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87)

뭔가 새는 소리.

...타는 냄새.

쥔 검을 더 움켜쥐곤 조심스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으르렁 소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저 삐 소리가 방해돼.

소리는 부엌에서 나고 있었다.

좌우를 살피며 힐끔 들여다보니, 주전자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있다.

가스렌지...

아니, 인덕션이다.

주전자가 완전히 타버렸는데.

시커멓다.

약불이 유지되던 인덕션을 끄곤 주전자를 바라봤다.

벌써 한달째 신나게 익고 있었던거다.

손잡이의 플라스틱 부분은 녹아서 곤죽이 되었다.

집에 불 안난게 다행이다.

제길, 기침 나올 것같아.

그을음 때문에 시커멓게 된 부엌을 잠시 바라보다 창문을 슬쩍 열어두곤 몸을 돌렸다.

1층에 있는 방들은 비어있었다.

화장실도 그렇고 제법 깨끗하고 편안하다.

확실히 좀 사는 집이네.

난 2층으로 올라가봤다.

방 네개.

계단에서 가까운 방을 슬쩍 밀어봤다.

조용히 열린다.

키티 잠옷 차림의 여자아이 하나가 엎어져 있다.

발을 내 쪽으로 향하고 있다.

핏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크르르륵, 크르르르-

난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검을 들어올리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용히.

검끝을 아이의 머리에 겨누었다.

그리고, 밀었다.

파각.

뽑아내자 피가 풋, 하고 새나온다.

아이가 엎드린 카펫이 붉게 물들어간다.

다섯살이나 됐을까.

"...쯧."

...씨발.

난 문틀에 주먹을 댔다.

수천마리를 지금까지 죽여왔는데, 애를 죽일땐 아직도 기분이 더러워져.

이를 악물곤, 다음 방을 열었다.

...비어있는 욕실이다.

그리고, 다음.

문에 상처가 많이 나있다.

긁고 때리고 난리를 쳤는지 군데군데 벗겨지고 깎여, 피가 묻어있다.

살며시 열어보니 안방이다.

큰 침대와 옷장, 장롱 등 별로 볼 건 없다.

다만, 엎어져 있는 시체.

군복을 입고있는 시체.

라틴계 미군이다.

이건 확실히 시체다.

뒤통수가 거칠게 뚫려있고, 깔아놓은 카펫에 스며든 피가 시커멓게 굳어있다.

그리고, 파랗게 되어버린 손 옆에 높인 권총.

종말이 왔을 때 아이가 변해버린거다.

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물어뜯었고, 집에 돌아 온 남편이 아내와 아이를 피해 달아난 곳이 안방이었던 거다.

가족을 자기 손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방 안에 갇혀있다 자살했다.

난 몸을 굽혀 권총을 주워들었다.

묵직하다.

탄창을 빼보니 가득 차있다.

스스스-

권총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올라온다.

소모되고 손상된게 내 손에 닿으면서 회복된 모양이다.

침대 옆 화장대에 물티슈.

총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물티슈로 닦아내곤, 탄창을 집어넣었다.

철컥.

...일단 권총 한 정.

군대 있을 때나 써봤지, 총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지금 얻은 권총이 무슨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아디다스 백팩의 유틸리티 주머니에 권총을 꽂아두곤, 마지막 방으로 건너갔다.

문을 열어보니, 창고다.

...아니, 창고?

좀 이상한데.

각종 상자들.

그리고 아기 요람.

서랍장.

벽에는 앙증맞은 그림들.

...아아.

하나 더 낳을 계획이었구나.

...제길.

그냥 몰랐으면 좋았을걸.

집만 봐도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보인단 말이야.

안방이랑 욕실엔 애가 그린 낙서를 액자에 담아서 걸어놨던데, 꽤나 화목한 집이었나보다.

"...후."

난 안방에서 했듯이, 새 애기방이 될 예정이었던 창고도 뒤적거렸다.

조그만 장농.

별 볼 것 없고.

서랍장.

위에는 쓰다가 대충 놔둔건지 공구상자가 놓여있다.

서랍을 열어보니 애기옷, 양말, 신발 따위가 가지런하다.

...기저귀는 사재기를 해놨네.

아직 애기도 없으면서.

...임신중이었던 건가.

"...쯧."

난 고개를 젓고는 쌓여있는 상자들을 바라봤다.

별거 없겠지?

하나를 꺼내 열어보니 헌옷들이다.

두번째 상자.

묵직하다.

잘 보니 사방에 테이프를 감아놨다.

뭐지?

두 발로 늘어난 화살중 하나를 꺼내, 상자의 테이프를 긁어 잘라냈다.

열어보니 나무 상자가 두 개 들어있다.

상자 옆엔 무슨 가죽 끈이 있는데?

...어.

이 가죽 끈...

난 가죽 끈을 들어 바라보다 옆에 놔두곤, 서둘러 나무 상자를 열어봤다.

철컥.

그곳엔 권총 두 자루가 들어 있었다.

아니, 권총?

...이게 뭐지?

권총이라기엔 크고, 소총이라기엔 작은데.

...기관단총이다.

미친?!

아니, 아무리 미군이어도 그렇지 이걸 어떻게 집에 갖고있냐. 그것도 두자루나?

권총까지 해서 총을 세정이나 집에 갖고있다고?

...잠깐.

