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87)

중형마트 그거, 꽤 물건들도 식자재들도 많았어.

처음에 그거 정리해둘 때 이정도면 하숙집 사람들 1년은 족히 먹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벌써 스무명 서른명에다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난다고...

그 사람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나온건 아마도 아닐거다.

애 있는 집, 노인 있는 집 등등 사정은 다양할테고 아마 젊거나 엄마 아빠쯤 되는 사람들이 가족들 두고 식료품 가지러 나온 거라고 보는게 타당할거다.

밖은 두렵고, 괜찮은지를 보는 첫날이니까.

...안전하다는게 확인되면, 그 때는 어떻게 되지?

집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물건 가지러 우르르 나오지 않을까?

예은이 말을 들어보건대, 아직 질서정연하게 나눠가지고 있는 것같다.

마트에 진열된건 풍족하니까.

...언제까지 풍족할지는 모른다.

...대형마트를 빨리 확보해야 되겠어.

난 수현이를 돌아봤다.

수현이도 나를 보고 있었다.

"...오빠. 나도 밥먹고 마트에 갔다올게. 오빠랑 저기 훈이 아저씨랑 도로에 차 좀 부탁해."

...수현이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한거다.

좀비의 떼거지가 밖에 있고, 현재 안전한 이 거리가 언제까지 안전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다른건 몰라도, 먹을건 반드시 쟁여놔야돼.

혹시라도 내가 렙업중에 이 동네에 놈들이 들이닥쳐, 하숙집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갇히는 경우가 생긴다면 나 자신도 난감해진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챙겨 와."

"...응."

수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은이와 소은이, 새댁 아줌마는 아직 유튜브 동영상을 못 본 모양이다.

수현이, 제법 눈치가 빨라.

내가 말을 안 하니 자기도 굳이 이 자리에서 유튜브 동영상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훈이 아재도 마찬가지네.

저 아재는 살짝 굳은 얼굴로 김치찜을 열심히 먹고있을 뿐이다.

식사를 마치고, 여자들은 마트로 갔고 훈이 아재와 나는 도로로 나갔다.

철물점에서 가져온 절단기로 본넷과 범퍼, 트렁크와 문짝 따위를 싹둑 싹둑 썰어다 마당에 갖고 와 차곡차곡 재어 놓는다.

대충 차량 한대 반쯤 껍데기를 벗겨내고 나니 지쳐버렸다.

"후, 좀 쉽시다 이제."

"예, 선생님. 허어, 허어."

범퍼나 문짝이 그리 무겁진 않다.

알루미늄이라 확실히 가볍다.

그렇다 해도 노가다는 확실히 노가다다.

노을 질 무렵이 되니 지친다.

"저 올라가서 좀 씻습니다. 저녁식사때 보죠."

"예, 선생님. 쉬십쇼."

훈이 아재가 나한테 90도로 꾸벅 인사해온다.

으음, 부담스러 저런 인사.

살짝 괜찮아 질려고 하던 와중에, 내가 맥도날드를 한방에 정리해버리는 모습을 보고 나니 더 저러는 것 같다.

아, 몰라.

난 이미 요전에 말 편하게 하라고 했어.

저 아재가 안 하는거야.

냅둬 걍.

으 씨발, 땀 존나 흘렸네.

옥탑방에 돌아와보니...

방 안이 깨끗하다.

...청소 했나본데?

수현이가 했나?

깨끗해진 방 구석에 과자랑 젤리 같은게 보기좋게 쌓여있다.

한 사람이 들고 올만한 양이 아니다.

...누가 했든지, 훈이 아재는 절대 아닐거고, 여자들이 분명하다.

쟤들, 티는 안 내는데 은근히 나 챙겨줄려고 하네.

시원하게 씻고 나와 이부자리에 드러누웠다.

아, 씨발 좋은 냄새.

...좋은 냄새?

베개에 코를 대고 킁킁 맡아봤다.

...베갯잇이랑 이불도 바꿨네.

무늬랑 색깔이 똑같아서 전혀 눈치 못챘다.

엄청 챙겨주네.

피식 웃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피곤해.

한두시간만 쉬고, 저녁 먹고 주상복합건물 레이드 다녀오자.

