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얼굴에 상처라니 무슨 소리야.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밑에 있다고요?"
"예, 선생님."
내가 주인집 문으로 걸어가자 수현이가 따라왔다.
수현이가 따라오자 예은이와 소은이도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그러자 새댁 아줌마와 훈이 아재도 우르르 따라온다.
할매도 뭔 일인가 싶은 얼굴로 일어난다.
...왜 다 오는건데.
...그냥 밥이나 먹지.
문을 열고 나가보니 돌담벽 너머 인라인 동호회 사람들이 보였다.
여자...셋?
남자들은 다 어디갔지?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열었다.
인라인 동호회 리더, 정은서와 두 여자들이 서 있었다.
정은서의 한쪽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고, 그 가운데 찍힌 듯한 상처엔 피가 맺혀있다.
...뭐 하면 저런 상처가 나지?
"무슨 일 있습니까?"
물었다.
정은서가 말했다.
"아, 성훈씨. 안녕하세요."
인사는 하면서도 얼굴은 다급하다.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저희쪽 남자 셋이 마트 앞에 붙잡혀 있거든요."
...내가 잘 못 들었나?
붙잡히다니?
"무슨 소립니까? 누가, 왜요?"
정은서 뒤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지금 사람들이 마트에 물건 없다고 난리치고 있어요. 우리한테 숨겨둔거 내놓으라고, 어떤 아줌마가 은서 언니 뺨을 때려서."
아줌마가?
...아아.
반지다.
반지 낀 손으로 후려쳐서 광대뼈가 찍힌거다.
그래서 피가 난거군.
마트에 물건이 없어서 난리를 친다라.
수현이 듣고있다 씩씩대며 말했다.
"아니, 마트에 뭐가 없으면 없는거지 왜 사람을 때리고 그런대요? 남자들은 왜 거기 붙잡혀 있는거예요?"
정은서가 말했다.
"저희가 지내는데가 어디냐고, 빨리 말하라고. 사람들이 우릴 에워싸고 붙잡을려고 하더라구요. 저희가 먹을걸 자기들보다 먼저 가져다 비축해뒀다고 생각하나봐요. 그래서 남자들이 사람들 막아서고, 우린 여기로 달려온거예요."
정은서 뒤에 있던 여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때리는 소리가 났었어요. 제 남친 좀 구해주세요."
......골치아프네.
인라인 동호회 여자 세 사람은 얼굴만 봐도 절박하다.
옆을 돌아봤다.
하숙집 사람들의 표정도 매우 안좋다.
...돌겠네 진짜.
한숨 푹 쉬고 몸을 돌렸다.
"기다려요. 검 갖고 올게."
옥탑방에 올라가서 리프팅 벨트에 검 두자루 무장해갖고 나오는데 할매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이구, 총각아. 거기 사람들 많다매. 혼자 가서 어쩔라고, 잉? 그냥 있어라. 잉?"
난 피식 웃었다.
"걱정 마세요."
난 수현이를 비롯한 여자들을 보며 말했다.
"집에 있어. 갔다 올게."
그러며 훈이 아재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아재는 따라오쇼.
훈이 아재는 긴장된 얼굴로 머뭇거리다 내 뒤를 따라왔다.
"갑시다."
인라인 여자들한테 말하자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얘들은 내가 마트에서 좀비들을 상대로 뭘 하는지 다 봤다.
훈이 아재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래서 아재는 날 따라 나설 수 있었을 것이고, 여자들은 표정이 밝아졌을거다.
하지만...
...아침 일찍 레이드를 갔다오는 바람에, 지금 가속 1회밖에 없단 말이지.
레이드 마친 시점에선 정신력 2였어, 씨발.
씻고 밥먹고 어쩌고 하다보니 5가 되긴 했는데, 1회 갖고 어떡하면 좋냐.
...아니야.
지금 상대하러 가는건 인간들이다.
좀비들이 아니라.
단숨에 세놈 쯤 모가지 썰어버리면 움찔하면서 겁먹겠지.
...쩝.
인간 짐승을 하도 썰어대다 보니 발상이 그냥 그 쪽으로 밖에 안 가네.
일단 가서 보자.
모가지 써는거야 뭐, 썰 때되면 썰면 되고.
골목을 걸어들어가는데 뒤에서 걸음소리와 인라인 소리가 저벅저벅 쿠르르 들려온다.
