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안에 들어있는 감정이 느껴진다.
감히 시선을 돌리질 못하는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죽은 사람들을 봐. 다 너 때문에 죽은거야. 안 미안하냐?"
두목 바퀴벌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땀을, 눈물을, 피를 질질 흘리며 나를 볼 뿐이다.
난 피식 웃고는 가볍게 말했다.
"전에 하나 알아낸게 있어. 뭔줄 아냐?"
답을 바라고 물은건 아니다.
난 웃고는 놈을 바라봤다.
꽤나 사나운 미소다.
"사람을 죽일땐 힘이 들지 않는다는거야."
그대로다. 스테이터스상의 힘은 사람을 죽일땐 소모되지 않는다.
악체를 죽일 때만 소모된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했지만, 두목 바퀴벌레는, 그리고 다른 바퀴벌레들은 꽤나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얼굴색이 변한다.
이 놈들이 나에대해 알 리가 없지.
나는 팔짱을 끼고 두목 바퀴벌레를 바라봤다.
허옇게 떠버린 얼굴엔 공포와 경악이 들어있을 뿐이다.
눈빛이 애처로울 정도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참."
난 일어서며 꽂아놓은 검을 붙잡았다.
그리고, 뽑았다.
"끄윽!"
두목 바퀴벌레가 팔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말했다.
"돌아가. 살려주지."
두목 바퀴벌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미소지었다.
"살려준다고. 돌아가라고. 말이 안 들리냐?"
턱을 덜덜 떨고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검을 들어 저 뒤쪽의 바퀴벌레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까딱거렸다.
"이리 와. 이 새끼 데려가라."
바퀴벌레들은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며, 더러 구역질을 하며, 더러는 오줌을 지리며 서 있었다.
내가 가리킨 부하 바퀴벌레들이 서로 쳐다보더니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곤, 내 눈치를 살피며 두목 바퀴벌레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가, 갑시다..."
"...크으윽."
두목 바퀴벌레가 일어선다.
세 바퀴벌레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몸을 돌린다.
나는 말했다.
"어이."
바퀴벌레들이 나를 돌아본다.
나는 미소지었다.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나는 두 손으로 검을 쥐고, 두목 바퀴벌레에게 다가갔다.
놈의 오른쪽 팔꿈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싸악-
팔이 잘렸다.
그리고 한 걸음을 더 내딛어, 놈의 왼쪽 팔꿈치도 잘라냈다.
양쪽 팔이 잘려나갔다.
두목 바퀴벌레를 마주보고 섰다.
검을 거꾸로 쥐고, 두 팔을 들어올렸다.
두 개의 검 끝이 두목 바퀴벌레의 두 눈에 맞춰졌다.
가속이 끝났다.
나는 검을 찔러넣었다.
검날이 두목 바퀴벌레의 두 눈에 박혔다.
두목 바퀴벌레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진다.
"...끄아아아아아악!"
털썩.
잘려나간 팔뚝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바퀴벌레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두목 바퀴벌레는 절규하며 비명질렀다.
나는 말했다.
"살려는 준다. 이제 앞도 보지 말고, 손찌검도 하지 말고, 그렇게 살아."
그러며 미소지었다.
"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들어, 피가 철철 흐르는 자기 눈을 덮으려 한다. 그러나 손이 없다.
두목 바퀴벌레는 바퀴벌레들에게 매달린 채 끝없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말했다.
"어이, 지혈해라. 뭐하냐. 죽는다."
바들바들 떨던 바퀴벌레중 하나가 황망하게 벨트를 풀어 두목 바퀴벌레의 팔을 싸맸다.
옆에 놈도 그걸 보곤 자기 벨트를 푼다.
나는 지혈하는 바퀴벌레들에게서, 주위에 있는 바퀴벌레들로 시선을 옮겼다.
"너희들. 여기 시체 다 치워라. 그리고 여기서 꺼져."
바퀴벌레들은 감히 움직이지 않고 내 일거수 일투족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다시 나타나면 그땐 몰살시켜버리겠다."
수많은 눈들.
놈들은 숨도 소리내어 쉬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검을 허공에 떨쳤다.
촤륵!
피가 떨어져 나가며 검이 깨끗해졌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슈르릉- 착.
피웅덩이와 내장이 밟혀 걸음을 딛을 때마다 질퍽거린다.
뺨에서 내려온 피가 입가를 걸친다.
쇠맛이 올라왔다.
놈들은 내가 걸으면 걷는대로 우르르 길을 비켰다.
둥근 원이었던 것이 C가 되었다.
입 안에 있는걸 모아 침을 탁 뱉고는 놈들 사이를 걸었다.
널려있던 내장의 장판이 끝나고 도로가 나타났다.
저벅, 저벅.
땅을 밟으니 좀 낫네.
대형 마트 건물.
나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봤다.
