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첫날부터 미친듯이 달리고 좀비들을 매일 죽이고 다녔더니 체력이 확실히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이정도 달린걸론 그리 숨차지 않네.
......뭔가 있는데?
난 편의점 너머 도로로 들어갔다.
잘 안보인다.
차 위로 올라갔다.
털컹, 터억.
지붕을 밟고 멀리 바라봤다.
멀리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다.
보니까...
제법 자세가 잡혔는데?
대부분 남자들이고, 손에 뭘 들고있다.
야구방망이에 렌치 따위인 것 같은데.
...아.
편의점을 털고있는거다.
한 놈이 뛰어나온다.
좀비들 몇이 놈을 쫓는다.
남자들이 좀비들에게 달려든다.
손에 든걸 휘두른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좀비 셋을 두드려 패고 있다.
오오...
잠깐만.
수십명이라고?
남자만 수십...
일 리가 없는데?
...아아.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낸거다.
세력을 늘리고 있는거다.
좀 싸울 줄 아는 놈들이 모여 조직적으로 식량을 구하고 있다.
큰 소리만 내지 않으면 좀비들이 사방에서 달려들 일은 없으니, 그것만 주의하면 저렇게도 할 수 있지.
그나저나, 제법 단련되었는데.
요전엔 한 놈이 물려서 아군한테 얻어맞고 죽은 것 같더만. 이후로도 계속 털고 다녔나보지?
아아, 그럴 수밖에.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려면 먹을걸 줘야 된다. 그리고 자기들이 먹을것도 필요해.
저기 있는게 남자만 수십명인걸 보면 여자들, 노인들, 아이들까지 합치면 대충 백여명은 될거다.
편의점 하나만큼이라고 해도 오래 못 버티지.
우리야 몇명 안되니 지금 있는 걸로도 충분히 먹고 산다. 전투원이 나 하나라서 소수라도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저 놈들은 다르다.
편의점 하나분, 겨우 두셋의 좀비을 처리할 때도 두자릿수의, 체격이 좀 있는 남자가 필요하다.
자칫하다 손가락이라도 물리는 날엔, 이빨이 스쳐 피라도 한 방울 나는 날엔 그대로 아군에게 처맞고 뒤질테니까.
물리기 전에 사방에서 두드려 순식간에 제압해야 된다.
그럴려면 인원이 많아야 한다. 그러나, 인원이 많아질수록 필요한 물자도 많아진다.
결국 끝없이 약탈할 수밖에 없다.
그런 방식을 채택했구만.
뭐, 나처럼 혼자 수십마리씩 죽일 수 있는 놈이 없으면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
난 피식 웃고는 차에서 내려왔다.
바퀴벌레들이야 바퀴벌레들만의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거다.
저 놈들은 그냥 저러고 살라고 두면 돼.
어쩌다 아군이 물리면 얼마나 친하든, 형제였든, 아버지였든, 아들이었든 패죽여 가면서 말이지.
내가 알 바 아니다.
편의점을 지나 하숙집 골목으로 들어갔다.
음?
......골목길 끄트머리 슈퍼.
슈퍼 앞 전봇대.
저기서 뭐가 보인 것 같은데?
사람 그림자 아니었나?
난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며 골목을 슬슬 걸어들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자 뭐가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맞네.
뭐지?
...정탐하러 온건가?
무슨 꿍꿍이지?
난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제대로 웃음이 나와 큭큭거리며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염탐하러 왔다라...
와서 뭐할건데.
시비걸려고?
제발 부탁인데 와줘라.
아주 기쁜 마음으로 모가지 썰어주게.
난 웃으며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놈들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 그룹에서도 내가 하는걸 직접 본건 훈이 아재와 정은서 정도 뿐이다.
심지어 똥내도 스스로 갇혀있느라 내가 다 죽이는걸 못봤어.
...흐음...
...내일쯤 보여줄까?
