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87)

관람차마냥 느릿하게 돌아가는 초코볼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다음.

나는 한 순간에 휘몰아쳐 모든 초코볼을 베어내고는, 검집에 검 끝을 살짝 꽂았다.

가속이 끝났다.

스물 네조각이 되어버린 초코볼들이 내 좌우로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후두두둑.

검을 넣었다.

슈르릉-착.

사람들의 표정이 다양하다.

내가 이러는걸 여러번 본 사람들은 약간 벅찬 얼굴을 하고있다.

새로 온 여자들과 남자들은 내가 검을 쓰는걸 처음 본다.

얼굴에 놀라움과 경악에 물들어 있다.

"...찍었어?"

수현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응. 이제 종료. 수고했어, 오빠."

난 웃으며 텃밭을 걸어가 수현이에게 다가갔다.

"어디 보자."

내가 걸어가자 새로 온 여자들과 남자들이 흠칫하며 물러선다.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단 거겠지.

뭐 어떻길래?

수현이가 내게 영상을 보여줬다.

내가 서있다.

검을 뽑아든다.

"던져."

"네, 형!"

한태가 옆에서 초코볼을 던진다.

열 두개의 초코볼이 날아간다.

그리고, 나는 사라졌다.

거의 형태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발도 보이지 않고, 손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검은색 머리칼만이 무슨 검은 잔상같은걸 남기고 있다.

요란하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거의 선 채로 잔상만을 남긴다.

검이 햇빛을 반사해, 순간적으로 사방이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그리고, 나는 돌아왔다.

후두둑 하고, 한 눈에 보기에도 갑자기 많아진 초코볼들이 텃밭으로 쏟아져 내린다.

나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슈르릉- 착.

"...찍었어?"

"응. 이제 종료."

흐음...

...나쁘지 않네.

수현이가 웃으며 말했다.

"보낼까? 그 번호로?"

"그래."

"알았엉."

난 고개를 끄덕이곤 사람들을 돌아봤다.

만약 정부와 일이 잘 되면 나는 당분간 여길 떠나게 될 수도 있다.

난 사람들을 돌아보곤 말했다.

"다들, 지금부터 할 일이 있어."

사람들이 나를 바라본다.

할 일이란 간단하다.

건물의 요새화다.

이미 셔터작업은 대부분 끝마쳐 어느정도의 요새화는 되어 있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각 층에 있는 나무와 기타 사용할 수 있는 자재들을 뜯어 4층부터 10층까지의 모든 창문과 유리벽을 보강한다.

생각보다 소음과 빛이 강한 용접을 할 수는 없으므로, 마트 2층 철물섹션과 3층 창고에 쌓여있는 실리콘과 강력접착제를 이용한다.

그리고, 계단을 틀어막을 수 있도록 준비해둔다. 안쓰는 책상이나 의자 따위를 우르르 쌓아 방책을 만들어, 계단으로의 침입도 원천차단이 가능하도록 한다.

책상과 의자는 틈도 제법 크다.

그걸 쌓아두면 솜씨좋은 소총수 두세명만 방책 위 계단 층간에 자리잡고 있어도 책상과 의자 따위에 막힌 놈들을 죄다 헤드샷 해버릴 수 있을거다.

그 경우, 시체가 쌓이고 쌓여 계단에 언덕을 형성하면 그대로 벽이 된다.

활 쏘는걸 보니까 은서가 제법 잘 쏘던데.

총도 쏠 수 있다면 좋겠는걸.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상 출입문.

절단기를 비롯한 공구로 손바닥만한 구멍을 내놓고, 출입문 자체도 별도의 지지대를 만들어 문을 보강한다.

유튜브에서 본 영상에 따르면, 놈들은 서로 짓밟고 짓뭉개가며 건물도 타고 오른다.

옥상까지 기어 올라가 헬리콥터를 붙잡고 늘어진걸 떠올리면 섬칫하기 짝이 없다.

그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튼튼한 철문에 새로운 보강재와 지지대를 만들어 놓고, 손바닥 만한 구멍을 뚫어놓으면, 단 한명의 소총수라도 철벽방어가 가능하다.

구멍에 얼굴이 보이자 마자 쏴버리면 되니까.

혹은 수류탄을 던져넣거나.

요새화를 하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없을 때 발생할지도 모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그 때는 내가 알아서 한다.

나가서 얼마나 렙업할지, 얼마나 성장해 돌아올지, 또 성장한다면 어느정도로 싸울 수 있게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건, 성장할수록 강해진다는 것.

