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87)

주먹을 쥐고있다.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정은서를 바라봤다.

어지럽다고 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어지럽다가 쓰러져 죽을 리가 없다.

놈들 때문이다.

바퀴벌레들이 집단으로 폭행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원인이 아니라 다른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죽은 동생의 손을 잡고있는 저 여자에게 말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선의로, 사람들을 돕자는 착한 마음으로 했던 행동이 결국 유일한 혈육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어떤 심정일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툭, 툭.

정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수현이와 예은이가 내 옆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소은이와 훈이 아재 마누라도 같이 들어간다.

기운내라고 위로하며 정은서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공허한 말일 뿐이다.

정은서가 애써 미소지으며 여자들을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있는 나를 바라본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정은서를 볼 뿐이다.

정은서도 달리 내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게 뭔지 알 것 같다.

정은서도 내가 무엇을 알았는지 아는 것같다.

나는 그녀의 눈을 그렇게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나는 좀 씻을게."

수현이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

쏴아아.

시원하다.

개운하다.

그리고, 부탁인데.

바퀴벌레들아.

지금은 오지 마라.

눈에 띄면 말보다 칼이 먼저 나간다.

침대에 누워 부족한 잠을 청했다.

사람들은 정한서의 시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하고 있는 것같다.

땅에 묻으러 갈 수도 없다.

도로에 던져놓고 태울 수도 없다.

수현이가 방에 들어왔다.

"오빠. 자?"

난 눈을 게슴츠레 뜨곤 문쪽을 바라봤다.

수현이가 문틀에 기대어 있었다.

"왜?"

"한서씨, 옥상에서 화장하기로 했어. 오빠도... 올래?"

...화장이라...

...정은서가 원하는건 동생을 위한 좋은 장례절차와 하객들의 조문이 아닐텐데.

난 침대에서 일어나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다.

"그래."

수현이와 함께 옥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수현이가 말했다.

"오빠. 오늘 여자들끼리 모여서 은서씨랑 같이 좀 있을려구... 그래도 돼?"

조심스레 물어온다.

이런 분위기에 나한테 안기고 그러면 안되겠다 싶은거네.

그래. 그도 그렇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옥상에 올라가니 이미 화장 준비가 끝나있었다. 가구 따위를 뜯어낸 나무들과, 휘발유 가득한 페트병 세개. 그게 전부다.

인라인 동호회의 두 남자가 침대보에 싸놓은 정한서의 시체를 나무 위에 얹었다.

그리고 휘발유를 뿌리려 했다.

정은서가 나서서 페트병을 잡았다.

남자들은 병을 건네고 물러섰다.

정은서는 서서 동생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휘발유를 뿌렸다.

추도사는 없었다.

정한서의 시체가 불타오르며, 환한 불빛과 검은 연기를 하늘로 날려보냈다.

사람들은 정한서가 불타는 것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정은서는 한 걸음 뒤에 서 있다.

시선이 느껴진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슬픈 눈 속에 분노가 담겨있었다.

아침 일곱시.

살짝 이르다.

눈 비비고 일어나 무장하고 1층 마트로 내려갔다.

눈은 좀 따끔거려도 꽤 많이 자서 그런지 기분은 개운하다.

마트엔 야채, 과일, 고기, 해산물 칸이 완전히 비어있었다. 고기와 해산물은 이제 못 먹게 된 것도 있을거고, 그나마 먹을 만한 것들은 상하기 전에 진작에 사람들이 먹어치웠을 것이다.

야채와 과일칸은 심을 수 있는건 심고, 버려야 되는건 버리느라 또 비었다.

뭐 먹을거 없나 하고 냉동실을 열어봤더니 손질해 얼려놓은 야채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마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겠지.

아마 이런 먹거리들 정리하는데 텃밭팀들이 왔다갔다하며 일했을거다. 시체팀은 아직도 시체 치우는 중이고.

텅 빈 진열대를 바라보다 과자류 코너로 걸어갔다.

꽤 큰 마트다.

먹을건 아직도 넘쳐난다.

에너지바와 먹을걸 챙기고, 보초서는 중인 인라인 남자가 열어주는 셔터 밖으로 나왔다.

"다녀오십쇼."

"네. 이따 봅시다."

꾸벅 해온다. 꾸벅 해줬다.

12렙 남았다.

아마도 오늘 중에 끝낼 수 있을거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하늘이 꿉꿉하더라니.

정은서의 동생이 죽은 다음날 내리는 비.

이런 것에 별로 의미부여하고 싶진 않은데, 좀 희한하긴 하다.

조촐한 장례식.

사람들은 더러 눈물을 훔치기도 했지만, 사람이 죽어서 멘탈이 나가거나 하진 않는 것 같았다.

이제와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기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알게모르게 죽음에 적응한 모양이다.

와중에 나를 바라보고 있던 정은서.

정은서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달리 정은서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은 내게 많은걸 요구하고, 부탁하고 있었다.

복수하고 싶다고.