도둑놈처럼 염탐까지 할 정도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건데, 나 없는 새에 하숙집 들이닥쳐 해꼬지라도 하면 귀찮아져.
마트 입구에 얼마나 남았지?
한 스무마리쯤 남은 것 같은데.
슬슬 이사가자.
* * *
씻고 누워 상태창을 바라봤다.
레벨 31, 체력 54.
항상 꼭 1점이 모자라네.
정신 17이니, 대충 오전까지 푹 쉬면 최대로 충전되겠다.
아침 7시.
씻고 아랫층으로 내려가니 식사준비가 한창이다.
똥내, 아니, 한태도 와있네.
으음, 밥은 놓치지 않는다는 의지가 몸매로 드러나있는 녀석이긴 하다.
"한태야."
"네, 형."
"밥먹고 가서 형들이랑 누나들보고 이사준비 하라고 해."
훈이 아재와 여자들이 날 우르르 돌아본다.
난 미소지었다.
"슬슬 가야지. 밥먹고 다들 짐 싸."
수현이가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난 한 열흘 걸릴 줄 알았어."
"무슨 열흘이나 걸리겠냐. 아, 그렇지. 공구는 다 챙겨야 될거야. 주거층에 집들은 아직 못봤거든. 빈집도 있을거고 아닌 집도 있을건데, 그건 오늘 다 같이 가서 보자."
종말이 터진건 대낮이다.
단독가구는 출근해 빈집으로 남았을테고, 입주자가 들어오지 않은 집도 아마 있을거다.
게다가 마트 입구에 수십명이 늘어나 있었다.
주거층에서 내려와 그대로 당해버린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주거층에 빈집이 확실히 많을거다. 우리 그룹 사람들 정도는 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을거라고 본다.
수현이와 훈이 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다른건 없어요?"
음... 다른거라.
잠깐 생각해보고는 말했다.
"마트 입구를 오늘 쓸어놓을건데, 밖에서 못 들어오게 틀어막아 놔야돼. 마트 안쪽은 천천히 정리해도, 입구가 열려있으면 아마 누가 계단으로 올라올려고 들면 올라올 수 있을거야."
수현이가 훈이 아재와 눈빛을 교환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 모아놓은 알루미늄 판들 아저씨가 옮겨놓으시면 제가 용접해둘게요."
한태가 놀라며 물었다.
"누, 누나가 용접도 하세요?"
훈이 아재도 수현이를 돌아봤다.
"그러고보니. 학교에서 배운겁니까?"
수현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집 고물상이야. 어릴때부터 아빠 따라 기계도 만지고 용접도 배우고 그랬어. 그러다 흥미 생겨서 기계공학과로 들어간거고."
난 미소지었다.
"호오. 여자가 기공과 같은거 잘 안가지 않나 싶었는데 그래서였구만. 거기 너 말고 여자 또 있었어?"
"여자가 아예 없어. 나 혼자 홍일점이었다니까? 전기과도 여자 하나, 기공과도 여자 하나."
난 피식 웃었다.
"인기 많았겠는데?"
수현이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곤 말했다.
"아이고, 됐네요. 한번 사겨본걸로 됐어. 난 그냥 게임이나 하고 사는게 좋아."
그러곤 한숨을 포옥 내쉰다.
"와우하고싶다."
으음.
접는게 아니라 쉬는 거랬던가.
그 게임은.
해본적이 없으니 모른다만, 저러는걸 보면 꽤 재미있었나보지.
아침식사 후 각자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차에서 뜯어 모아놓은 알루미늄 판 여러개를 노끈으로 묶고 각자 살림살이들을 챙기고 하느라 어느새 점심때가 가까워졌다.
"아이구, 어머니. 그, 젓가락하고 그런거 다 갖고 갈 필요 없다니까요. 저 마트 안에 다 있어요. 냄비랑 후라이팬이랑."
훈이 아재가 달래며 할매를 설득한다.
