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87)

뒤돌아보지 않는다.

머리 찔린 놈들이 내 오른쪽에 우르르 서서 이마와 뒤통수로 피를 내뿜으며 허공을 유영하고 있다.

내 뒤에 머리가 뚫린 놈들이 서서히 무너져 내려간다.

파각, 파각, 파각!

가속을 박아가며, 마트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모든 좀비의 대가리를 뚫어놨다.

파각!

"흡!"

검을 뽑고, 주위를 둘러봤다.

남은 놈이 있나.

아니, 없다.

"--끄-르륽!"

우르르, 와당탕!

주위에 있던 놈들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사방으로 피가 튀어오른다.

얼굴에, 입술에, 몸에 피가 묻어난다.

온 몸이 피에 젖었다.

[레벨이 2 올랐습니다.]

죽인 놈, 23마리.

사용한 가속, 6회.

좀 더 빨랐다면 가속 5회로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만, 아직 그정도는 아니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는걸.

그건 가속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숙련도 문제다.

난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처리 못한 놈이 근처에 있지는 않는가.

으르렁은 들려온다.

그러나 근처는 아니다.

입구는 확실히 정리했다.

대형 마트 출입구는 커다란 유리벽과 유리문이었다. 그러나 입식 간판과 할인 포스터 따위가 덕지덕지 붙어있어 내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포스터 사이사이로 넓은 매장과 잔뜩 진열된 상품들이 언듯 비칠 뿐이다.

물론, 좀비들도.

저긴 아직 아니야.

난 몸을 돌리며 검을 내리쳤다.

스웅!

촤악!

피가 떨어져나가 벽에 주르륵 묻어난다.

"......"

으음...

그러고보니, 여기.

그냥 통유리벽이었지.

차 너머에 고개들이 빼꼼빼꼼 나와있다.

우리 그룹 사람들이 거의 넋을 놓고 나를 보고있다.

훈이 아재와 정은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눈빛이...

뭐라고 딱히 설명할 말이 없네.

저런 눈빛은 처음 본다.

난 어깨를 으쓱 하고는 박살난 유리문 너머로 걸어 나왔다.

"이제 와도 돼."

사람들이 일어서서 내게 다가온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스르릉- 착.

이름 모르는 인라인 남자가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진짜 소름돋네요."

정은서가 남자를 팔꿈치로 툭, 친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굉장한 사람이 있다고. 마트 안에 시체 그렇게 많은거 보고도 몰랐어?"

"이런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이런거?

수현이가 내게 다가와 폰을 내밀었다.

이 녀석, 카메라로 찍고 있었나보다.

내가 보인다.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좀비들이 손을 쳐들며 내게 뛰어간다.

그리고, 나는 사라졌다.

거의 잔상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찌를 때만 희끗하고 보이곤 다시 사라져, 순식간에 스물 몇마리의 머리를 죄다 찔러버린다.

내게 달려들던 놈들은 그 속도 그대로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우르르 쓰러져버렸다.

...무슨 SF 영화같네.

이러고 싸운단 말이지, 내가...

수현이가 눈이 동그래갖고 날 보고있다.

"오빠. 어떻게 이렇게 움직여? 진짜 소드마스터야?"

인라인 남자들도 묻는다.

"검을 오래 수련하셨나봐요. 몇단이십니까?"

"얼마나 단련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으음...

검 같은거 수련한적 없는데.

근데 이거, 아무리 봐도 인간이 보일 만한 속도가 아닌데 그 부분은 의심을 안 하네.

무슨 능력이 있을거라곤 미처 생각을 못하는 건가.

하긴, 나같아도 누가 묘한 능력이 있다 그러면 일단 못 믿겠다.

극한으로 수련한 사람이라 보일 수 있는, 묘기에 가까운 실력, 뭐 그렇게들 인식하는 모양이다.

난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안좋아. 일단 올라가자."

몸을 돌려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계단...

입구를 다 쓸어놨으니 굳이 계단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

사람들을 데리고 입구를 지나 복도 옆 엘리베이터로 갔다.

두 개의 엘리베이터.

둘 다 1층에서 멈춰있다.

위에 있던 사람들이 내려왔던 탓일거다.

"꼭대기로 가자."

우린 엘리베이터에 각자 나눠타고 10층으로 올라갔다.

띵.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나도 내려서 말했다.

"일단 짐 내려놓고, 여기서부터 갈라지자. 훈이 아저씨하고 남자들은 하숙집 돌아가서 알루미늄 판 갖고 와요. 여자들은 수현이가 저걸로 문 따는거 좀 도와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눈빛이고 행동거지고, 거의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따르겠다는 태도가 묻어난다.

난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남자들에게 말했다.

"뭐 있으면 그냥 놓고 도망쳐. 곧장 여기로 와요. 알았지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지금이 가장 취약하다.

바퀴벌레들이 지금 하숙집에 나타나서 해꼬지하면 저 몇명 안되는 남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릴거다.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으음.

난 새댁 아줌마에게 손짓해 창가에 세웠다.

"여기서 하숙집이 보일겁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곧장 알려주세요."

남편 보내고 걱정하던 얼굴의 새댁 아줌마가 나를 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고 있을게요."