놈들에게 댓가를 치르게 하고 싶다고, 나를 향해 눈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그래.

어렵지 않지.

때가 오면 그렇게 될 거다.

어떤 형태일지는 모른다.

정한서의 죽음으로 사람들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점에 도달했고, 바퀴벌레들이 살짝이라도 건드리는 순간 이성의 끈은 집단적으로 끊어지게 될거다.

그렇게 되면 뭐...

그렇게 되는거지.

우선은, 새로운 전문화다.

렙업하자.

* * *

밤 9시를 한참 넘긴 시각.

"...후우..."

레이드 세번.

그리고, 레벨 100.

분수가 벤치에 앉아 상태창을 열고 스텟을 분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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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

[전문화 - 생존전문가] [레벨 - MAX.]

[호칭 - 힘을 얻은]

스테이터스

[체력 - 91/100] [감각 - 2/2]

[힘 - 0/45] [민첩 - 4/4]

[정신 - 11/71] [지능 - N/A]

[분배 포인트 - 0]

스킬

[패시브 - 혼의 문신 LV. 2]

[패시브 - 회복]

[액티브 - 가속] (자동시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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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71이라...

꽤나 애매하네.

뭐, 됐어.

가속 14회면 뭐, 나쁘지 않아.

전문화 탭이 깜빡거리고 있다.

난 손을 들어 생존전문가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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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시간조정자 (MAX)

ㅡ. 생존전문가 (MAX)

1. 그림자전사.

2. 야생사냥꾼.

3. 공간탐색자.

4. ??? (선택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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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거다.

그림자 전사.

야생 사냥꾼.

공간 탐색자.

이번엔 잘 생각해서 골라야 돼.

함부러 막 누르면 안 된다.

시간조정자는 정신력에 대응하는 전문화였고, 생존전문가는 체력에 대응하는 전문화였지.

남은 스텟은 힘, 감각, 민첩.

4번 전문화는 아직 개방되지 않은 지능 스텟과 연결되어 있을거다.

아마 4번이 개방되면서 지능도 같이 열리지 않겠나 싶다.

그러면, 1,2,3번 전문화들은 어떤 스텟에 대응하는 전문화들인걸까를 고민해봐야 돼.

그리고, 각 전문화마다 어떤 특징이 있을 것인가도 함께 생각해봐야 된다.

단서라곤 이름 뿐.

전사...

사냥꾼...

탐색자...

...음.

잠깐.

고려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잖아.

전문화 업적에 따른 보상이다.

시간조정자 전문화를 골랐을땐, 저장고를 얻었지.

저장고는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따금 심심해서 불러내 봐도, 혼석이랍시고 있는건 여전히 잡을 수도 없고 그냥 숫자가 올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생존전문가 전문화를 얻었을땐 유지장갑을 얻었어.

유지장갑.

꽤나 쓸만하다.

새로운 전문화를 얻으면 그에 따른 새로운 보상도 생긴다는거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는걸.

난 팔짱끼고 전문화 선택창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이번엔 절대로 전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전문화를 얻고싶다.

하지만 공간탐색자는 이름부터 전투와는 별로 상관 없어보인다.

그렇다면 남은건 그림자 전사와 야생 사냥꾼이다.

...미친.

못고르겠다.

선택장애 온다.

씨발 이름만 갖고 이게 무슨 스텟에 대응하는지, 무슨 보상을 주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림자 전사는 암살자 느낌 나서 민첩같고, 야생사냥꾼은 도끼 들고 있는 야만인 같은게 떠올라서 힘 같기도 하고, 아니면 활 든 사냥꾼이라서 민첩같기도 하고 야생이니까 감각같기도 하고 몰라씨발!

동전 던지자 그냥.

주머니를 뒤져봐도 동전은 없었다.

든 건 휴대폰 뿐.

난 한숨을 푹 내쉬곤 휴대폰을 바닥 가까이 댔다.

손가락을 살짝 걸쳐 받치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제발 액정 깨지지 마라. 지금은 서비스센터도 없다."

앞면은 그림자 전사.

뒷면은 야생 사냥꾼.

좋아.

후우, 후우.

숨을 가다듬고, 손을 힘껏 들어올렸다.

팍!

패래래랙!

휴대폰이 빙그르르 돈다.

제기랄, 그냥 모서리 대고 돌릴걸 그랬나?

깨지지 마라!

툭, 투툭.

휴대폰이 떨어졌다.

카메라가 보인다.

뒷면이었다.

야생 사냥꾼이다.

젠장.

이거 고르는게 지금 상황에서 나한테 맞는건지 아닌건지 모르겠다.

전혀 감도 안 잡힌다.

이걸로 또 고민하면 평생 못 고르겠다.

난 야생 사냥꾼을 눌렀다.

[새로운 전문화를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스킬을 얻었습니다.]

됐어.

"후우...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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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

[전문화 - 야생사냥꾼] [레벨 - 1]

[호칭 - 성장중인]

스테이터스

[체력 - 91/100] [감각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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