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87)

움직인 탓인지, 왼쪽에 누워있던 예은이도 살짝 뒤척거렸다.

내 왼팔에 감겨 자고있는 예은이.

고개를 살짝 들고 자는게 잠버릇인가보다.

난 예은이에게 가볍게 입맞추고는, 오른손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넣었다.

가녀린 털과 부드러운 균열이 내 손길을 맞이해 주었다.

살며시 쓰다듬는다.

희미한 신음소리.

기분 좋은걸.

그런데...

난 희미하게 피식 웃고는 일어나 앉았다.

못 자겠다.

양쪽에 여자가 누워 안겨있으니 기분은 좋은데, 잠을 잘 수가 없어.

퀸사이즈 침대에 셋이나 누워 자는건 좀 무리다.

다음번엔 예은이네 방에서 자야겠는걸.

킹사이즈라 셋이 누워도 괜찮을것 같다.

난 수현이 쪽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눈 앞에 수현이의 젖이 보인다.

젖꼭지를 입에 물고 살짝 빨고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아앙."

귀엽네.

침대 옆에 서서 두 여자들을 내려다봤다.

나체의 여자들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신기한 광경이다.

그저 내가 기쁘기를 바란다는 듯이 내게 몸을 열어주고, 함께 씻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으로 빨아주고.

결국 수현이 안에, 예은이 입 안에 싸고, 이후로도 한참을 셋이서 서로 애무하다 잠들었다.

좋은 풍경이다.

그렇긴 한데... 젠장, 자고싶어.

자다 깨다 했더니 눈이 따갑다.

난 머리를 긁적이곤 하품했다.

바닥에 널려있는 옷들과 브라들.

혹시나 브라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 건너편 옷장 서랍을 열었다.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깬거 담배나 한 대 피자.

한창 새벽이라 그런가 복도는 조용했다.

아니, 꼭 조용하지만도 않다.

멀리 들려오는 희미한 신음소리.

신경써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는 여자 신음소리.

10층에 원래 살고있던 여자다.

인라인 부동산 업자, 준혁과 분위기 좋더니 결국 저렇게 됐나보다.

바퀴벌레들에게 붙잡혀 실컷 얻어맞는걸 보고 보듬어주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서로 마음에 들면 된거지.

남자들은 내가 여자 여럿을 안는다는 점에 딱히 불만이 있어보이진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훈이 아재는 마누라가 있다.

태영은 같은 인라인 동호회의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있고, 준혁도 방금 신음소릴 들어보니 꽤나 잘 지내고 있는 것같다.

똥내, 아니, 한태는...

여자들 눈에도 너무 애송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남은 남자는 나 하나다.

여자들이 누구를 선택하든, 여자들이 판단할 문제다.

남자들은 그걸 받아들인 모양이다.

난 미소짓고는 복도 끝 창가로 걸어갔다.

칙.

후우-

반쯤 열린 창가로 담배연기가 폭포마냥 빨려나간다.

이상한 경험이다.

여자들이 날 선택한거야 그렇다 해도, 같은 침대에 셋이서?

공포스러운 경험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나친 두려움과 일시에 찾아 온 안도감?

후우-

모르겠다.

종말 터지고 늘 수십, 수백마리의 좀비들에게 둘러 싸이다시피 살았다.

겨우 백명 남짓한 바퀴벌레들 따위야 내겐 걱정거리도 아니다.

난 피식 웃었다.

확실해.

내 안의 어딘가는 마비됐어.

그렇게 오늘 일어난 쓰리썸에 대해 고찰하며 담배 한 대를 피우곤 몸을 돌렸다.

음.

잠이 완전히 깨버렸어.

바람이나 좀 쐴까.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철문을 열자 바람이 훅 불어온다.

여름밤의 미지근한, 하지만 상쾌한 바람이 머리칼을 쓸어준다.

난 담배를 한대 더 꺼내어 물고는, 벽 쪽으로 슬슬 걸어갔다.

종말이다.

그러나, 전기는 아직 들어온다.

그렇다는 말은, 야경이 있다는 뜻이다.

눈 앞에 펼쳐진 도시의 야경은, 비온 후 맑은 밤하늘의 별빛과 만나 그리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야경을 바라보며 불을 붙였다.

칙.

"아."

음?

목소리.

난 고개를 돌렸다.

옥상 벽 끄트머리에 여자가 서 있었다.

그림자 쪽에 서있어 누군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안 주무세요?"

아아.

이 목소리.

정은서다.

난 피식 웃고는 담배를 빨았다.

후우-

"자다 깼어요. 은서씨는요?"

정은서의 그림자가 머리를 돌렸다.

옥상 아래쪽을 바라본다.

"잠이... 안 오네요."

잠이 안 온다라...

난 담배연기를 후우 뱉으며 그녀에게 걸어갔다.

"저쪽 사람들은 다 갔죠?"

정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체도 다 치웠어요. 저... 내장... 같은건 그냥 놔두고 갔지만요."

"쯧."

난 정은서의 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 사거리는 붉은 페인트를 엎어놓은 것같이 되어있었다.

그 페인트 가운데에 불쾌한 골짜기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다.

난 피식 웃고는 등을 돌렸다.

"저도 한 대 주실래요?"

정은서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며 물었다.

"담배 피우는줄은 몰랐군요."

"끊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한대 피우고 싶어요."

정은서는 담배를 피워물고는 내게 라이터와 담배갑을 건넸다.

난 받아들고는 말했다.

"좀 어때요?"

후우-

정은서는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곤 말했다.

"시원하고 통쾌해요. 슬프고, 동생이 보고싶어요. 사람들이 밉고, 또 사람들이 좋아요."

정은서는 그렇게 말하곤 나를 돌아봤다.

미소짓고 있었다.

