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홀라당 벗고 샤워물을 쫙 맞으니 세상 개운하다.
핏물이 쫙 씻겨 내려가는게 상쾌해질 정도다.
이 집 주인은 바디샴푸 좋은거 쓰네.
일본제 같은데?
샴푸한 다음 샤워타올에 거품 내서 몸에 쓱쓱 문지르곤, 샤워기로 거품을 쫙 씻어냈다.
오우, 개운해.
"하아..."
거울을 보니...흠.
몸매 꽤 괜찮은데?
수주일간 활동량이 많아서인지, 복근이 생겼다.
힘주니 더 선명해지네.
살은 빠졌고, 근육량은 늘었다.
확실해.
웬지 즐거운 기분이 든다.
이대로 나가서 자고있는 수현이를 뒤에서 안고 좀 괴롭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아랫도리가 불끈불끈 일어선다.
난 피식 웃었다.
방금 실컷 칼질하고 와서 여자를 안을 생각을 하고 있고. 남자는 확실히 짐승은 짐승이다.
그때 샤워실 문이 열렸다.
"응, 누구...?"
"...어?"
문을 연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동시에 굳어버렸다.
예은이였다.
예은이는 내 얼굴을, 내 몸을, 그리고 내 아랫도리를 보더니 눈이 둥그래졌다.
그리곤 문을 곧장 닫았다.
콰당!
"으아, 죄, 죄송해요!"
...이게 무슨 일이다냐.
이 집 아니었어?
...아!
1023호였다!
옆집이었어!
젠장, 집을 착각하고 들어와버렸다.
잠금장치가 없으니 이건 뭐...
당황스럽네.
난 서둘러 벽장에서 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아내곤 피묻은 옷을 들고 나왔다.
예은이가 어쩔 줄 모르고 욕실 앞에 서 있었다.
...뭐라고 해야되냐.
"미안. 옆집이었네."
"아, 아뇨."
으음...
난 나체다.
피 젖은 옷으로 아랫도리만 가리고 있다.
난처하다.
난 바닥에 검과 리프팅 벨트를 집어들곤 미소지었다.
"난... 갈게."
"네... 네."
예은이는 완전히 얼굴이 빨개져 있다.
으음...
이 상황에 할 말도 없고.
가자.
난 슬쩍 나와 옆집으로 들어갔다.
...아.
여기다.
확실하다.
수현이가 쓰는 바디샴푸 냄새가 난다.
게다가, 뭔가 거뭇하게 컴퓨터같은 형체가 멀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난 소리나지 않게 옷과 검을 내려놓곤 다시 샤워실로 들어가 피를 닦아냈다.
...방금 그건 꽤나 난처했어.
잘 기억해야지.
예은이였으니 망정이지 할매였으면 어쩔 뻔했냐.
...아니, 예은이라서 다행이었던건 아니고.
몰라 씨발.
당황해서인지 꼬츄도 푹 죽어버렸다.
잠이나 자자.
난 물기를 닦아내곤 침대로 갔다.
옆에 눕자 수현이가 칭얼대며 중얼거렸다.
"으웅... 오빠야...?"
"어어. 나야."
부스럭거리며 내 쪽으로 돌아눕는다.
그리곤 내 품에 안겨온다.
"...수고했...어요..."
잠에 완전히 취했네.
으음...
나도 자자.
이튿날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난 일어났다.
부스스한 얼굴로 세수만 대충 하고 수현이가 끓인 라면을 같이 먹었다.
그러고보니, 이젠 밥을 다 함께 먹지 않는구만.
하숙집에서 다같이 모여 먹었던게 웬지 그리운걸.
"오빠, 마트는 어땠어? 너무 위험하고 그러진 않아?"
"괜찮아. 1층은 뭐 오늘까진 어떻게 되겠다."
수현이가 미소지었다.
"그럼 먹을것도 많이 생기겠네."
난 피식 웃었다.
"생선이나 고기 같은건 그냥 버리는게 낫겠더라. 아직 먹을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뭐."
"흐응... 아쉽네. 고기 쟁여놓으면 좋은데. 그래두 쓸만한건 챙겨 놓을게."
아, 맞아.
튀면서 봤던거 있었지.
"거기 그거 있더라. 과일이랑 야채 씨앗들. 요런, 손바닥만한 포장지에 담아서 천원 이천원에 파는거 있잫아."
수현이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할머니가 좋아하겠다. 예은이랑 소은이도 농사 얘기 하던데."
...으음, 예은이.
난 미소짓고는 라면을 퍼먹었다.
할 말이 없네.
밥 먹고 늑장부리며 여유부린 끝에, 오후 네시 반.
스텟이 회복되었다.
사람들은 한창 차를 뜯어내고 건물을 보수하느라 바쁘다. 수현이도 나갔고.
나도 슬슬 가보자.
문을 열고 나갔는데, 예은이랑 마주쳤다.
손에 쓰레기 담은 봉지를 들고있다.
눈이 마주쳤다.
예은이 얼굴이 빨개진다.
"아, 안녕하...세요."
"아, 응. 안녕."
예은이가 꾸벅 하곤 내 옆을 호다닥 지나간다.
...으음.
몰라.
...쟤 엘리베이터에 갔는데.
...난 좀 있다 내려가자.
1층으로 내려가니 수현이와 훈이 아재가 열려있는 옆문쪽 바닥에 대고 무슨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난 주변을 둘러보며 그들을 향해 걸었다.
일단 입구 주변은 죄다 셔터를 내려놨다.
실리콘을 두툼하게 발라놔서 웬만해선 못 들어올리지 싶다.
남은건 옆문 쪽 셔터.
저긴 실리콘을 바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드나들수는 있어야 되니까.
"뭐해?"