그 말 그대로다.
쇠붙이나 금속 도구들은 마트에서 구할 수 있고, 관리만 잘 하면 반영구적으로도 쓸 수 있다.
문제는 소모품이지.
쓰고 나면 다시 구하기 빡세니까.
먹을것과 휴지 따위의 소모품 위주로 한보따리씩 챙기고 나자 이사준비가 끝났다.
별로 짐이 없었던 인라인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주니 훨씬 낫다.
인라인 남자들은 아직도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꽤나 호전된 모양이다.
눈빛이 살아있다.
"좀 어때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리 주십쇼. 제가 들겠습니다."
내가 멘 아디다스 백팩에 손을 내민다.
난 웃으며 가방을 건넸다.
어차피 마트 입구를 정리할려면 빈몸이 낫지.
먹을것과 휴지로만 거의 가득 채운 가방과 보따리 열세개. 그리고 훈이 아재가 들 공구가 든 무거운 가방 하나.
사람들 인원수에 맞게 채워놓은 가방을 각자 든 채 집을 나섰다.
빈 몸인건 나 뿐이다.
난 집앞에서 슈퍼쪽 전봇대를 바라봤다.
사람은 없어보인다.
염탐하는 놈도 점심은 먹어야 되겠지.
"갑시다."
난 검 두자루를 허리에 차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여기서 기다려요."
도로 한복판에서 그렇게 말했다.
텅 비어 있는 인도로 이 많은 인원이 한번에 들어가면 좀비들이 아무리 눈이 안좋아도 발각당할거다.
도로로 들어가 차와 차 사이를 걸어 대형마트 앞에 도달해 사람들을 대기시켰다.
사람들이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다들 꼼짝도 않고 나를 보고있다.
긴장되는 얼굴이 대부분이다.
할매와 소은이, 새댁 유부녀는 눈꼬리와 입꼬리가 내려가 있어 정말 두려워하고 있다는게 보였다.
괜히 나왔다 싶은 얼굴이다.
도로에 군데군데 차들이 막혀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나고 고요하면 확실히 무서울 만 하다.
게다가 건너편 인도 쪽으로 내가 죽여놓은 시체들이 엎어져 있고 말이지.
"내가 오라고 하면 오면 됩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난 천천히 일어서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뭐 없나.
...아무것도 없다.
바퀴벌레들도, 좀비도.
그저 고요하다.
난 검을 뽑았다.
스르릉-
"흐윽."
할매가 무서운지 소리를 냈다.
예은이가 옆에서 할매를 다독여준다.
한 손으론 소은이의 손을 잡고있다.
예은이가 고생하네.
톡톡.
수현이가 내 엉덩이를 두드린다.
"조심해요. 잘 다녀와."
"그래."
미소짓고는 차의 헤드라이트를 잡고 앞으로 걸었다.
걸었다, 걷는다.
뜀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그리고, 질주했다.
"크르륽?!"
유리벽 너머에서 대가리들이 홱홱 돌아간다.
자그락!
박살난 유리가 밟힌다.
계단을 밟고 옆문으로 힘껏 뛰어올랐다.
"크아아악! 캬아아악!"
놈들이 의자와 시체들을 넘어 내게로 뛰어들어왔다.
"으아으!"
멀리서 들려오는 탄성.
훈이 아재, 여전히 겁쟁이네.
"크아아악!"
놈들의 손이 허공을 할퀸다.
온다.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힘껏 내딛었다.
두----
"흡!"
파각, 파각!
단숨에 빼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찔렀다.
파각, 파각!
핏방울이 사방으로 일렁거리며 오른다.
기묘한 형태의 마네킹 사이를 누비는 느낌이다.
급격히 재생되는 동영상처럼 세상이 움직일라 치면, 가속.
파각, 파각, 파각, 파각!
퇴각도 은신도 없다.
완전히 쓸어버리려 온 탓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파각!
찌르고, 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