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87)

"예. 이제 문 잠가지나 보네요?"

"아, 예. 수현씨가 애 많이 쓰셨습니다. 오세요,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자 훈이 아재가 셔터를 드르륵 내렸다.

그리고, 셔터와 양쪽 셔터 사이에 용접해놓은 둥근 고리에 쇠파이프를 끼워넣는다.

아까 들렸던 쇳소리가 이거구만.

"고마워요. 수고하십쇼."

두명씩 보초서나보지.

난 쉬고싶다.

걸어가려는데, 훈이 아재가 말했다.

"서, 선생님. 제 마누라가 선생님께 드리고 싶다고 이거..."

락앤락 통을 내게 내민다.

"뭡니까?"

"아, 부추전입니다. 야채가 상하기 전에 다 먹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여자들이 이것저것 만든 모양입니다. 이건 선생님 드리고 싶다고 제 마누라가."

난 웃으며 락앤락을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예, 선생님. 간장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푹 쉬십쇼, 선생님."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나쁘지 않은데.

...정말 두고 갈 수 있나.

이 사람들을...

마음이 살짝 무거워지려 한다.

난 이내 숨을 들이키곤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금은 렙업이나 해.

쓸데없는 생각은 할 필요 없어.

힘에 3점을 넣어 34를 만들어 놓고는 10층에서 내렸다.

그리고, 예은이가 자고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크윽...!"

쾌감이 등줄기로 짜르르 올라온다.

예은이가 날 꽉 껴안으며 신음을 흘렸다.

"하아..."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따스하게 조여오는 감촉을 즐기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예은이가 내 품 안에서 속삭였다.

"...오빠, 또 언제 나가요?"

시간을 대충 계산해 봤다.

"아마 해 뜨기 전에."

"...같이 아침 먹어요...네?"

난 예은이의 젖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안전해지는게 먼저야. 이해해라."

예은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내 품을 파고들어 온다.

난 예은이를 돌려 뒤에서 껴안았다.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만지며 눈을 감았다.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이 좋다.

요 며칠간 잠이 좀 부족해.

하지만 감수해야 된다.

대충 새벽 두시쯤 된 것 같은데.

여섯시에 나간다.

휴대폰의 희미한 진동을 듣고 눈을 떴다.

시간이 됐다.

예은이는 한창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내려와 마트에서 비상식량을 다시 챙겼다.

그리고 지하도로 돌아가, 내려갔다.

* * *

"후우..."

분수가 빨갛다.

시체 세 구 들어있다고 물이 저렇게 빨개질수가.

피와 달리 약간 투명하게 빨개서 딸기쥬스같다.

오후 세시가 살짝 모자란 시각.

"하아, 하아."

숨을 가다듬은 후, 상태창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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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

[전문화 - 생존전문가] [레벨 - 85]

[호칭 - 힘을 얻은]

스테이터스

[체력 - 93/100] [감각 - 2/2]

[힘 - 0/35] [민첩 - 4/4]

[정신 - 10/62] [지능 - N/A]

[분배 포인트 - 4]

스킬

[패시브 - 혼의 문신 LV. 2]

[패시브 - 회복]

[액티브 - 가속] (자동시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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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렙업했네.

9시간동안 총 7렙업.

렙업, 점점 빨라지고 있어.

앞으로 15렙 남았다.

정신에 3점 넣어 65를 만들었다.

그리고, 힘에 1. 해서 36.

세시라...

렙업하느라 며칠간 잠을 별로 못 잤더니 피로감이 제법 많이 올라온다.

누우니 바로 잠들 것같아.

오늘 레이드 끝나고 나면 푹 자둘까.

그러면, 저녁에는 돌아가자.

휴대폰으로 회복될만한 시간대에 진동알람을 맞췄다.

피맛 나는 에너지바를 씹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벌떡 일어났다.

젠장, 알람을 들었는데.

10초만 더 있다가 일어날려고 밍기적거렸다가 다시 잠들어버렸어.

시간 아깝다.

입 안이 텁텁하다.

에너지바 때문은 아닌 것같고, 아마 입술에 잔뜩 튀었던 피랑 같이 먹어서 그런 모양이다.

모아서 뱉어내곤 생수를 까서 들이켰다.

"후우."

미지근해.

그래도 개운해지네.

난 뺨을 찰싹 치곤 일어나 검을 들었다.

분수 근처 서점과 카페는 완전히 쓸어놨다.

이제 남은건 지하철역으로 통하는 길이다.

여전히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좀비들도 떼거지로 남아있다.

어깨를 몇번 돌리곤 검을 빼들었다.

슈르릉-

"후우... 가자."

잠 너무 모자라, 젠장.

눈이 침침하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심호흡해 머리를 맑게 하곤, 놈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스으읍.

"야! 개짖는 소리 안들리게 해라!"

