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87)

내 행동엔 망설임이 없었다.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태연하고 재빠르다.

기습할 생각 같은건 없었지만, 기습한게 되어버렸다.

검을 뽑아 가슴을 찌르며 느긋하게 밀자 피가 슬쩍 배어나온다.

"흑."

갑작스럽다.

이 덩치 아재,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었다.

아재가 움찔하며 숨을 헛쉬더니 한 걸음 물러섰다.

나도 한 걸음 걸었다.

"...비키라고 했다."

검을 계속 들이밀었다.

아재는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숨을 심하게 들이키기 시작했다.

난 대문 앞에 서서 걸음을 멈췄다.

아재도 한걸음 더 물러서더니 숨을 헐떡이며 나를 노려본다.

아줌마도 놀랐고, 사람들도 놀랐다.

갑작스럽게 검을 내밀며 가슴을 찌를 거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다는 반응이다.

마치, 법치주의 국가에서 어찌 이런 일이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아직도 정신 못차린 눈빛.

법치주의 같은건 종말이 시작된 그 날 죽었다.

이 인간들은 아직도 그걸 모르나보지.

저런 눈은 하고있고.

아재는 가슴에서 배어나오는 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가 자기 손을 봤다가 그러고 있다.

엄청난 일을 당했다는 얼굴이다.

참 나, 놀고들 있네.

난 나직이 말했다.

"그래, 할 말이 뭐야? 왜 왔냐, 너희들."

"야!"

아재 옆에 있던 아줌마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니가 뭔데 사람을 찔러! 어?! 니가 뭔데! 너 뭐하는 놈이야! 어?!"

성큼성큼 걸어오며 삿대질을 한다.

삿대질...

손에... 반지가 있네?

정은서의 얼굴이 떠오른다.

"야! 이 새끼야! 칼 들면 다야?! 어? 여기 사람이 몇인줄이나 알아?! 어디서 양아치 새끼가 사람을 찌르고 있어!"

표독스러운건 아줌마 뿐이다.

피칠갑되어 칼들고 있는 사람한테 대놓고 지랄병할 수 있는건 이런, 뇌 빼놓고 다니는 멍청한 년 정도 뿐일거다.

난 고개를 들어봤다.

하숙집 맞은편에 인라인 여자들이 창가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두려운 얼굴이다.

여자들 중엔 정은서도 있었다.

난 아직도 개소릴 씨부리고 있는 아줌마를 칼로 겨누었다.

아줌마가 흠칫 하며 뒤로 물러선다.

난 정은서를 보며 말했다.

"뺨 때린게 이 아줌마야?"

정은서가 나와 아줌마를 번갈아 바라본다.

사람들이 우르르 맞은편 집을 바라봤다.

아줌마의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하며 표정이 변한다.

정은서를 알아 본 얼굴이다.

정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가 소리쳤다.

"야! 니가 잘못했으니까 맞은거 아니야! 그게 내 잘못이야? 어?! 왜 내 잘못이야! 니가 잘못해놓고!"

난 말했다.

"닥쳐."

동시에 검을 옆으로 그었다.

아줌마의 귀가 반으로 썰렸다.

핏-

핏방울이 옆으로 튀어오른다.

아줌마가 움찔 하더니 천천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자기 귀를 잡아본다.

자기 손을 들여다 본다.

피가 흥건하다.

아줌마의 살찐 얼굴이 파들파들 떨린다.

"피... 피가... 내... 내 귀..."

...이제 좀 조용하네.

난 정은서를 바라봤다.

다시, 아줌마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말했다.

"...뺨 때린 손, 잘라버릴까?"

정은서가 움찔하며 크게 놀라더니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

난 피식 웃었다.

"역시 좋은 사람이네. 뺨 맞고 용서해줄 줄도 알고."

그때 가슴을 찔렸던 아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소리질렀다.

"이 새끼가! 어디서 행패야 이 씨발놈이! 야, 이 개새끼야!"

난 검을 들어올렸다.

아재가 움찔하며 아가리를 닥쳤다.

난 말했다.

"행패는 니들이 남의 집 앞에서 한 게 행패지. 정신 나갔나."

검에 가슴을 살짝 찔린 아재는 숨을 헐떡이며 날 노려볼 뿐 말은 못했다.

말문이 턱 막혔다는 얼굴이다.

아줌마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자기 피를 내려다보고 있다.

요상한 신음을 흘리면서, 당장이라도 엎어져 아이고 하며 울어버릴 것같다.

난 말했다.

"다시 묻는다. 왜 왔냐, 너희들."

