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87)

무언가를 확실히 베었다는 감촉이 손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걸리는 것도, 힘이 들지도 않는다.

두부를 벤 것 같다.

"--왥!"

새는 단말마를 내지르며 몸통이 갈라져 앞으로 엎어졌다.

머리가 달린 몸통, 머리가 없는 몸통.

흐트러져있는 내장.

뻘건 피.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새를 내려다봤다.

대가리 없는 몸은 미동이 없다.

저 몸통은 죽었다.

그러나 대가리 있는 몸통은 다르다.

이 놈은 하나 남은 날개를 퍼덕여 땅에 비벼대며 아직도 날개짓 하고 있다.

심장도 없는 놈이.

"웨륽! 꿱! 우웱!"

미친.

난 새의 모가지를 짓밟았다.

물컹하고 단단하다.

"꿹! 에륽!"

피를 토하며 홱홱 움직여대던 대가리.

더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검을 거꾸로 쥐고 놈의 머리를 조준했다.

그리고, 내리찍었다.

퍽.

"긁."

묘한 소리를 내고는, 축 늘어진다.

검을 뽑아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긴장감이 올라온다.

이 놈은, 새다.

하지만, 좀비과 다를 것 없다.

죽어도 움직이고, 심장이 없어도 깨물려 한다.

게다가 새한테 송곳니가 있다는 소린 듣도보도 못했다.

인간만이 아닌거다.

"...종말."

그래.

종말.

세상의 종말.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체가...

모든 것들이 변해버린거다.

인간 뿐일거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었다.

세상에 살고있는건 인간만이 아니다.

하늘에도, 물에도, 산과 들에도 살아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종말이 도래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종말인거다.

으드득.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츠핏.

핏방울이 벽에 주르륵 튀어묻는다.

"내가 뒤질 것 같냐."

이를 갈며 말하곤, 검을 다시 넣었다.

스르릉- 착.

가자.

무기를 구하러.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종말을 맞이했다면, 그래서 언젠가 나조차도 그 속으로 가라앉아야 한다면, 나는 두 손에 무기를 쥐고 끝까지 휘두르며 침몰하겠다.

콧잔등이 일그러진다.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나는 걸었다.

한시간여가 지나, 전통활 전문점 간판을 발견했다.

난 계단을 타고 청계천을 벗어났다.

비가 내린다.

빗물을 머리칼로 뚝뚝 떨구며, 나는 건물로 들어갔다.

계단은 비었다.

엘리베이터는...

작동한다.

전통활 전문점.

전통활이라.

국궁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당 층으로 올라갔다.

크르르르-

문이 열리자 마자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큰 건물.

층 전체가 활 전문센터다.

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모양인데.

포스터 붙어있는 유리문.

난 숨을 들이키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크롸륽?!"

놈들이 나를 돌아본다.

눈이 번뜩인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크아아악!"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흡!"

파각!

검이 대가리를 뚫고 지나간다.

가볍다.

가볍다!

그동안 뚫어왔던 그 감촉이 아니다.

버릇처럼 찔러버렸지만, 찌르자 마자 깨달았다.

체력!

난 즉시 몸을 비틀며 찔렀던 검을 베었다.

푸칵! 슈콰콱!

머리통을 잘라내며 뚫고나온 검날이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며 지나간다.

손에 닿는 감촉은, 바나나를 자르는 정도다.

...충분해!

"---캬--아-"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얼굴을 베었던 놈의 눈과 이마가 머리통과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다.

깨끗하게 잘린 뇌수가 보인다.

피가 뿜어져 나온다.

난 고개를 돌리곤, 검을 휘둘렀다.

슈콱, 카칵!

나는 미소지었다.

웃음이 나온다.

"...하하, 하하!"

* * *

숨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없다.

다 죽였다.

모두 23마리.

베는 맛을 깨달았다.

새로운...

즐거움이다.

좀 너무 지나친 탓에, 바닥엔 스물 세 구의 시체들이 수십조각으로 나뉘어 흐트러져 있다.

...앞으론 좀 지양해야 겠는걸.

신나게 휘두를땐 몰랐는데 휘두르고 보니 이럴거면 차라리 깔끔하게 머리를 찌르는게 나았다 싶다.

앞으론 가능하면 머리만 썰어내자.

[레벨이 올랐습니다.]

"후우."

...음?

메세지창을 바라봤다.

20마리 넘게 죽였는데, 레벨 하나...

...20마리당 1업이냐.

"하아..."

당연히 그렇겠지.

상태창을 열어보니 힘 45중, 21남아있다.

...아까 새까지 카운트 된거다.

역시, 새도 악체(惡體)였어.

살아있는 모든 종이 변해버렸다는 추측이 맞았던거다.

난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이건...

가능하면 우리쪽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자.