난 뒤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왜 그렇게 폭력적이 된 겁니까? 우리쪽 여자들 말로는 어제까진 분위기 좋았다면서요."
정은서가 난처한 얼굴로 한숨쉬었다.
"좀 욕심부린 사람들이 있었나봐요. 고기도 떨어지고 야채도 없고, 라면이나 휴지 같은건 진작에 싹쓸이 해갔으니까요. 이미 지난 밤에 동이 났어요."
정은서 뒤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뒤늦게 온 사람들이 왜 마트가 비었냐며 한탄하다가, 나중엔 마트 근처에 온 사람들한테 부탁하고 애걸하다가, 그리고는 화내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새벽녘에 구호물자 가지러 갔다가 마트가 텅 비었길래 보니까 그런 일들이 있었대요."
으음.
많이 갖고 오긴 우리가 제일 많이 갖고왔지.
지금 있는걸로도 일곱명이서 두세달은 너끈하다. 아기까지 여덟이지만, 아직 젖먹이니까.
"그래서요?"
정은서가 말했다.
"그래서 저희도 난감해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 입장에선 저희가 라면하고 갖다줬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우릴 붙잡고 남은거 더 없냐고, 좀 나눠 달라고..."
다른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한테 그렇게 말한다고 저희가 뭐 있나요. 마트에서 가져다 사람들 나눠주고 시체들 거두기 바빠서 저희꺼 따로 챙길 여유도 없었는데."
옆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그러다 해 뜰때 쯤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마트가 왜 비었냐면서... 자기들끼리 어제 먼저 와서 많이 가져갔느니 좀 내놓으라느니 시비를 걸기 시작하다가 결국 우리한테 그게 다 집중됐어요. 먹을거 나눠준 사람들이니까 분명히 더 뭐가 있을거라고요."
...참나...
쯧.
난 혀를 차곤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들한테 모여들었고, 남자들이 막아서는 와중에 당신들은 우리한테 온거고?"
"네, 맞아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갑시다. 얻어맞고 있는다니 얼른 가서 구해와야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쩝...
딱히 내가 이 사람들을 구해줘야 할 의무나 이유는 없다.
마트도 내 렙업하는 김에 우리 하숙집 사람들 가지라고 싹 쓸어놓은거고, 솔직히 내 입장에선 누가 가져가든 별로 상관 없다.
나야 뭐 가속 박고 아무 가게나 들이닥쳐서 대가리 찔러놓은 다음 냉장고 안에 있는거 꺼내 먹으면 되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나하곤 다르다.
오로지, 순수하게, 선한 마음으로, 이타심으로, 집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햇빛을 볼 수 있게 밖으로 꺼내줬다.
여섯명이서 시체 오십여 구를 모아다 태우는것도 말로 하니 간단해 보이지 보통 일이 아니었을거다.
무게만 해도 족히 2.5톤 이상이다.
완전히 녹초가 됐을걸.
그냥 자기들 좋자고 했던거면 굳이 시체들을 그렇게까지 치울 필요도 없고, 사람들 나눠줄 필요도 없고, 그냥 우리 하숙집이랑 나눠가졌으면 만사 편안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해줬는데, 결과가 이거다.
참, 씨발.
그냥 기분이 드러워.
내가 그 사람들을 어쩔건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가서 그 인간들 면상은 좀 봐야되겠다.
주차장을 지나 오징어 점포가 드러났다.
그리고, 세 사람이 엎어져 있는게 보였다.
인라인 남자들이다.
...진짜 개패듯 패놨구만.
"태영아!"
"오빠!"
인라인 여자들이 쿠르르 하며 남자들에게 달려가 얼싸안는다.
더러 울기도 한다.
난 주위를 둘러봤다.
...기운 다 빠져 보이는 할줌마 하나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데?
난 할줌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람들 다 어디갔습니까? 여기 모여 있었다면서요?"
할줌마가 힘빠진 얼굴로 날 올려다본다.
힘빠진게 아니네.
이런 눈, 본적 있다.
여럿이 남자들을 개패듯 패는걸 눈 앞에서 본거다.
약간 쇼크상태다.
할줌마가 말했다.
"...우유 대리점인지 뭔지... 거기로 다들 갔어요."
...쯧.
대리점에 뭐 없나 하고 우르르 갔다 이거지.
별 거 없는거 알면 마트로 다시 돌아올거다.