검은 내리지 않았다.

가슴 찔린 아재가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마트를 니들 몇사람이 뭉텅이로 쓸어갔으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내놔야 되는거 아니야. 맞잖아!"

아재는 뒤돌아보며 크게 말했다.

"다들 씨발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안그렇습니까! 이 씨발, 이걸 보세요. 내 마누라한테 해놓은 짓을! 나를 찌르고! 이 새끼들이!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 있습니까! 예?! 여러분!"

아줌마가 눈물이 그렁해서 날 노려보며 외쳤다.

"이 새끼야, 씨발새끼야! 너, 이러고 용서받을 수 있을 것같아! 어?! 야, 이 새끼야악!"

...더 크게 지르지 그러냐.

주변 좀비들 다 몰려들게.

...참 운 좋네.

아까부터 버럭버럭 해대는데 주변이 조용해.

단독주택 거리라 그런것도 있지만, 주변에 있는 것들을 내가 몰살시켜놔서 거리쪽에선 여기로 올 놈들이 없다.

젠장.

좀 남겨둘걸 그랬나.

아재가 외쳤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났는데! 안그렇습니까! 우리는 살아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양아치들이 마트를 휩쓸어 가놓고는 오히려 칼부림을 하고 있어요!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예?! 여러분!"

보아하니 사람들이 아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표정이 점점 변한다.

굶고있다, 라는 현실을 자각한 모양이다.

난 피식 웃었다.

"놀고 자빠졌네, 씨발. 어이가 없어서."

아재가 날 홱 돌아본다.

표정이 제법 사나운데.

사람들 선동해서 나한테 달려들려고 하나보지.

...그래보든가.

난 피식거리며 웃었다.

"먹을게 필요해? 동네에 널린게 편의점이야, 병신새끼들아. 거긴 놔두고 마트 하나에 매달려서 먹을거 없다고 징징거려?"

난 사람들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니들이 여기 왜 왔는줄 아냐? 말해줄까? 마트를 누가 깨끗하게 치워놨기 때문에 저 인라인 동호회가 니들한테 라면 한봉지라도 갖다줄 수 있었어. 오십마리가 넘는 놈들을 누가 다 죽여놨지. 바로 내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피식 웃음이 나온다.

"집구석에 처박혀서 밖에 나오지도 못하는, 니들같은 쓰레기들을 저 사람들이 먹을거 주고 마트로 안내까지 해줬지. 그런데 은혜도 모르고 사람을 겁박하고 패기까지 해? 남의 집 앞까지 쳐들어와서 고래고래 소리는 지르고 있고?"

한걸음을 걸어갔다.

웃었다.

"니들이 직접 편의점을 털어. 안에 있는 놈들을 죽여. 그런데 못하지. 쫄리니까. 그래서 남이 해놓은 것만 내놓으라고 땡깡부리는거야. 마치 니들한테 무슨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검을 내밀었다.

"그딴 권리같은거 없어. 너희를 도운 사람들한테 손찌검 한 시점에서 너희들은 라면 하나 받을 자격도 없는거야."

검이 슬쩍 닿으려고 하자 아재가 다시 물러선다.

사람들이 흠칫하며 슬쩍 물러선다.

이미 내 칼에 베인 아줌마도 아가리를 닥치고 말을 못한다.

난 말했다.

"스스로 편의점 하나 털 생각도 못 하는 주제에 몰려와갖고 니들 도운 사람들보고 물건 내놓으라고 소리나 지르고 있고, 니들이 사람새끼냐? 음식물 쓰레기에 모여드는 바퀴벌레같은 새끼들이."

...그거 괜찮네.

이 생존자 그룹의 이름, 앞으로는 바퀴벌레들이라고 부르자.

한 걸음을 더 걸었다.

아재가 한 걸음을 더 물러섰다.

난 미소지었다.

"니들은 바퀴벌레들이다."

사람들은 숨을 몰아쉬며 나를 보고있을 뿐이다.

더러는 두려워하고, 더러는 반항끼 어린 얼굴을 하고 있으며, 더러는 긴장하고 있다.

공통적으로, 눈빛 참 좆같다.

난 말했다.

"꺼져, 바퀴벌레 새끼들아. 눈에 띄면 하나 하나 모가지 썰어버린다."

사람들은 흠칫거리며 조금씩 물러설 뿐, 돌아가려 하지는 않았다.

난 다시 바퀴벌레들에게 걸음을 옮겼다.

