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은서는 자상한 남자한텐 관심이 안 생기는 타입인가본데.
"그런데 나는?"
은서는 손을 들어 내 입술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당신은 달라요. 항상 피를 뒤집어 쓰고 다니고. 거침없이 칼로 찌르고... 당신은 꼭 짐승같아요."
...맞네.
나는 웃어버렸다.
"미녀와 야수 같은거냐?"
"네, 맞아요!"
은서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슴이 출렁이며 흔들거린다.
보기 좋은 광경이다.
"미녀와 야수! 난 그런 남자가 좋아요. 늑대인간같고 막. 네? 그런거 있잖아요. 거칠고, 와일드하고. 나를 막, 어떻게 해버릴 것 같은 그런 위험한 남자."
...위...
위험한 남자라...
으음...
확고한 취향이 있었구만...
우리 그룹 중에 위험해 보이는 남자가 나 말고 또 누가 더 있나?
...없다.
...선택지는 나밖에 없었던거네.
처음부터.
나는 웃었다.
비명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 은서 안에 쌀 무렵이었던가, 그 이전이었던가.
그때 격렬하게 비명이 터져나오곤, 이내 잠잠해졌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안다.
바퀴벌레들은, 모두 죽었다.
혹은, 좀비 되어 좀비웨이브에 흡수되었거나.
으르르릉-
으르르릉-
사방에서 좀비 웨이브의 으르렁이 우퍼스피커처럼 건물을 때려댄다.
난폭한 소리지만, 사납지는 않다.
건물을 타고 오르려는 시도는 없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심약한 사람들은 각자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경계하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준혁과 태영, 그리고 수현이.
은서와 내가 올라가자 정확히 다섯이었다.
수현이가 나와 은서를 번갈아 본다.
어떤 눈빛인지 읽을 수가 없다.
"밖은 좀 어때?"
나는 평이하게 물었다.
준혁이 대답했다.
"네, 성훈씨. 아직까진 별 일 없습니다. 하지만 여길 완전히 둘러쌌습니다. 도시 전체가 장악당한 것 같아요."
준혁은 속삭이듯이 그렇게 말했다.
마치 밑에 있는 놈들이 말을 듣기라도 할 것처럼.
그럴리가 없다.
여긴 10층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옥상 끄트머리로 걸어가봤다.
놈들이 소리에 민감하긴 하나 시야가 좁다.
그동안 사냥해 온 경험에 미루어 나는 안전함을 확신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난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어 보여주고는, 느긋하게 옥상 벽을 붙잡고 밖을 내다봤다.
어마어마하다.
새카맣다.
아예 땅이 안 보인다.
땅을 뒤덮은건, 검은 머리. 드문드문 흰, 혹은 갈색 머리들과 어깨들.
숨쉬기도 힘들 만큼 다닥다닥 붙어, 놈들은 도시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으르르릉-
으르르릉-
놈들이 숨쉬는 소리만으로도 유리가 떨릴 지경이다.
나는 잠시 놈들을 관찰해봤다.
그리고 이내 확신했다.
...이 놈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도발당해 건물 가득한 도시까지 이끌려 들어와, 한참을 진입해 들어온 끝에 멈춘거다.
계속적인 도발이 있었다면 어디론가로 이동했겠지만, 도발이 끊긴 시점에서 놈들은 더이상 이동할 원동력을 잃어버린거다.
여길 지나쳐 어디론가로 가버리지 않을까 싶었던 기대는 깨졌다.
"...하."
나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이젠 버티기다. 다들 큰 소리는 내지 않도록 사람들한테 전해주고..."
수현이와 은서가 없다.
준혁과 태영이 내 눈빛을 보더니 옥상 건너편을 가리켰다.
옥상 올라오는 계단칸.
그 너머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난 준혁과 태영에게 말했다.
"창문 단속은 잘 했지? 음. 내려가서 사람들한테 너무 두려워 하지 말라고 전해주고, 큰 소리는 내지 않도록 말 좀 전해줘요."
"알겠습니다."
준혁과 태영이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계단 벽을 따라 슬쩍 걸어가봤다.
"-언니가 오빠 좋아하는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언니가 오빠 쳐다볼 때마다 눈빛이 그냥. 요전번엔 피 잔뜩 묻어 있는데 키스까지 했잖아요. 오빠랑 언니가 언제 그럴까 하면서 예은이랑 둘이서 내기까지 했다니까?"
"...정말 괜찮은거야?"
수현이가 웃고는 말했다.
"언니. 평소같으면 안 괜찮죠. 그런데 지금은 평소가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밑에는 저런 것들이 있고, 게다가 남자는 없고. 태반이 여자예요, 우리."