난 뒤돌아 말했다.

"자, 이제 문 따자."

수현이는 이미 절단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악동처럼 씩 미소지었다.

여자들이 수현이를 졸졸 따라 바로 앞집으로 갔다.

여기, 원룸 혹은 투룸으로 된 임대주택층인것 같은데. 문들이 늘어서 있는걸 보니 딱 그런 느낌이다.

딩동-

초인종을 누른다.

반응이 없다.

다시 누른다.

역시 반응이 없다.

수현이가 나를 본다.

난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 그녀도 끄덕이곤, 절단기를 들고 문 손잡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문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초인종에 반응이 없다는게 아무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도 없어야 아무도 없는거다.

뭔가가 와라락 닥쳐오면 이 여자들은 속수무책이다.

뭐가 오면, 내가 죽인다.

5분여가 지나자 문 손잡이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수현이가 펜치로 열린 손잡이를 뭐 어떻게 하니 철컥, 하고 잠금이 열렸다.

난 손잡이를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가 문을 연다.

문은 조용히 열렸다.

남의 집 냄새가 후욱 몰려든다.

희미한 향수냄새.

혹은 섬유유연제 냄새.

깔끔한 성격의 여자가 쓰던 방인 것 같다.

분홍색 조그만 카펫과 퀸사이즈 침대가 보인다.

방이...

꽤 넓네.

15평? 혹은 그 이상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 욕실과 베란다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리곤 뒤돌아 말했다.

"들어와. 아무도 없어."

여자들이 안심한 얼굴로 우르르 들어왔다.

마치 자기가 살 것처럼 집구경을 한다.

표정이 엄청 밝은데.

근데, 누가 쓸건데?

이 여자들, 좋은 얼굴로 집을 보고 있지만, 마음에 드는 집 발견하면 웬지 기싸움 할 것 같은걸.

"우와... 햇빛 여기 진짜 잘 들어온다."

"언니, 이거 봐요. 전자피아노 있어."

...틀림없다.

얘들 기싸움한다.

난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제 겨우 한 집이야. 아랫층까지도 다 열어봐야돼."

수현이도 집구경을 하다 내 말을 듣곤 밖으로 나섰다.

"가요, 언니. 소은아."

둘째, 셋째 집도 비어있었다.

그리고 넷째 집.

수현이가 문을 열자, 훅, 하고 익숙한 냄새가 났다.

...시체냄새다.

난 검을 움켜쥐고 집 안을 들여다봤다.

...할아버지다.

...고독사 한건가?

아니야.

...자살했다.

보니까 스스로 손목을 그었네.

옆으로 누워있어서 못봤다.

죽은지 꽤 됐는데...

"...후우..."

난 한숨을 쉬곤 여자들을 돌아봤다.

예은이와 소은이는 이미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다.

수현이도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다.

그나마 간호사 할줌마가 안쓰럽다는 듯이 혀를 차고 있는데, 이 할줌마 바짝 말라서 힘은 못 쓰겠다.

몸에 거의 근육이 없다시피 하니...

...쯧.

...시체 치울려면 남자들이 와야겠는데.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일단 놔두고 다 열어보자. 사람들 나눠지낼려면 어차피 방은 충분히 확보해놔야 돼."

수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수현이가 문을 따는동안 남자들은 알루미늄판을 열심히 옮겨 엘리베이터 앞에 놔두고, 더 많은 알루미늄판을 구하기 위해 차를 뜯으러 나갔다.

새 집, 새 보금자리다.

완전한 요새화가 이뤄져야 될거다.

건물을 보강할 자재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굳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작업하러 나간걸 보면 확실히 일머리는 있는 사람들이다.

임대주택층, 10층은 왼쪽 20가구, 오른쪽 20가구로 이뤄져 있었다.

열어놓은 집은 어느새 여자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 들어갔다.

할매와 예은이, 소은이, 유부녀가 점심을 만든다고 들어가 김치볶음밥을 만들어다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요리솜씨는 진짜 어디 안 간다.

개꿀맛으로 퍼먹고 문을 여는 작업을 계속했다.

집들은 비어있었다.

고독사한듯, 자살한듯한 할배를 제외하곤 누가 들어있는 집이 없다.

임대나가지 않은 집, 종말 터지기 전에 출근한 집, 그리고 종말 이후 음식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당해버린 집들이 겹치고 겹쳐 층 자체가 텅 비어버린 것같다.

게다가 신발이며 옷장에 옷들이며, 1인가구가 대부분이다.

10층의 마지막 집.

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음?

뭔가 바스락 소리가 들렸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수현이와 할줌마, 정은서의 얼굴도 변했다.

40가구를 열면서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건 처음이다.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조용하다.

분명히 소리가 들렸는데.

난 노크하며 말했다.

"안에 누구 있습니까?"

바스락.

저벅.

조심스러운 소리.

그리고, 조용해졌다.

난 다시 노크했다.

"있으면 열어보세요. 먹을거 드릴게요."

스슥.

발을 끄는 소리 같은데.

몹시 조심하는 소리다.

게다가 가까이 들린다.

문 앞까지 왔나보다.

난 말했다.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옆집에... 이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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