2층과 3층, 그리고 옥상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경악에 물든 얼굴.
놀란 얼굴.
어느 얼굴이든 평소와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얼굴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내가 칼부림하는걸 못 본 여자들도 다 봐버렸다.
사람을 거침없이 살육하는걸 눈 앞에서 봤다.
마음이 살짝 무겁다.
저 사람들, 이제 나를 무서워하겠지.
편히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던 얼굴은 이제 아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좀 약간 씁쓸해지네.
그런 기분으로 셔터를 향해 걸어갔다.
드르륵-
셔터가 올라갔다.
사람들이 서있었다.
훈이 아재, 인라인 태영과 준혁, 한태.
그리고 수현이.
다들 나를 바라보고 있다.
계단에서 여자 하나가 내려온다.
정은서였다.
표정이...
어떤 감정인지 읽을 수가 없다.
띵-
건너편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사람들이 내렸다.
예은이, 소은이, 훈이 아재 마누라, 그리고 10층에 살던 여자.
달리듯 걸어온다.
나는 계단을 올라 셔터 안으로 들어갔다.
훈이 아재가 내 뒤로 걸어간다.
드르륵-
셔터가 닫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여자들이 사람들 뒤에 섰다.
사람들은 내게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거리에 선 채 나를 보고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다.
왜 아무도 말을 안 하지?
방금 그걸 다 봤을텐데.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괜찮아?"
말하느라 얼굴을 움직였더니 핏방울이 턱에서, 머리에서 뚝 뚝 떨어졌다.
수현이의 입술이 묘하게 움직인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앞으로 여자 하나가 다가왔다.
정은서였다.
동생이 죽은 여자.
유일한 혈육을 바퀴벌레들에게 잃은 여자.
정은서는 관찰하듯, 눈에 담으려는 듯, 내 눈과 얼굴, 코와 입술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입맞췄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서 올라온다.
난 살짝 놀라 몸이 굳었다.
혀가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턱을 열었다.
그녀의 혀가 내 이를 살짝 긁으며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피 맛.
입술에 남아있던 피가 같이 들어와, 금속 맛이 올라왔다.
하지만 정은서는 멈출 생각이 없어보인다.
그녀의 혀는 집요하게 내 입술을 핥고, 내 혀를 감아왔다.
쪽.
그녀가 내게서 입술을 뗐다.
피.
그녀의 코에, 콧가에, 그리고 입술에.
피가 묻고 문질러져 붉은 흔적이 생겼다.
정은서가 말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한 걸음 떨어지더니, 사람들을 힐끔 보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사람들을 헤치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이 내게 한 걸음 다가온다.
인라인 남자들...
준혁, 태영.
피멍들고 엉망이 된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
약간 울 듯한 얼굴로 그들은 내 팔과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달리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훈이 아재도 내게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소은이, 유부녀, 10층녀.
그녀들은 한 걸음 뒤에서 두 손을 꼭 잡고, 혹은 가지런히 모아 잡고 나를 보고 있었다.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인 것같다.
수현이와 예은이.
너흰 또 왜 울려고 하냐.
수현이가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예은이도 글썽거리며 나를 보고있다.
아아, 그래.
무서웠구나.
백명이 넘는 놈들이 몰려와 사람을 패고 여자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아마도 그 순간 만큼은, 좀비들 보다도 사람이 더 무서웠을 것이다.
사람들의 손이, 내 가슴에 기댄 수현이의 뺨이 피에 물들었다.
예은이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주르륵 흘러내린다.
난 손을 들어 예은이의 눈물을 쓱 훔쳤다.
눈가에 피가 문질러졌다.
난 말했다.
"울지마. 이제 괜찮아."
예은이는 피묻은 얼굴로 울먹이며, 억지로 미소지으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준혁과 태영을 바라봤다.
한사람은 눈가가 찢어져 피가 좀 나온다.
준혁은 코피를 질질 흘리고 있다.
코 부러진거 아닌가.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네. 다들."
준혁의 목울대가 꿀꺽 하고 움직인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훈씨. 덕분에요."
환호도, 비난도, 슬픔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웃는 사람은 웃고, 우는 사람은 울었다.
다들 그렇게 내 주위에 모여 있었다.
* * *
잠들 수 있었는데 또 깼다.
어렴풋이 의식이 돌아오는걸 느끼며 눈을 떴다.
뺨을 간지럽히는 머리칼.
수현이가 내 오른쪽에 누워 있었다.
난 미소짓고는 수현이를 안은 팔을 감아 젖을 어루만졌다.
그러며 이마에 입맞췄다.
입술에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온다.
"...으응."
수현이가 희미하게 뒤척이며 소리를 냈다.
얘도 깨겠는걸.
팔베게 해주고 있던 팔을 슬슬 뺐다.
수현이가 앙 거리며 보채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