있다...

라고 보긴 좀 힘들겠다.

사람에게 극도의 공격성을 보이며 깨물어 변이시키곤, 자신과 동류가 되어버린 놈들에겐 일체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괴상한 놈들.

좀비라고 하기도 그렇다.

저 놈들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TV나 영화에서 봤던 좀비들처럼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다.

희한한 놈들.

좀비들.

...사냥해보자.

난 트럭의 짐칸에 손을 대고 천천히 후미등 쪽으로 걸어갔다.

놈들은 아직 날 발견 못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은 꽤나 어둡다.

주차장 입구와 안쪽으로는 조명이 있는 것 같지만,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엔 달리 조명이 없다.

밤에는 도로의 가로등 불빛에, 낮에는 햇빛에 의지해 차들이 입구를 찾아 들어가는 모양이다.

건물이 워낙 커 햇빛을 가리고 있어 시원하게 그림자져 여기선 거의 보이질 않는다.

트럭을 지나 인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차장 벽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크르르르- 크르르르-

놈들이 있다.

확실히 들려온다.

벽에 기대어 주차장 쪽을 힐끗 들여다 봤다.

...여기서 보이는 것만 20마리 이상.

안쪽에는 얼마나 많은 놈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20마리 이상이라...

20렙업 이상을 이번 한 판에 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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