"저 좀 정신 나갔나봐요."

난 웃었다.

"그럴리가요. 꽤 평범한데요."

정은서는 다소 묘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살짝 웃고는 말했다.

"오늘 미안했어요. 밑에서...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불쾌하진 않으셨나요?"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혀."

정은서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밖을 돌아봤다.

그녀의 입가에서 담배연기가 흐트러진다.

나도 옥상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우린 그렇게 서서 옥상의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웠다.

활과 화살 담은 나무통은 1층의 마트 옆문 출입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럴 만한 정신이 아니기도 했고.

난 활과 화살 통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사람들 참, 호기심도 없나.

그래, 뭐.

무기를 손에 쥔다는게 아직은 서투를거다.

적어도 인라인 사람들과 여자들은.

활은 내가 쓸 것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다섯개다. 적어도 우리쪽 사람 중 다섯은 무장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쪽 사람 중 적어도 다섯은 반드시 무장을 해야 된다는 소리다.

어제 저녁의 일도 있고, 이제 사람들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지.

...잠깐.

화살이 좀 늘어난 것 같은데.

이렇게 많았나?

잘 보니 나무통 밖에도 화살들이 놓여있다.

마치 비좁아서 튀어나온 듯이.

난 곧 깨닫고는 웃었다.

깃띠 감아놓은 화살통.

저거 그대로 두고 올라갔었구만.

지금은 새벽녘이니, 적어도 수십발은 늘었다는 소리다.

시간당 세발씩 늘어나니 망정이지, 끼워놓은 대로 두배씩 늘었다면 아마 지금쯤 이 앞에 화살언덕이 생겼을거다.

...오히려 그게 좋았겠는걸.

난 빡빡하게 끼어버린 깃띠 화살통을 뽑았다.

옆에서 화살들이 우르르 쏟아져, 짜그락거리며 통 옆으로 떨어졌다.

발로 툭툭 차서 대충 모아놓곤, 내가 썼던 활을 들었다.

자, 이제...

이걸 어떻게 장착해야 좋지?

난 허리에 메고있는 리프팅벨트를 내려다봤다.

양쪽에 검 두자루.

...음.

좀 고민해보다가, 화살집을 들어봤다.

다소 납작한 화살집.

단단한, 그러나 화살조차 단단히 물어주는 탄력있는 가죽.

활을 대봤다.

안 들어간다.

들어가면 좋겠는데.

뭐 없나?

나무통을 뒤적거려 봤다.

화살 무더기 안에서 원통화살집 몇개와 납작화살집을 찾아냈다.

납작화살집.

깃띠 감아놓은 화살집보다 살짝 벌어져 있다.

모양도 약간 다르다.

...이건 들어가겠는데?

활을 꽂아보니 깊숙히 쑥 들어간다. 넣을수록 압력이 느껴지며 확실히 잘 붙잡아준다.

살짝 힘주어 빼지 않으면 뽑히지 않을 정도다.

틀림없다. 이건 활집이다.

화살집만 있는줄 알았더니.

난 피식 웃고는, 화살집과 활집 끈을 몸에 둘러 등 쪽으로 X자가 되도록 맸다.

좀 단단히 고정시키는게 좋겠는걸.

일단 지금은 이렇게 해두고, 수현이한테 부탁해두자.

무장을 마치고, 나는 셔터를 올려 건물을 나갔다.

2층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한태가 창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성훈이 형. 지금 나가요?"

난 뒤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어. 셔터 잠궈라."

"잘 다녀 오세요, 형."

"그래."

쟤도 보초 서고 있는걸 보니 슬슬 자기 자리를 잡아가는 것같다.

겁쟁이라 아직 형들 따라 알루미늄 판 가지러 나가진 못해도, 텃밭일을 돕거나 잔심부름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있어 사람들도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것 같다.

기왕이면 전투력 쪽으로도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러기엔 너무 작고 통통한데다 팔에 힘도 없다.

활 쏴본 경험상, 쟤는 활질 못한다.

쟤보단 평소 운동을 즐겼던 정은서나 이것저것 일하기 좋아하는 수현이가 훨씬 더 활을 잘 당길거다.

한태는 애송이 티를 벗으려면 더 자라야 돼.

무장이 늘어선지 걷는게 살짝 불편하다.

계속 매달고 다니다 보면 익숙해지겠지만.

현재 시각, 새벽 두시.

야생 사냥꾼 레벨 2.

기왕 하는거 한 번 올려보자 싶어서 감각에 1을 넣어 3이 되었다.

등에 멘 화살집엔 화살 세 개가 꽂혀있다.

감각도 3 뿐인데 굳이 수십발씩 갖고다닐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는건 수십마리씩 쓸어죽이는거지, 활 실력을 늘려서 한마리씩 잡는게 아니다.

멀리서 머리를 제대로 맞추려면 얼마나 연습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활로는 처음 싸워보는거다.

오늘은 시험삼아 원거리를 테스트 해보고, 감각을 다 쓰면 검을 든다.

거리는 꽤나 한산하다.

바퀴벌레들이 서로 패죽이는 울부짖음도 들려오지 않는다.

줄초상이 났으니 분위기 안좋겠지.

내가 알 바는 아니다만.

지하도로 내려가 시체들을 건너 분수가까지 걸어갔다.

시체썩는 냄새 오진다.

여름이라 특히 더 심한거겠지.

"후우."

멀리, 상점들에서부터 그 너머 지하철 가는 길까지 좀비들이 바글바글 서 있다.

난 손을 뒤로 뻗어 활줄에 손을 걸어 당겼다.

쑤우욱 하며 활이 뽑혀나온다.

반대쪽 손으로 화살 한 발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활에 매겼다.

이걸로 좀비을 죽이는건 처음이다.

감각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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