"후우..."

누워서 쉬다보니 메세지가 왔다.

[저녁 ㄱㄱ 청국장! 언능!]

수현이다.

읏쌰 하고 일어나서 내려가니 구수한, 외국인이 맡으면 기겁할 청국장 내음이 콧가를 훅 덮쳤다.

으음, 맛있겠는걸.

음? 그런데 소은이랑 새댁 아줌마, 훈이 아재가 안 보인다.

"몇명 없네?"

예은이가 킥, 하고 웃더니 말했다.

"소은이는 청국장 못먹어요. 새댁 아줌마도 못 먹는대요. 그래서 냉동피자 갖고 온거 먹는다고 아저씨랑 같이 아랫집에 내려갔어요."

흐음.

청국장 못먹는구나.

뭐, 못먹을 수 있지.

추어탕도 못먹는 사람들 있다던데, 난 음식을 가리질 않아서 잘 이해는 못하겠다.

청국장을 퍼먹으며 물었다.

"마트 좀 어때? 사람들 많이 왔어?"

억?!

맙소사, 진심 개꿀맛!

입에 넣자마자 진하고 걸죽한 된장 감칠맛이 혀를 꾸욱 눌러오는데 침 폭발한다.

놀란 눈으로 예은이를 바라봤다.

예은이는 웃더니 할매한테 쓱, 눈짓했다.

"엄청 맛있네요, 아주머니."

"뭘 맛있어. 잉, 마이 묵어. 잉."

그때 수현이가 눈이 동그래졌다.

"오빠! 손에 그거 뭐야?!"

"어?"

...아차, 씨발.

유지장갑 끼고 오는거 깜빡했다.

여자들도 내 손을 보더니 휘둥그래진다.

그렇겠지, 씨발. 날 본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없던걸 손에 그리고 나타났으니.

"아, 이거."

뭐라고 해야 되냐.

"잠이 안와서 심심하길래."

...몰라 씨발.

그냥 질러.

나도 못 믿을 거짓말이긴 한데, 이 이상은 내 머리론 못 짜내겠다.

그렇게 툭, 던지곤 청국장을 퍼먹었다.

으음, 개꿀맛.

수현이가 말했다.

"우와. 오빠. 무늬 처음 보는데. 이런 재주가 있었네? 오빠가 직접 한거야?"

...아니.

상태창이 내 손에다 이런 몹쓸짓을 해놨는데.

그 말은 못하지.

"엉."

"뭘로 했어? 지워져?"

수현이가 내 손을 탁, 잡더니 엄지 두개로 내 손등을 쓱쓱 문지른다.

"안 지워지네? 이거 문신은 아니잖아. 그치? 하루만에 어떻게 이렇게 해?"

예은이가 갸웃하더니 물었다.

"유성펜 같은걸로 하셨어요?"

...관심 갖지 말아줘...

난 어색하게 미소짓고는 끄덕였다.

"어."

예은이가 미소지었다.

"날개랑 고리예요? 엄청 예쁘네요. 소은이가 보면 되게 좋아할 것 같아요."

날개?

...불꽃이라고 생각했는데.

날개처럼 보이기도 하나보지?

...무슨 날개냐.

아무리 봐도 불꽃이다.

수현이가 말했다.

"잘했다, 오빠. 이쁘다. 나중에 나한테도 좀 해줘."

...제발 좀.

자꾸 이쁘다 이쁘다 하니까 뭐, 기분은 썩 나쁘지 않은데.

무늬가 확실히 기묘하면서 눈을 사로잡기는 해.

불꽃을 감싸고 있는 고리들이 겹쳐있는 그림, 뭐, 어디 화폭 같은데 그려놨으면 꽤나 사람들 발길 멈췄을 듯하다.

그게 내 손등이라서 문제지.

문신 싫다고 씨발.

손등에 이런거 해놓고 나타나서 문신 싫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그냥 얼버무리자.

난 손을 수현이한테서 빼고는 말했다.

"그래서, 마트는 어땠어?"

수현이가 웃고는 말했다.

"마트에 오빠, 사람들 엄청 많았어. 아까 오후에는 스무명 서른명 그랬는데, 아까 우리 가니까 무슨 마트 정상 영업 하는 날 같았다니까?"