놈들의 대가리가 홰래랙 돌아간다.

"크롸라라라라!"

짖으며 달려온다.

좀비의 파도가.

검을 당기며 몸을 굽힌다.

그리고, 땅을 박찼다.

"흡!"

가속!

"후우..."

지하도 입구의 난간을 붙잡고 머리를 숙였다.

가속 1회 남았네. 12번이나 써버렸어.

우르르릉!

지하 먼 곳에서 짐승들 짖는 소리와 산 무너지는 소리가 같이 울린다.

저런 소리, 이젠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는다.

3렙업하고 힘 39를 찍었다.

힘. 좋지.

올릴수록 점점 렙업 빨라지고.

레벨도 어느새 88이다.

금방금방이네.

좋긴 좋아.

다 좋은데, 으. 피곤해.

돌아가자.

숨 좀 돌린 후, 대형마트 건물로 돌아갔다.

골목길에 무슨 염탐꾼이 있고 없고 같은거 신경쓰고 싶지도 않다.

제법 어두운데.

몇시지?

아홉시.

...어, 수현이가 메세지 보냈었네.

[오빠, 큰일났어. 어디야? 빨리 와.]

큰일?

난 답장을 보내려다 코앞이 건물이라 그냥 폰을 넣어두곤 걸었다.

건물로 돌아가자 셔터가 드르륵 열린다.

훈이 아재와 수현이가 같이 있었다.

"서, 선생님. 오셨습니까."

"오빠! 왜 이제 와!"

표정들이 심상찮은데.

난 살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수현이가 살짝 울상이 되더니 말했다.

"정한서씨가... 죽었어."

...정한서?

그게 누군데.

정...

...아.

정은서 동생!

수현이와 훈이 아재를 번갈아 본다.

얼굴을 보니 농담이 아니다.

난 말했다.

"언제? 왜?"

수현이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 간호사 언니 있잖아. 명진이 언니 말로는 아마 뇌출혈인것 같다던데 그 언니도 의사도 아니고 무슨 검사를 해본것도 아니라서 잘 모르겠대."

난 고개를 끄덕이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다들 어디 있는건데?"

"한서씨네 방에 다들 모여있어."

드르르륵.

훈이 아재가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10층을 누르곤 말했다.

"급하다는게 이거였구나. 저 놈들 처리하느라 메세지 온 것도 못 봤다."

수현이가 고개를 저었다.

"메세지 보낸건 그거 아니야. 한서씨는 방금 죽었어."

난 갸웃하며 수현이를 바라봤다.

다른 큰 일이 있다는건가?

수현이가 폰으로 유튜브를 켜 내게 보여줬다.

"이거 봐, 오빠."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이다.

건물의 마천루.

도심 속을 거니는 드론.

그리고 도시를 가득 메운 좀비들.

그리고...

...한글 간판?

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어딘데?"

수현이가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

"...강남."

...뭐라고?

강남?!

"바로 코앞이잖아. 여기서 지하철 몇코스 거리지?"

수현이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오빠. 셔터 보강작업 끝낼려면 한참 남았어. 게다가 1층만 보강해선 안될 것같아. 좀비떼가 여기로 오면... 혹시나 이 건물에 달라붙으면."

...그건 심각하지.

아무리 나라도 수만 수십만씩 떼로 몰려 다니는 놈들을 다 죽일 수는 없다.

내겐 탁월한 능력이 있지만 그만큼 제약도 강력하다.

게다가, 아무리 좀비면역이라곤 해도 가속이 다 떨어지고 완전히 노출되었을 때 저 놈들에게 붙잡히면 살아날 확률은 없다.

온 몸이 다 뜯겨 죽게 될거다.

"...큰 일은 큰 일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수현이도 같이 끄덕였다.

"일단은 하는데까진 해볼게. 혹시 모르잖아. 여기로 안 오고 딴데로 갈지도."

...그야말로 희망사항이다.

방향 한 번 잘못 틀면 완전히 노출된다.

운에 맡길순 없어.

수현이 말대로, 이 건물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벽에 붙은 수많은 유리들.

아무리 강화유리라곤 해도, 유리는 유리다. 임계점을 넘는 압력이 가해지면 결국 깨지고 찢어질거다.

...어떻게 모든 유리를 보강하지?

젠장.

나한텐 이런 지식은 없단 말이지.

고민하는 사이 10층에 도달했다.

문이 열리자 마자 나는 정한서의 방이 어딘지 알았다.

열려있는 문.

그리고 문가에 서있는 사람들.

저기가 정한서의 방이다.

그가 죽은 곳이다.

내가 걸어가자 사람들이 알아보곤 길을 터주었다.

방 안엔 정한서가 침대에 누워있다.

자는 것같다.

침대 옆엔 정은서가 무릎꿇고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론 동생의 손을 꼭 잡고있다.

다른 손은 자기 무릎에 얹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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