좀비 웨이브는 수십만, 수백만의 좀비으로 이뤄져 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탄약 백만발이 있어도 모자라다.

건물 사방을 보강해놓고 문 앞에서, 계단에서 죽여 시체더미를 만들어 놓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방어력을 얻을 수 있을거다.

이 사람들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긴 하다만. 대비 정도는 해두는게 맞지.

이를 위해, 마트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을 위로 옮길 필요가 있었다.

7,8층을 창고로 쓰기로 하고, 작업을 위해 모든 인원이 동원되었다.

밖에 좀비 웨이브가 새카맣게 몰려있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미 의욕들이 넘친다.

살려면 일해야지.

사람들은 각자 일하러 내려가고, 나는 옥상에서 활로 좀비 웨이브를 저격하고 있다.

좀비 웨이브가 들이닥친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매일 저격해 온 결과 현재 레벨 75.

조금만 더 하면 다음 전문화가 열린다.

그리고, 그날 오후.

정부에서 연락이 왔다.

"네."

"안녕하십니까. 특임대 2조 특임대장 성규혁입니다. 검 들고 계신 분 본인 맞으십니까. 영상 보내신 분에 의하면 성함이 한성훈이시라고."

강직한 목소리다.

"네, 맞습니다."

...특임대?

"707입니까?"

강직한 목소리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707은 이제 없습니다. 707, UDT 포함한 모든 특수임무대가 궤멸했습니다.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아아.

모든 부대 내에서 좀비들이 우르르 발생했지.

함께 훈련중이던, 혹은 옆에서 식사중이던 동료가, 선후배가 갑자기 돌변해 들이닥쳐 물어뜯으면 아무리 고된 훈련을 거친 전사라 할지라도 일거에 당해버릴 수밖에 없다.

대응하며 싸운 전사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목을 찔러도, 심장을 찔러도 안 죽는다.

오직 머리를 뚫어야만 죽는다.

그 상황에 정확히 머리를 뚫어 주위에서 덮쳐오는 좀비들을 모두 죽여버릴 수 있는 전사가 있었을까.

전사 이전에 인간이다.

한솥밥 먹던 사람들을, 덤빈다는 이유 만으로 단숨에 머리를 쳐죽일수 있는건 미친 싸이코패스 뿐이다.

말 그대로, 군대는 궤멸한거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특수부대를 조직중이라는 것도 비서실장에게 들었고요. 그것 때문에 연락하셨습니까?"

"맞습니다. 영상은 잘 봤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믿기진 않습니다만. 우리도 대검을 훈련합니다만 그렇게 검을 쓸 수 있는사람은 없습니다. 정말로 조작이 아닙니까?"

난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언제 한 번 보여드리죠."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 때 준혁과 훈이 아재가 옥상에 올라왔다.

"성훈씨. 일단 쌀부터..."

내가 전화중인걸 보고는 입을 다문다.

이 시기에 전화가 올 사람이란 뻔하다.

두 사람이 내게 다가온다.

난 두 사람의 표정과 눈빛을 보곤 스피커모드로 바꿔들었다.

"-습니다만, 언제부터 합류하실 수 있으십니까?"

훈이 아재와 준혁의 눈빛이 바뀐다.

짧은 말로도 뭐에 관한건지 눈치챈거다.

난 말했다.

"그게 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지역이 좀비 웨이브에 점령당했어요. 아무데도 이동할 수가 없습니다."

"...아아. 좀비 웨이브 말씀이시군요."

그때 준혁이 말했다.

"그냥 불질러서 죄다 죽이면 어떨까요?"

그러자 전화기 너머, 특임대 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불을 지른다고 하셨습니까? 혹시 네이팜탄이나 백린탄을 갖고 계십니까?"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은 보지도 못하는데.

"아, 아뇨. 네이팜... 없습니다."

"그럼 불 지르지 마십시오."

준혁이 살짝 놀라며 우리를 돌아봤다.

준혁이 말했다.

"왜죠?"

특임대장 성규혁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처음부터 말씀드리죠. 저희는 경비행기를 띄워 서울을 계속 관측해 왔습니다. 좀비 웨이브는 대부분 자연적으로 발생합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처음 듣는다.

관측같은걸 해본적이 없으니.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저희가 파악하기로, 현재 계신 지역의 좀비 웨이브는 강남에 위치해 있던 놈들입니다. 그 놈들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아십니까?"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모릅니다."