"맞아요. 평일도 아니고 주말 같았어요."

...으음.

아침에 나왔다 들어간 사람들이 온 식구들 다 데리고 먹을거 가지러 나온거겠네.

인라인 사람들이 새로 나눠준 집들에서도 나왔을거고.

...내일부턴 점점 더 늘어날거다.

...마트, 일주일도 못 버티고 동나겠는데?

"마트 분위기는 좀 어땠어?"

예은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괜찮았어요. 간만에 사람들 많은데 가서 되게 좋았어요. 사람들도 서로 인사하고 웃기도 하고."

...으음...

웃기도 했다고?

수현이를 보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응. 진짜 그랬어. 고기 없네 그러면서 어떤 아줌마가 아쉬워 하니까, 앞에 가져갔던 사람이 한팩 나눠주더라. 되게 보기 좋았어."

그러며 웃는다.

...으음.

언듯 들으면 사이좋은 이웃끼리의 미담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고기가 이제 다 떨어지고 없다는 소리다.

겨우 하루이틀만에 마트 내 비축분이 동나버렸다.

아마 우리 하숙집 여자들이 요 며칠간 제일 많이 챙겨왔겠지만, 그러나 그렇다 해도 아직 우리도 부족하다.

여차하면 반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만큼 식량을 확보해놔야 돼.

사람들이 서로 만나 웃는다고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었어. 먼저 일어날게."

"오빠, 어디 가게?"

난 미소지었다.

"늘 하던거지 뭐. 금방 올거야."

수현이가 내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우웅, 조심해. 오빠."

할매가 질색했다.

"이이잉? 너는 여자애가 사람들 앞에서 남자 엉덩이를 그렇게 두드리고 그러면 쓰것냐. 넘사시럽게. 쯧쯧."

수현이가 혀를 쏙 내밀었다.

"요즘 그런 말 안 한다구요, 할머니."

요즘이고 그즘이고 몰라.

난 나간다.

"잘 먹었습니다."

"이잉, 그려. 댕겨와. 잉?"

아직 식사중인 사람들을 뒤로하고 난 옥탑방으로 돌아갔다.

리프팅 벨트와 검 두자루.

그리고 유지 장갑.

가자.

레이드 하러.

현재 정신력 56.

조금 더 쉬면 60 채우겠지만, 그냥 얼른 다녀오자. 가속 11회 정도면 충분하다.

난 곧장 도로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편의점을 지나 껍데기가 뜯긴 차를 지나치는데 시체냄새가 훅 올라온다.

...아.

오늘 인라인 사람들 불러다 저거 처리하려고 했었는데. 유튜브로 그런걸 본 바람에 하루를 그냥 날려버렸네.

됐어.

오늘 셋이서 두 번이나 철물점을 왕복해서 안에 있던거 거의 절반은 챙겨왔고, 이제 굳이 더 안가도 된다는게 중요하지.

시체야 내일 처리하면 돼.

5톤 트럭의 짐칸쪽으로 걸어가며 검을 뽑았다.

슈르릉-

도로로 통하는 도로쪽은 깨끗하다.

주차장 입구쪽은 깨끗하지 않다.

시체들.

정확히 27구가 저기에 흐트러져 쌓여 엎어져 있다.

...10마리당 1업이라...

젠장.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대놓고 걸어갔다.

저벅, 저벅.

너무 태연하게 걸어서 그런가.

시체 너머 서있는 좀비들이 반응을 안 한다.

"어이, 뭐하냐. 덤벼."

걸어가며 검으로 허공을 내리쳤다.

스웅!

종이가 시원하게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공기를 가르는건 이런 느낌이군.

"캬르륵?!"

좀비들의 대가리가 홱 돌아간다.

수많은 눈이 나를 향한다.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진다.

"크아아악! 캬아아아악!"

우르르 달려든다.

시체를 짓밟고, 걸려 넘어지고, 앞에 놈의 어깨를 붙잡고, 자기들끼리 부딪혀가며.

놈들이 달려왔다.

난 미소지었다.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먹이를 발견한 늑대 떼들처럼, 허공을 할퀴며 달려들던 좀비들.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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