"그야 그렇...지."
수현이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이거, 끝나기는 할까요? 언젠간 끝나겠죠?"
"...글쎄. 나도 모르겠어."
은서도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저 성훈이 오빠를 믿고 따라가고 싶어."
"저도 그래요."
수현이가 은서의 손을 잡았다.
그림자로 보인다.
"이런 세상이 됐지만 우리 같이 힘내서 살아요. 네? 저 밑에 있는 저 나쁜 것들도, 성훈이 오빠라면 어떻게 해 줄 거니까."
...못하는데.
저걸 내가 무슨 수로 처리하냐.
...둘이 분위기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좀 부담스럽네.
좀비 웨이브가 도시를 덮치고 나서 우리의 생활양식도 제법 바뀌었다.
일단, 식량은 넉넉하다.
음료수, 과자와 라면도 충분하고, 간장 고추장 참기름 식용유같은 소스에, 유통기한이 년 단위로 이뤄진 파스타와 국수, 치즈와 냉동실에 넣어두면 꽤 오래 보존되는 떡국떡 등등, 대형마트가 갖고있던 모든 것을 우리는 아직 꽤나 풍족하게 보유하고 있다.
거기에 주식인 쌀도 3층 창고것과 합하면 거의 톤 단위로 쌓여있고.
2층에 구비된 온갖 생필품들도 이 건물을 요새화 하는데 한몫 하고있다.
비누 샴푸가 없어서 못 씻는 경우는 적어도 앞으로 수년간은 없을거다.
그러나 평소에 해왔던 일들.
알루미늄 판을 밖에서 뜯어오거나, 창문과 셔터에 판을 대고 용접을 하는 일들은 더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은 건물 4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검도장에 과녁을 갖다놓고 활연습을 시작했고, 사실상 그게 일과의 전부였다.
어째서 검도장이었느냐 하면, 엘리베이터가 내는 띵 소리마저 조심하자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트까지는 4층에서 내려 걸어간다.
가능하면 소리를 내지 않고.
그것이 룰이었다.
훈이 아재네 집에는 좀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다.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솜이불에 나무를 댄 간이 방음재를 설치해 우는 소리가 새나가는 것을 방지했다.
그래도 햇빛을 못 본다는건 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기가 울지 않고 괜찮은 시간즈음에 다른 집에 놀러가거나 하는 것으로 해결을 봤다.
그렇게 다소 생활양식이 변해버린 10층은 꽤나 신기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일단, 밖에서 할 일도, 안에서 할 일도 모두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활연습을 해서 무기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TV도 안 나오고, 여가라고 해봤자 넷플릭스나 유튜브 정도다.
그렇다면 남은건?
10층의 문은 예전과 똑같이 열려있다.
전부 활짝 열어놓고 산다.
프라이버시따윈 개나 줘버리라는 것같이 다들 완전히 오픈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옆집에 들어가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하고 논다.
좀비 웨이브가 발생한 이후로 오히려 예전보다 더 사이가 가까워지고 끈끈해진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와중에 어떤 집은 문이 닫혀있기도 했다.
지금 섹스하는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활질하고 노는 것밖에 할게 없는 건물에서 남녀가 뒤섞여 있는데다, 밑에 좀비 웨이브가 창궐해 있으니 예전보다도 더 성욕이 늘어난건지 시도때도 없이 붙어먹는다.
준혁과 태영은 이미 새로 합류한 여자들중 한두명씩을 더 파트너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똥내, 아니, 한태도 마음에 드는 자기또래 소녀가 있는지 웃는 얼굴로 그 소녀와 어울려 다닌다.
빵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거니 하면서.
사람들이 두려워했던건 첫날 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그런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일어나서 섹스하고, 활 연습 좀 하다 밥먹고 섹스하고, 저녁 먹을 때까지 놀다가 또 하고.
문란하고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여기에 한 명도 없다. 심지어 할매마저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그저 방에서 찬거리를 만들며 소일거리 하고있을 뿐이다.
평소에 익숙했던, 종말 이전에 살았던 삶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의 안에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크윽...!"
은서의 골반을 움켜쥐고 허리를 힘껏 밀어넣었다.
울컥, 하고 은서의 안을 가득 채워넣는다.
등줄기로 올라오는 쾌감 속에서 은서의 신음을 들었다.
우리는 서로 껴안고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오빠, 있다 피자빵 만들어 먹을까요? 스위트콘 아직 많이 있는데 슬라이스 체다랑 모짜렐라 얹어서 만들면 맛있을거 같아요."