난 뒤돌아 여자들과 훈이 아재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 일단 하숙집에 데려가요. 옥탑방에 넣어놓고, 의약품 내가 갖다놓은거 많으니까 일단 치료부터 해."
"예, 서, 선생님."
훈이 아재와 정은서, 여자들이 훌쩍이며 남자들을 일으켰다.
인라인 남자들 안면이 거의 뭐...
눈도 제대로 못 뜨겠는데.
진짜 개 오지게 패놨네.
"쯧."
정은서가 이를 갈며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언니. 일단 가요. 네?"
다른 여자가 말하자 정은서가 눈을 질끈 감더니 남자들 어깨를 부축하고 일어섰다.
남자들 인라인도 박살났네.
여자들은 박살나 떨어져나간 인라인 바퀴 따위를 열심히 주워모아 남자들을 부축하고 걸어갔다.
"먼저 갈게요."
난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할줌마에게 말했다.
"...아줌마는 왜 여기에 있는겁니까?"
할줌마는 눈을 껌뻑껌뻑 하더니 숨을 들이켰다.
"아유... 저는 이제 됐어요... 이젠... 그냥..."
주섬주섬 일어난다.
"우리집에... 애들 다 지방에 내려가있는데... 김치도 이제 다 떨어졌을건데..."
그러며 몇걸음 걸어가다 몸을 굽혔다.
우욱, 우윽 하더니 우르르 토해낸다.
......돌겠네.
난 허리를 잡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숨을 내쉬었다.
할줌마한테 가서 팔을 붙잡았다.
"...갑시다."
이 아줌마, 놔두면 자살한다.
아닐 수도 있는데, 촉이다.
"...예? 어디를 가요... 집에 가야죠..."
"알았으니까 가자고."
팔을 잡고 질질 끌었다.
할줌마는 저항할 힘도 없는지 비틀비틀대다 이내 날 따라오기 시작했다.
...삭막하다.
우유 대리점에 쳐들어갔다는 인간들, 이 할줌마가 넋나가서 주저앉는걸 분명히 봤을거다.
그런데 그냥 놔두고 갔다.
옆에서 누가 뒤지든가 자살하든가는 알 바 아니라는 거겠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면 일단 나 살자고 보는게 사람이니 뭐,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슬슬 빡치려고 하는데...
짜증이 살살 올라오네...
하숙집에 돌아와보니 수현이가 나와있었다.
"어, 오빠. 인라인 사람들 내 방에 있어."
"네 방에?"
옥탑방에 눕혀놓으라고 했는데.
수현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응. 완전히 곤죽이 됐던데 계단을 어떻게 올라가겠어. 그냥 내 방에 두라고 했어. 여섯명이 들어가니까 꽉 차더라."
음.
계단.
힘들긴 하지.
수현이가 웃으며 내 엉덩이를 톡, 쳤다.
"내 옷이랑 오빠 방에 갖다놨어. 당분간 신세 좀 질게."
"어, 그래. 그런데..."
난 뒤를 힐끗 돌아봤다.
대문 밖에 할줌마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수현이 놀라며 물었다.
"누구셔?"
으음.
어떻게 설명해야 좋으냐.
할줌마를 보니...
...참, 뭐라고 표현을 못 하겠네.
생기를 잃은, 삶의 아무런 의욕이 없는 모습이다.
다시 수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살짝 고개를 저었다.
수현이는 별 말 하지 않았다.
단지 두어번 끄덕거리곤 웃으며 할줌마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였다.
"들어오세요. 밖에 덥죠?"
"...여기... 어디예요...? 집에... 가야하는데..."
...쯥...
난 수현이에게 살짝 숙여 속삭였다.
"이 분 데리고 옥탑방에 올라가 있어."
수현이가 할줌마와 나를 번갈아 보며 난처한 눈을 했다.
"오빠. 이제 어떡하려고? 집에 안그래도 사람 너무 많아. 어떡해?"
안 그래도 그건 오면서 생각해둔게 있다.
난 속삭였다.
"걱정 마. 생각이 있어. 훈이 아저씨는 어딨어?"
"아, 자기 집에. 애기 우는 소리 듣고 바로 들어가더라."
"그래. 올라가. 난 훈이 아재랑 얘기좀 할게."
"응."
수현이 할줌마 데리고 계단 올라가는걸 좀 보다가 훈이 아재네 집에 노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