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자친구 지킬려고 저항하다 처맞았구만.
남자가 말을 이었다.
"여자들을 창고에 가둬놓고... 거기에 남자들이 계속 들락거리면서... 그래서 구할려고 했는데 붙잡혔습니다. 편의점 창고에 저를 가두더라고요. 거기에."
남자는 다른 남자들을 가리켰다.
"저 남자들도 있었어요. 자기 여동생이랑 애인 지킬려다가 다들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고 거기 갇혀있었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네.
대충 상상이 된다.
바퀴벌레들 중에는 원래부터 애인이나 부부라, 파트너가 있는 남자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있었겠지.
여자가 없는 남자들.
놈들끼리 의기투합해서 젊은 여자들을 몰아다 자기들 마음대로 갖고 논거다.
문신돼지들도 있었던걸로 봐서 어디서 건달 흉내나 내던 양아치 씹새끼들이 주도한 거겠지.
두목 바퀴벌레는 그걸 용인했을거고.
남자들을 통솔하려면 놈들이 원하는걸 적절히 제공해야 했을거다.
어쩌면 두목 바퀴벌레 스스로도 놈들과 어울려 여자를 가둔 창고를 같이 들락거렸을 수도 있고, 모르는거지.
우릴 레이드하려 여기 나타났던 바퀴벌레들은 대략 백여명이었다.
적진에 쳐들어오는데 여유병력을 남겨두진 않았을거라고 본다.
아마도 전부 끌고 쳐들어 왔겠지.
그렇다면, 백명의 남자들 중 여자가 없는 남자들은 몇명이었을까.
또 놈들이 노리개로 삼으려 가둔 여자들은 몇명이었을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여자들.
이 여자들 뿐만이 아니라 더 있을거다.
확신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문제는 내 눈 앞에 있는 이 여자들과 남자들인데...
나는 내 뒤에 서있는 우리 사람들을 돌아봤다.
정은서, 준혁, 태영, 훈이 아재.
다들 표정이 안좋다.
남자들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정은서다.
유일한 혈육을 바퀴벌레들에게 잃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선 불길이 치솟고 있을 것이다.
...바퀴벌레들에게서 도망쳐 나왔다는 이 사람들.
정은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정은서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녀가 입술을 앙다문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은서.
네 안에 불길이 타고 있어도,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는 아직 변하지 않았어.
난 도망쳐 나온 여자들과 남자들을 돌아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뒤돌아서 계단을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갈 뿐이다.
가면서 훈이 아재의 어깨를 한 번 짚었다.
아재가 맡아서 처리해주쇼.
훈이 아재가 내 의도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들어와요. 저 위에 빈 방 많으니까, 일단 좀 씻고 뭐 좀 먹읍시다. 먹을것도 많아요."
난 훈이 아재가 나서서 사람들을 맞이해주는걸 들으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정은서가 따라 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난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정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저 어린, 혹은, 젊은 남녀들은 오로지 피해자다.
아무리 바퀴벌레쪽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바퀴벌레들에게 무한한 적개심을 갖고있는 정은서로서도 거절하긴 어려웠겠지.
난 물었다.
"괜찮아요?"
정은서는 이번에는 대답했다.
"...그 놈들 전부 죽이고 싶어요."
외치지도, 분개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목소리가 살벌하다.
...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다음번엔 전부 죽이도록 하죠."
정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 보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예은이네 방을 향해 걸어가는데, 정은서가 말했다.
"성훈씨."
뒤돌아봤다.
"저 담배 한 대 주실래요?"
난 고개를 끄덕이곤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요. 갑시다."
옥상에 올라간 우리는 담배를 피워물곤 야경을 바라봤다.
정은서는 말이 없었다.
한 편, 나도 머리가 복잡하다.
도망나온 남녀들의 말을 들어보니, 바퀴벌레들에겐 일종의 계급이 생긴 것같다.
인간 취급도 못 받는 노예들.
그리고 권력을 쥔 양아치들.
종말에 의해 공권력이라는 호랑이가 죽어 없어지니 문신돼지들이 살판 난거다.
우리쪽 사람들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사는 놈들이 아니다.
종말에 살아남은 생존자 그룹들인데, 그것도 같은 동내에서 형성된 그룹인데도 이렇게나 색깔이 다르다니.
아마도 두목 바퀴벌레와 그 마누라의 영향이겠지.
사람을 함부로 대하며 자신은 남에게 멋대로 굴어도 되고, 남들은 나에게 그렇게 굴면 안된다고 여기는 개병신새끼들이 권력을 쥐면 딱 저 꼴이 나는거다.
눈에 훤하다.
그런데 문제는, 저 놈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후우..."
담배연기가 흐트러진다.
오늘은 밤이 늦었다.
자세한건 내일 들어보자.
도망나온 남녀들도 각자 방 배정받고 좀 씻고 사람답게 식사라도 해야지.
* * *
이튿날.