"그 지역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놈들에게 불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준혁이 살짝 놀라며 휴대폰을 쳐다봤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우선, 놈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몸에 불이 붙는다고 쉽게 죽지 않습니다.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뇌를 완전히 익혀버리는 것 뿐입니다만, 그 정도로 불을 지를려면 그냥 휘발유여서도, 화염병 수준에서도 부족함이 있습니다."

난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네이팜과 백린탄. 그래서..."

"그렇습니다. 피부가 까맣게 타버렸다고 뇌까지 익어버리는건 아닙니다. 뇌가 살아있는 한, 놈들은 움직입니다. 그래서 네이팜이나 백린탄이 아니면 불을 지르는게 의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또 있습니다."

꿀꺽,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을 마신 모양이다.

그가 말했다.

"놈들은 몸에 불이 붙으면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립니다. 평소 때와는 다른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주위에 있는 모든 괴물들을 끌어들입니다. 불 붙은 놈이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린 끝에 주유소에 불이 옮겨붙어 결국 폭발했어요. 그 결과 강남에 좀비 웨이브가 발생했고, 그들이 현재 여러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바로 그 놈들입니다."

...미친, 존나 위험하네.

그냥도 위험한 놈들인데, 불 붙으면 개지랄 발광한다니.

놈들이 지랄발광하다 이 근처에 아무 가게나 쳐들어가서 불이 붙어버리면, 근처에 있는 건물들까지 싸잡아 전소될 수도 있다.

...모르고 화염병 같은거 만들어 던졌으면 좆될 뻔했다.

준혁의 눈이 커졌다.

입술이 양쪽으로 길어진다.

준혁이 말했다.

"...불 지르지 않겠습니다."

특임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 불 지르지 마십시오."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그러면, 성훈씨가 아까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만, 좀비 웨이브 때문에 합류가 힘드시다. 그 부분은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요?"

"놈들은 소리에 이끌리지 않습니까? 저희쪽에 현재 임무용으로 쓰고있는 구조헬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

나도, 준혁도, 훈이 아재도 탄성을 냈다.

헬기라.

분명히, 유튜브 영상에서도 놈들은 헬기의 엔진과 프로펠러에 이끌려 건물을 타고 올라갔었지.

틀림없다.

헬기가 오면, 놈들은 도발당할거다.

"어디로 끌고 가실 생각입니까?"

준혁이 내 질문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강에 빠뜨려 버리는건 어떨까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한강. 좋은 생각입니다만, 놈들은 물 속을 그냥 걸어서 반대쪽으로 기어 나옵니다."

준혁과 훈이 아재의 얼굴이 실감나게 변한다.

난 짐작하고 있었다.

이 놈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벨 때마다 뒤집어 썼던 붉은 피.

만약 죽은 몸이라면,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간동안 피가 새빨갈 리가 없다.

썩어도 진작에 썩어, 새카맸을 것이다.

그러나 산 몸도 아니다.

살아있다면, 심장도 없이 펄떡일 리가 없다.

새의 몸을 반으로 갈랐을 때, 심장도 없는 쪽 몸이 나를 물려고 날개를 계속 퍼덕거렸었지.

내장을 질질 흘리면서.

놈들이 썩는건 머리가 뚫려 완전히 죽은 이후.

그때서야 몸이 썩기 시작한다.

죽은게 아니니 피가 붉다.

산 것도 아니니 숨 쉴 필요가 없다.

이 놈들은 괴물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말씀은 알겠습니다. 헬기라면 가능할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완전히 합류하겠다고 결심한건 아닙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들은 것과 다릅니다만."

"이건 아마 특임대장님과 논의할 일은 아닐겁니다. 그저 지금 통화하고 있으니 말씀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말씀 말이십니까?"

난 준혁과 훈이 아재를 바라봤다.

내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내 사람들.

...내 여자들.

난 말했다.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저희쪽엔 싸울 수 없는 사람을 포함해 수십명이 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스스로 무장할 수 있도록, 무기를 지원해주길 바랍니다."

준혁이 한마디 거들었다.

"수류탄하고 클레이모어도 잔뜩 말이죠."

특임대장 성규혁이 대답했다.

"확실히 그건 제가 답변드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군요. 하지만 이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저희는 여러분께 지원해드릴 만한 무기가 없습니다."

내 얼굴에, 사람들의 얼굴에 의혹이 피어났다.

"무슨 말씀이시죠? 특임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현재 저희가 갖고있는 것은 피스톨 두 정, 그리고 K-2 두 정. 탄약 200여 발. 그것이 전부입니다. 말씀하신 수류탄은, 저희도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현재 없습니다."

...뭐라고?

준혁과 훈이 아재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변한다.

내 얼굴도 그에 못지 않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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