나랑 은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소은이가 그린 만화를 읽고있던 예은이가 말한거였다.
은서가 웃으며 말했다.
"맛있겠다."
난 아직 숨이 가빠서 대답대신 미소와 끄덕임을 보내줬다.
은서의 젖꼭지를 한 번 빨았다가 일어났다.
"아응..."
기쁜 듯한 소리.
나도 기뻐진다.
젠장, 기운이 하나도 없네.
아침부터 벌써 세번이나 쌌더니.
"수현이는 어디갔어?"
"소은이한테 만화 그리는거 배우고 싶대요. 지금 소은이 방에 같이 있어요."
"아, 그래."
난 예은이에게 끄덕여주곤 욕실로 들어갔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어.
만화라.
좋지.
웹툰이나 웹소설도 이젠 읽을수 있는 사이트가 몇 안남았다.
난 웹툰도 웹소설도 안읽어서 뭐 어떻게 운영되는건지 모르겠는데, 그런걸 평소에 즐겨보던 소은이나 예은이 말을 들어보면 더이상 새로운 화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했다.
거의 전부가.
게다가 문을 닫은 앱이나 사이트도 점차 생겨나, 남은 곳이 한군데라고 했던가, 두군데라고 했던가.
그나마도 새로 올라오는 화가 없으니 읽었던걸 또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는거다.
작가들이 다 죽어버린건지 뭐 어쩐건지.
샤워기 틀어놓고 시원하게 땀을 씻어내며 생각해봤다.
...인터넷에서 되는게 점점 없어지면 엄청 심심할 것 같은데.
아예 만화방을 털어서 만화책을 우르르 갖다놓을걸 그랬나.
옛날 만화도 재밌는거 많은데.
나루토나 원피스를 쫙 갖다놓고, 또 뭐있지? 헌터헌터도 재밌었고, 피안도는 끝났나?
젠장.
아쉽네.
파트너가 셋인건 꽤나 나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를 안을려면 다른 둘도 같이 안아줘야 된다는거지.
체력 업적 스킬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체력 올리길 잘했다고 요 며칠간 절절하게 느낀다.
생존전문가, 최고.
거기다, 그걸로 끝나지가 않는다.
요전번에 마트에서 내가 피칠갑된걸 보고 쫄았던 여자.
그 여자가 요 며칠간 계속 내 주위에서 맴돈다.
"아, 안녕하세요..."
활을 들고 나서는데 마주쳤다.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겠다.
일부러다, 이거.
그런 확신을 겉으로는 티내지 않으면서 나는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때요?"
"네...많이... 많이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꾸벅 하고는 가버린다.
...으음.
바퀴벌레들에게 실컷 당하고 우리에게 도망쳐 온 여자들 대부분은 남자들에게 그리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겨우 두셋 정도만이 준혁과 태영의 파트너가 되었을 뿐, 다른 여자들은 아직 마음과 몸의 상처를 치유하는 중이었다.
같은 처지였던 다른 여자들, 그리고 수현이를 중심으로 한 우리쪽 여자들이 자주 그 여자들과 어울려주면서, 함께 맛있는 것도 만들어 먹으면서 마음을 회복시켜 주고 있다.
하지만 당분간은, 아마 남자 생각은 전혀 들지 않겠지.
그런데 저 여자는 그 여자들과 또 다른 모양이다.
아니면 그때 나와 마주친게 임팩트가 컸거나.
무기에서, 옷에서, 머리칼에서, 턱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방금 살육을 저지르고 와서 눈매도 사나워져 있는 그런 남자를 코 앞에서 마주쳤으면, 꽤나 인상깊긴 했을거다.
그래서인건가.
모를 일이다.
여자 마음은 어렵다.
난 활과 화살을 등에 메고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게 내 일과다.
일어나서 내 여자, 수현이, 예은이, 그리고 은서를 안아주고, 올라와서 활을 쏜다.
하루에 약 8~90발.
24시간동안 복제된 화살들과, 원래 갖고있던 화살 몇발을 얹어 매일 밤까지 8~90마리를 사냥한다.
그게 한계다.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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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
[전문화 - 야생사냥꾼] [레벨 - 48]
[호칭 - 성장중인]
스테이터스
[체력 - 91/100] [감각 - 45/45]
[힘 - 45/45] [민첩 - 4/4]
[정신 - 75/75] [지능 - N/A]
[분배 포인트 - 0]
스킬
[패시브 - 혼의 문신 LV. 3]
[패시브 - 회복]
[패시브 - 한계달성]
[액티브 - 적중] (자동시전 중)
[액티브 - 가속] (자동시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