언젠간 알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평온을 조금 더 누릴 수 있도록 해줘도 괜찮잖아.

고개를 끄덕이곤 주위를 둘러봤다.

조그만 양궁장 같다.

사무실인지, 진열대인지 애매한 큰 방 하나.

그리고 그보다 넓고 긴 방에 과녁들.

과녁 너머 창문을 가로막아둔 완충재들.

화살이 창문을 뚫고 잘못 날아갈까봐 저렇게 해놓은 모양인데.

꽤 시설 좋네.

바닥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 사이, 그리고 과녁 놓인 방 여기저기 활들이 놓여있다.

난 그것들을 잠시 둘러보다, 진열대 방으로 들어갔다.

기왕이면 새것으로.

진열대 방엔 온갖 종류의 활들이 벽에, 또 진열대 따위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적어도 서른개는 있겠는데.

투박한 숏보우, 3모양으로 생긴 각궁, 그리고 전통활 전문점에 있어도 되나 싶은, 올림픽 양궁경기때나 볼 만한 큰 활도 있다.

마음에 드는데?

기왕이면 디아블로의 악마사냥꾼이 쓰는, 연발사격 가능한 쌍수 석궁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판타지 무기를 이런데서 구하는건 무리고.

뭐가 좋을까.

난 활들을 하나 하나 들어봤다.

일단 양궁활.

최고로 멋지다.

디자인 하나는 그냥 최고다.

곡선으로 휘어진 페인팅 바디에, 조준기인지 작대기 하나가 피뢰침처럼 붙어있고, 크기도 꽤나 커서 나 활들었다. 라는 티가 물씬 나는 활이다.

국궁은 꽤나 작다.

내 팔길이 안팎 정도?

하지만 시위를 슬쩍 당겨보니 탄력은 양궁활보다 단단하다.

화살도 두 활이 다르게 쓰나본데.

용도를 잘 생각해야돼.

간지는 양궁활이다.

거기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난 여러 무장을 같이 갖고 다녀야 된다.

검과 함께 내 몸에 달고 다닐 수 있어야 돼.

"쯥... 좀 아쉽네."

탐스러운 양궁활을 잠시 바라보다, 각궁을 집어들었다.

안내문 같은게 있는데?

...동물의 뿔 같은걸로 만들어서 각궁이라고?

몰라 그런거.

난 각궁의 시위를 팅팅거리며 당겨봤다.

그리곤, 쭉 당겼다.

...잠깐.

이거 생각보다 힘을 써야되는데?

쭉 당기고 잠깐 버텨보니 확실히 팔과 등에 부하가 걸리는 느낌이 올라온다.

체력 업적 스킬로 빡셀 정도까진 아닌데, 검 휘두르는 것 보다는 확실히 힘을 더 써야된다.

활잽이는...

힘캐였나.

활이 힘캐였다니 진짜 몰랐다.

몇번 안해본 RPG게임에선 항상 민첩캐였는데.

어디 사극 드라마같은데서 활쏘는거 보면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고 슉슉 잘만 쏘던데.

이렇게 힘을 쓰는 무기였을 줄이야.

팅! 착!

"으앗!"

활시위를 놔봤더니, 활이 픽 돌아가면서 손등을 쫙 때린다.

미친!

존나 따가워!

손등을 보니 빨갛게 줄이 쫙 나있다.

이거 자세도 신경 꽤 써야되네.

안그럼 다치겠는데?

어떻게 하는거야 이거.

난 다시 활을 잡고는 시위를 쭉 당겨봤다.

이번엔 활 쥔 손을 단단히 움켜쥔다.

두 손에 힘 빡 주고!

등을 쫙 당기고!

...어 불편해 시발.

자세가 좀 아닌 것 같은데.

안내책자 같은게 책상에 있다.

표지에 어떤 아재가 화살 매겨놓은 활 시위를 당기고 있다.

...팔꿈치를 좀 더 들고?

요렇게?

...어 불편해 미친.

몇번 팅,팅 하며 튕겨보다가, 이번엔 테이블 한 켠에 우르르 쌓여있는 화살 하나를 들어 매겨봤다.

그리고 쭉 당겼다.

"읏, 씨발."

젠장.

화살촉이 사방으로 널뛴다.

활에 딱 붙어있지 않고 소주 댓병 먹은 놈처럼 휘청거린다.

시위를 잡은 손가락도 신경써야 되네.

천천히 시위를 풀어줬다가, 손가락 사이에 화살을 잘 끼우고, 활에 매겼다.

그리고 쭉 당겼다.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이건 연습을 좀 해봐야겠다.

활이라는거, 참,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무기로 썼냐.

이거 초심자는 도저히 못 써먹을 무긴데.

제대로 써먹으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되겠는걸.

화살을 한웅큼 쥐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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