수현이와 예은이를 비롯한 여자들이 새로 온, 자기 또래의 여자들을 한 집 한 집 돌아다니며 환영해주었다.
가벼운 인사치레와 한태가 구운 빵 정도가 고작이겠지만, 그것 만으로도 아마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은 받지 않을까 싶다.
한편, 나는 도망나온 남자들 셋을 데리고 서예학원으로 들어갔다.
자세한 사정을 듣기 위해서다.
책상에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나도 의자 하나를 가져와 그들을 마주보고 앉았다.
"방은 어땠습니까? 괜찮던가요?"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보니 땟국물 가득하던 어젯밤보단 훨씬 나아보인다.
며칠 굶은 탓인지 생기는 아직 없어보인다만, 그래도 사람처럼은 됐다.
표정들이 꽤나, 내게 고마워 하는 것같다.
코가 새카맣던, 지금은 멀쩡해진 남자가 대답했다.
"방, 마음에 듭니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여자친구도 좀 편해진 것 같아요."
...음.
말이 편해진것 같다는거지 정말 편한건 아닐거다.
바퀴벌레들이 창궐하고 겪어온게 있는데, 그게 하루만에 머리에서 사라질 리 없다.
난 그저 끄덕여주곤 물었다.
"저 바퀴... 저쪽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알고싶어서 부른거긴 한데, 일단 나이하고 이름이나 좀 들어둘까요. 나는 스물 다섯살. 한성훈입니다. 여기 사람들... 뭐, 대표는 아닌데, 좀 앞장서서 뭘 하는 사람이라는 정도라고만 해두죠. 여러분은?"
남자들이 각자 자기소개를 해왔다.
그리고, 듣자마자 까먹었다.
젠장, 남자 이름 같은건 왜 이렇게 귀에 들어오려다 튕겨져 나가는거지?
준혁과 태영도 간신히 외웠다고.
어쨋든 이 남자들이 각자 스무살, 스물 둘과 셋이라는건 알았다.
나보다 몇살씩 어리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럼 내가 나이가 많기도 하고, 앞으로 서로 나눠야 될 이야기가 많으니까 일단 말부터 편하게 합시다. 형이라고 해도 좋고, 성훈씨라고 해도 좋고."
"예."
남자들이 대답한다.
그때 정은서와 훈이 아재, 준혁이 서예학원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사정을 들을거라고 얘기해놨더니, 각자 간단히 볼 일 보고 온 모양이다.
난 어서 오라고 고개를 끄덕여주곤 물었다.
"그래, 저 바퀴, 음. 저 쪽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아는대로 좀 말해봐."
남자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번에 갇힌게 아니라, 각자 따로 다른 시기에 갇힌거라 서로 아는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
한 사람이 겪은걸 다른 사람은 모르는 식이다.
우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퀴벌레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었다.
그 날.
내가 두목 파퀴벌레의 앞발 두개를 잘라내고 눈알을 쑤셔버린 날.
그 날 두목 바퀴벌레의 통솔력은 사라졌다.
백여명에 달하는, 비록 내가 스무마리의 죽은 바퀴벌레들로 만들어놓긴 했지만, 남아있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바퀴벌레들은 혼란에 빠졌다.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남자만 백여명이다. 놈들이 노인과 어린이를 챙기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를 포함해서 적어도 수백명에 달하는 대규모 커뮤니티가 만들어진거다.
매일 편의점 하나를 털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걸 주도해오던 두목 바퀴벌레가 지휘불능이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걸 주도할 것인가.
누가 레이드 목표를 정하고, 누가 미끼 역할을 하며, 누가 얻어 온 물품을 배분할건가.
그것은 막대한 권력이다.
그 권력을 쥔 자는 커뮤니티 전체를 쥐락펴락 할 수 있다.
그것은 내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권력의 공백을 두고 설왕설래하던 양아치들.
두목 바퀴벌레 마누라를 옹립하자는 파와, 새로운 리더를 갖자는 파로 나뉘어져 서로 싸움이 붙었다.
새로운 리더를 갖자는 파들은 딱히 중심점이 없었지만 그러나 단합력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다들 자기가 다음 리더가 되어 물건들을 배분하는 권력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을거라 망상하고 있었을테니 당연히 의욕도 협동심도 최고조에 이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마누라 옹립파는 평소에 두목 바퀴벌레에게 제법 많이 받아먹었던 놈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 말은 즉, 반대파에게 권력을 빼앗기면 그들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는 뜻이다.
마누라가 좋아서, 혹은 리더십이 대단해서 옹립하려는게 아니다.
자기들이 살아야 되니까 마누라를 추대하려고 드는거다.
결국 싸움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서로 큰 피해를 입었다.
와중에도 새로운 리더를 갖자는 파들이 상당히 당했던 모양이다.
의욕과 협동심은 대단했지만, 서로 지가 리더라고 나서니 결국 단합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처맞고 뒹구는 결과로 끝났다.
놈들은 도망쳤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원래 두목 바퀴벌레가 쟁여놨던 물품들 상당수를 약탈하거나, 혹은 못 쓰게 불을 질러버리곤 떠나버렸다.