"난 이미 저 좀비들 수백마리를 사냥했어. 니들같은 양아치들도 몇마리 썰어죽였지. 이 바퀴벌레들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놈들은 서서히 물러나다 이제 뒤로 걷고 있었다.

나는 걸었고, 놈들도 걸었다.

몇 걸음 되지 않아, 바퀴벌레들이 숨을 몰아쉬며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난 말했다.

"...다시 눈 앞에 나타나면, 니들 하나 하나 사냥해버린다. 두번 다시 눈에 띄지 마라."

우르르.

바퀴벌레들이 걸어간다.

가슴 찔린 아재도, 귀 썰린 아줌마도.

표독스런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며.

놈들은 돌아갔다.

놈들이 골목을 꺾어 우르르 걸어가는걸 끝까지 본 이후에야 나는 검을 거두었다.

스웅!

검을 허공에 내리치자 슬쩍 묻었던 핏방울이 떨어져 나간다.

돌담벽에 핏자국이 생겼다.

검을 집어넣고 돌아섰다.

스릉-착.

두 집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새 집에서 나와 베란다와 계단 난간 따위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 얼굴은...

살짝 미소짓는 여자도 있고 안심된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도 있다. 소은이는 아직 무섭나보다.

다들 어디 다친덴 없나본데.

난 집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배고프다. 어제 하루종일 과자 부스러기 밖에 못 먹었어. 뭐 없어?"

미소짓고 있던 수현이가 말했다.

"라면 끓여줄까?"

"라면 좋지. 일단 좀 씻고."

집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수현이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려 준다.

난 피식 웃었다.

"피 묻는다."

"괜찮아. 씻으면 되지. 가자 오빠."

수현이가 내 방까지 따라온다.

으음.

여자들이 보고있는데도.

이젠 뭐 거칠것이 없구만.

같이 벗고 들어가 샤워했다.

핏물을 쫙 빼내고나니 수현이가 무릎 꿇고 입으로 해주는데 묘하게 적극적이다.

방금 있었던 일에 꽤나 감명을 받았나보다.

다 씻고 아랫층으로 내려가니 예은이가 호다닥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라면 끓여드릴게요."

"아, 고마워."

주인집엔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할매, 소은이, 훈이 아재 내외, 그리고 인라인 여자들과 간호사 할줌마.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분위기가 좀 묘한데.

눈빛에 신뢰가 들어있다.

...좀 부담스럽다.

할매가 내 손을 잡더니 팔을 쓰다듬으며 당겼다.

"앉아라, 총각아. 아이고, 고생했다. 잉?"

"아, 예."

"시상에, 그 나쁜 놈들이 넘에 집에 와가꼬 법석을 떨고 참, 우째 사람들이 그럴꼬. 잉? 총각 읎었으면 우쩔뻔 했으까."

훈이 아재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그러니까 이사가야죠. 우리 선생님이 가자고 말씀하시면 미련없이 가십시다. 예?"

할매는 혀를 찼다.

"이잉... 쯧. 가는거야 가는거지. 참, 집도... 남편이랑 오래 살았는디. 사람들이 참 나쁘다니까. 세상에 사람만큼 무서운게 읎어. 잉."

정은서가 말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정말 큰일 나는줄 알았어요."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남자들은 좀 어때요? 괜찮아?"

"네. 어제보단 훨씬 좋아졌어요. 뼈가 부러지거나 그러진 않았나봐요."

"음. 다행이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사하는거 말인데, 지금 윗층부터 정리하고 있어요. 아마 며칠 걸릴겁니다."

난 훈이 아재와 정은서를 보며 말했다.

"그동안 밖에 널려있는 죽은 사람들을 좀 모아다 태워버렸으면 좋겠거든요. 저거 그대로 놔두면 전염병 돌 수도 있고."

할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에요. 전염병 아니라 박테리아나 곰팡이 같은것도 위험해요. 지금은 병원에 갈 수도 없으니 병에 걸리지 않게 예방하는게 제일 좋아요."

...오오.

할줌마, 제법 정신 차렸는데?

확실하다.

이 할줌마,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스스로 기운 차리는 종류의 그런 사람이다. 인라인 사람들처럼.

부상자들 간호하다보니 기운이 생긴거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시체를 있다 같이 처리하는걸로 하죠."

훈이 아재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러면 차 뜯어내는건 어쩝니까? 계속 뜯어냅니까?"

난 내 옆에 앉은 수현이를 돌아봤다.

"뜯어내야겠지?"

수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루미늄은 쓸데가 많아요. 그것 때문에 얘기하고 싶은게 있는데."

사람들이 수현이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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