수현이의 지시에 따라 두툼한 쇠파이프를 절단기로 자르고 있던 훈이 아재가 날 돌아봤다.
"아, 선생님. 오셨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해주곤 수현이를 바라봤다.
수현이 웃으며 말했다.
"이 셔터, 잠글 수 있게 할려구. 양쪽 셔터에 고리 매달아 놓고 쇠파이프 꽂아놓을거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걸쇠 잠금처럼?"
"응."
수현이가 훈이 아재를 힐끔 돌아보더니, 날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말을 못 듣게 하기 위해선가?
왜 이러지?
수현이가 말했다.
"오빠. 예은이가 이상한 말 하던데?"
...으음.
짐작되는 바가 없지 않다.
난 으쓱하며 물었다.
"무슨 말?"
수현이가 눈을 가늘게 뜬다.
으음, 불안하다.
"욕실 문 벌컥 열어서 미안하다던데. 오빠. 뭐 했어?"
...으으으음...
...말하자 그냥.
난 어깨를 으쓱했다.
"실은 어제 돌아갈 때 방을 잘못 찾아갔어. 1023호로 가야되는데 옆집에 들어갔거든."
수현이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본다.
난 말했다.
"피곤해서 씻고 자야겠더라고. 그래서 씻는데, 예은이가 누가 있냐고 문을 열더라. 그게 다야."
"...진짜 그게 다야?"
"어. 그게 다야. 호수 착각해서 옆집에 갔고, 씻었고, 별 일 없었어."
수현이는 나를 가는 눈으로 한참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젠장.
죄지은거 같잖아.
아니, 잠깐.
왜 그런 눈으로 나를?
그건 사고였다고.
착각과 오해에 의한 불의의 사고.
야, 게다가 설령 예은이랑 무슨 일이 있었다고 쳐.
너랑 난 사귀자는 말도 안 한 사이잖냐.
그러니까, 말이지.
말하자면 그렇다고.
그렇게 말은 안 할거지만.
왜 당황하고 있냐 나는.
수현이는 나를 보고, 나는 수현이를 보고, 우린 잠시 그러고 서 있었다.
입을 연 것은 수현이었다.
"...예은이 맘에 들어?"
난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뭔 소리 하냐. 그냥 사고였어."
"............"
수현이는 대답없이 날 한참 바라봤다.
나도 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수현이를 보면서 서 있었다.
수현이는 이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할 수 없지."
...음?
뭐가 할 수 없냐.
수현이가 말했다.
"사실은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지금 우리 사람들, 여자가 더 많잖아. 그러면 왠지 그렇게 되는거 아닌가... 옛날처럼, 남자들이 처첩 거느리고 막."
"...야, 너무 나간거 아니냐? 처첩은."
수현이는 픽 하고 웃었다.
"오빠. 나도 보는게 있고 듣는게 있어. 이젠 경찰도 법원도 정부도 없어. 수돗물이 나오고 전화가 아직 되는게 신기할 정도야. 그런 세상이 됐잖아."
"그래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세상이 이 모양이 됐는데, 난 아마 오빠 없었으면 그 하숙집에서 굶어 죽었겠구나. 우리쪽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저 쪽 다른 그룹 사람들도, 결국 오빠가 아니었으면 집 밖으로도 못 나왔을거 아니야?"
...으음.
그렇게 되나.
난 렙업하러 다닌건데.
딱히 대답하진 않았다.
수현이가 말했다.
"저쪽 그룹 사람들을 생각해봤는데, 있잖아. 난 저 쪽으론 절대 가기 싫어. 사람들 못됐어. 난 여기가 좋아. 오빠랑 같이 있는게 더 안정감도 들고 편안해."
음... 이것도 역시, 대답할 말을 찾기 힘들다.
그러냐, 하는 투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수현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혹시 다른 여자 맞이할거면. 그렇게 해도 된다구."
...?!
난 어이가 없어서, 피식하고 웃지도 못하고 수현이를 바라봤다.
"그게 왜 그렇게 되냐?"
수현이는 약간 씁쓸한 표정이었다.
"말했잖아. 우리쪽, 여자가 더 많다고. 아마 저 쪽도 비슷할걸. 사냥이나 먹을거 구하러 나가는거, 거의 남자들이 하지 않아? 편의점 터는거 내 방 창문으로 멀리서 봤는데."
"그야... 그렇지."
"그러면 남자들이 더 쉽게 죽는다는 뜻이야. 그렇게 되면 여자가 남아."
"...그래서?"
수현이는 눈만 들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오빠. 여자는 성욕이 없는 존재라는 이상한 믿음 같은거 혹시 갖고 있으면, 서둘러 그 생각 내려놔.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은."
...뜨흠.
그야 알긴 아는데.
난 대답없이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수현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혹시 다른 여자 만날거면 그래도 돼. 오빠같은 남자 혼자 독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여자들이 결국 나 미워할거고."
"그...렇게 되냐?"
수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는 여자들 질투하는걸 못 겪어봤나봐. 얼마나 야비해지는지 모른다구. 으유, 난 그 등쌀 못견뎌."
그러곤 한숨을 포옥 내쉰다.
"게다가, 여자들이 오빠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도 벌써 안다구. 예은이, 소은이, 은서, 또 인라인 다른 여자들. 벌써 오빠 보는 눈이 반짝반짝 하던데."
"...그랬냐?"
그건 전혀 몰랐다.
수현이가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말했다.
"대신."
손을 올리더니 내 멱살을 팍 잡는다.
그리곤 나를 노려봤다.
"...나도 똑같이 사랑해줘야 돼. 다른 여자한테 더 가고 그러면 안돼. 만약 그런 짓 하면, 꼬추 잘라버릴거야. 진심이야."
...윽...
꼬...꼬추는 냅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