그나마 남은 물건이라도 지켜야 했던 마누라 옹립파는 도망친 놈들에 의해 각개격파 당할까 두려워 섣불리 쫓아가지도 못했고, 결국 겨우 한 줌 남은 식량과 얼마 남지 않은 인원으로 남은 수백명을 먹여살려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싸움질을 하느라 다친 인원이 너무 많았던거다.
그 과정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마누라 바퀴벌레가, 술을 오지게 처먹고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른 남편을 찔러죽였다.
마누라 입장에서는, 애초에 사람들 데리고 나한테 덤비지만 않았더라도 가게들 약탈해 가면서 권력가의 지위를 편안히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두목 바퀴벌레는 판단오류를 저질렀다.
내가 어느 정도로 한 순간에 휘몰아쳐 썰어버릴 수 있는지를 몰랐다는거다.
그것 하나 때문에 결국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마누라 바퀴벌레는 사람 몰골도 아닌 남편과 나를 동시에 원망하며 칼을 찔러버렸다.
그리곤 나한테 왔던거다.
나도 찔러죽일려고.
마누라 입장에선 편안히 사람들 거느리며 뭐 좀 된 년 행세 하다가 하루아침에 풍지박살난 셈이다.
그 원망이 어느정도였는지는, 남편을 찔러 죽이고 나도 찔러 죽이러 온 걸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한다지.
마누라 바퀴벌레가 나한테 처맞고 인사불성이 된 이후, 마누라를 데리러 왔던 놈들.
몰골이 썩 좋지 않았던 놈들.
겨우 그 놈들 정도가 지금 바퀴벌레들이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의 한계였던거다.
문신돼지들, 양아치들, 양아치는 아니었지만 약탈하고 여자를 멋대로 유린하는 재미에 빠져 양아치가 되어버린 놈들로 구성되어 있던 바퀴벌레의 병력은 그렇게 한 순간에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내분에 휘말려.
남자들와 여자들을 가둬놨던 창고 따위를 지키던 양아치들이 갑자기 없어진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남자들은 조용해진 창고를 탈출해 여자들을 구출했고, 우리에게로 왔다.
우리는 이야기를 다 듣고 서로 논의끝에 어떻게 된 일인지를 서로 추측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알겠어. 그동안 고생 많았고, 이제 편하게 쉬어라."
"예, 형."
"네, 성훈씨."
남자들이 내게 꾸벅 인사해왔다.
정은서를 비롯한 우리쪽 남자들도 표정이 제법 달라져 있다.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한 것 같기도 하다.
준혁이 말했다.
"그럼 거기 남은... 그... 피해자 분들은 어떡하죠?"
"뭘 어떡해요?"
정은서가 준혁을 돌아봤다.
"우린 자선단체가 아니예요. 모든 사람들을 다 구할 수 없어요. 우리 살기도 빠듯하다구요."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나도 살짝 놀랐다.
인라인 스케이트 타고 라면 봉지들 한아름 안고 사람들한테 전해주던 그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다.
정은서가 도망온 남자들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여기서 할 일 많아요. 그냥 편하게 쉬라고 받아준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 할 일 찾아보고, 각자 맡아서 일하세요. 알겠어요?"
세 남자가 살짝 주눅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네."
정은서는 그러고는 서예학원을 나가버렸다.
준혁과 훈이 아재도 정은서의 저런 태도에 좀 놀란 눈치다.
...으음.
난 훈이 아재의 어깨를 한 번 짚어주고는 서예학원을 나갔다.
그러며 세 남자들에게 말했다.
"원래 저렇진 않아. 하지만 말은 틀린거 없어. 여기 정말 할 일 많으니까, 각자 일 찾아서 해. 사람들하고도 두루두루 잘 지내고. 알겠지?"
"네, 형."
"알겠습니다."
난 공손히 대답해오는 남자들에게 음, 해주곤 서예학원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멈춰있었다.
정은서... 아마 아직 보초 설 시간일텐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보네.
어디로 간건진 알겠다.
난 엘리베이터를 불러 10층에서 내렸다.
그리곤 곧장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엔 햇살이 환히 내리쬐고 있었다.
텃밭은 아직 싹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할매와 소은이, 훈이 아재 마누라 셋이서 흙을 고르고 물을 주고있는걸 보니 어딘가 정겹고 흐뭇해지는 느낌이 든다.
정은서는 그들에게서 떨어져, 각진 난간쪽에 서 있었다.
벽에 팔을 기대고 멀리 바라보는 얼굴이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할매와 소은이, 유부녀가 내게 손을 흔들어주길래 나도 마주 흔들어주곤, 정은서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정은서가 날 힐끗 돌아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성훈씨."
난 피식 웃었다.
"나한테 미안할거 있나. 그런거 없어요."
담배를 꺼내 피워물곤, 정은서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짓고는 담배를 받아 피웠다.
칙.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