지나쳐 온 다른 집에도 총 있는거 아냐?

머릿속에 잠깐 떠오른 의문을 빠르게 내려놓고, 나는 기관단총을 바라봤다.

몹시 투박하게 생겼다.

네모난 쇠통에 길쭉한 쇠파이프를 손잡이라고 달아놓은 것같다.

꼬리에는 휘어진 쇠가 달려있고.

견착용 개머리판 같은데.

뭐지 이건?

폰을 들어 기관단총으로 검색해봤다.

...미국산 잉그램 맥 M10이다.

매트릭스에 네오가 엘리베이터 전투씬에서 썼던 총이라고?

난 총을 꺼내 이리저리 둘러봤다.

상당히 가볍다.

아니, 체력 스킬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손엔 그냥 성냥갑 하나 든 것 정도의 무게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초당 18발을 난사하는 SMG 2정이라.

"...하."

희한하네 진짜.

아니, 어떻게 이런 총을 한국에 갖고 들어온거지? 아무리 군인이어도 개인이?

아까 군복 보니까 장교던데, 장교면 그럴 수 있는건가? 아닐텐데?

게다가 무기고에 있는것도 아니고 개인소장하고 있어.

난 잉그램을 두 손으로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이게 미군 클라스.

...맘에 들었다.

수방사나 다른 국군부대였다면 이런 기관단총은 쉽게 구하기 힘들었을거다.

국군도 기관단총을 물른 쓰기야 하겠지만, 거의 권총만큼 작은 잉그램은?

국내에선 절대로 구하기 쉽지 않을걸.

난 잉그램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개머리판은 그냥 뗐으면 좋겠는데.

떼지나?

서랍장 위 공구상자에서 공구를 꺼내 개머리판 연결부를 빼봤다.

그 때 전화가 왔다.

지이이잉-

폰을 보니 특임대장 성규혁이다.

아, 귀찮아.

"네."

"괜찮습니까? 집에 들어간지 한참 됐는데."

"아, 괜찮습니다. 좀 쉬고 있었어요. 시간 좀 걸릴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한참 걸어 온 데다 칼을 좀 썼더니 피곤하네요. 좀 쉬었다 나가겠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잉그램의 개머리판을 돌려 빼냈다.

두 개 다 빼내고 나니 제법...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정말로.

그리고, 아까 발견했던 가죽끈.

벨트가 달려있는 가죽끈.

짧다.

허리띠는 아니다.

가죽끈 가운데에, 가죽 띠가 단단히 붙어있다.

...무엇에 쓰는건지 처음 봤을 때부터 짐작했다.

난 가죽끈을 허벅지에 감아 단단히 조였다.

그리고, 가죽 띠에 잉그램을 넣었다.

...이거다.

반대쪽 허벅지에도 가죽끈을 감아 잉그램을 넣어뒀다.

내 양쪽 허벅지에, 기관단총 두 정.

...무장이 늘었다.

"...후우..."

심장이 뛴다.

잉그램 두 정이 들어있던 나무상자.

제법 두텁다.

아랫층이 더 있는거다.

잉그램 칸을 들어올리자, 하얀 쪽지가 나타났다.

[DEAR MY SON.]

편지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보낸건가.

아니, 아버지.

뭐 하는 분이신진 모르겠는데 아무리 북한이 위에 있는 나라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총기규제가 이렇게나 엄격한 한국에 이런 무시무시한 미제 기관단총을 함부로 보내고 그러시면 너무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는 편지를 옆으로 휙 던졌다.

아랫칸.

남색 메모리폼에 단정하게 꽂혀있는 것은, 대용량 잉그램 탄창 여섯개.

길이만 대충 30센티는 될 것 같은 무식한 탄창이다.

도대체 몇발이 들어갈지 감도 안 잡힌다.

오매불망 아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

제가 대신 잘 받겠습니다.

난 무릎을 꿇고 미국인 아버지의 사랑 여섯개를 잘 갈무리 해 옆에 놔두었다.

밑에 나무상자가 하나 더 있다.

총 들어있던 상자보단 작은데.

열어보니, 상자 가득 또 작은 상자들이 들어있다.

상자 겉엔 그림이.

그리고, 글자가 있었다.

45ACP

그리고, 탄환 그림.

...잉그램의 탄약이다.

작은 상자 하나를 열어보니...

탄약... 꽤 작구나.

바글바글 들어있는게 수십상자...

아아...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 이라는 것이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부친의 정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 깊은 감사를 담은 몸짓으로, 아디다스 가방을 벗었다.

미군, 만세...

"흠흠~흠~"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탄창 여섯개에 탄약을 채워넣는 일이 이렇게나 즐거울 줄이야.

서랍장에 기대 앉아 탄약을 꾹꾹 눌러 꽂아보니 하나당 서른발이 들어간다.

모두 180발.

나중에 수현이한테 부탁할 일이 생겼다.

탄창띠가 필요해.

대형마트 남성복 섹션에 아마 허리띠가 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로 어떻게 좀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안 되더라도 괜찮다.

내겐 백팩이 있으니까.

탄약을 꽉꽉 채워넣은 탄창을 잉그램 두 정에 꽂아넣곤, 가방을 정리했다.

혹시 몰라 갖고 온 생수와 에너지바, 과자들.

우르르 쏟아내곤, 탄약상자를 아랫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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