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성가연이 말을 덧붙였다.
"얼마전까진 강남에 좀비웨이브가 있었잖아요. 그중 일부도 자꾸 반포로 모이고 모이고 그랬었죠. 웨이브 전체는 아니었지만, 끄트머리 일부라도 세력이 막대하더라고요."
"그래. 박대위님이 몰아다 전부 수몰시키지 않았다면 우리중에 아무도 못 버텼을거야."
좀비들을 죄다 쓸어다 한강에 처박아버린 박대위라?
...만나보고 싶은걸.
난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헬기는 세빛둥둥섬에서 띄우고, 경비행기는 그럼 어디서 이착륙합니까?"
성규혁이 대답했다.
"반포 종합운동장입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게 운동장에 있던 축구골대나 테니스 그물 같은걸 전부 걷어다 치워버렸죠. 그리 큰 활주로가 필요하진 않아서 그정도면 충분했습니다."
성가연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괴물들이 몰려드는게 문제지. 김대위님 내릴 때마다 박대위님이 매번 헬기 띄워서 몰아다 한강으로 유인하고. 박대위님 진짜 고생 많이하셔."
"음."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세빛둥둥섬과 반포 종합운동장이라...
헬기와 경비행기.
그랬구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일단 알겠습니다."
반포대교 너머 멀리 바라봤다.
그리곤 말했다.
"...도착하면 대형 마트 위치나 좀 알려주시죠."
대원들이 나를 바라본다.
몰라 씨발.
이 사람들 일단 세력으로 만들어 놓고 동맹 맺는걸로 하자.
수현아, 예은아, 은서야, 그리고 이름모를 내 여자야. 너희 좀 기다려야 되겠다.
휴식을 마치고 우린 일어서 반포대교를 걸어갔다.
"흑...!"
오빠에게 부축받고 걸어가던 성가연이 얼굴을 찌푸린다.
심하게 절뚝거리는데. 쉴 때 그나마 가라앉았던 통증이 새삼 다시 올라오나보다.
그렇게 반포대교를 걸으며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수현이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빠! 어디야? 언제 와?"
"어, 수현아. 사람들은 좀 어때? 별 일 없어?"
"응! 길거리가 진짜 조용해! 할머니도 이제 좀 발 뻗고 자겠네 그러셨어. 오빠 언제 와? 예은이 언니랑 은서 언니도 오빠 보고싶대."
아이고...
가슴 한 켠이 묵직해져 온다.
난 씁쓸하게 웃고는 말했다.
"난 좀 걸릴 것같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수현이의 목소리가 약간 침울해졌다.
"그게 언젠데? 무슨 일 생긴거야?"
나한테 정말 정이 많이 들었나보다.
그동안 몸 섞은것도 있고, 같이 겪어온게 있으니.
난 미소짓고는 말했다.
"아니. 별 일 없어. 지금 반포대교 건너는 중이야. 아마 대통령 만날 것같다."
"대통령? 반포대교 건너는 중이라구?"
"응."
대통령을 만나다니.
종말 이전엔 그런 말을 해 볼 거라고 상상도 못했었지.
난 피식 웃었다.
"금방 돌아갈 테니까 걱정 말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았지?"
"알았어. 빨리 와. 응? 오빠. 몸조심하구?"
"그래."
전화를 끊었다.
"후우."
저절로 한숨이 나오네.
지금쯤이면 예은이가 차려준 냄비 가득한 맛있는 그 무언가를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놀고 있었을텐데.
그러며 자기 전에 섹스하고.
"애인이 있으신가봐요?"
성가연이 날 돌아보며 물었다.
난 피식 웃었다.
"아, 네. 좀."
하나가 아니지만.
성가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미소지었다.
"요즘같은 때에 그런 인연, 참 소중하죠. 아껴주세요."
으음.
좋은 말이야.
"가연씨는 애인 없습니까?"
물었더니, 성가연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진다.
여동생의 팔을 어깨에 두른 성규혁이 날 돌아봤다.
"그 놈은... 그 날 변해버렸습니다. 가연이는 겨우 탈출했고요."
...아아.
그랬구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별 말 하지 않았다.
다른 대원들 얼굴을 보니 꽤나 어둡다.
다들 애인이나 아내가 있었겠지.
훤칠하고 체격도 좋고 잘 생겼으니.
그런데 지금은 혼자다.
굳이 물을 필요는 없을거다.
종말 첫 날.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반포대교를 건너, 반포대로로 접어들었다.
반포대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서래공원.
서래로를 따라 나오는 서래마을.
그 안쪽 모텔이 정부세력 거주지였다.
모텔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예 외부에서 그 무엇도 들어오지 말라는 형태의, 굵은 쇠사슬이 손잡이에 휘감겨 있다.
특임대원들이 쇠사슬에 채워놓은 자물쇠를 열고, 쇠사슬을 풀었다.
그리고 주위를 경계하며 문을 열었다.
문은 꽤나 조용히 열렸다.
우린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 카운터 앞 응접실.
소파와 바닥에 여러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모두가 일어선다.
더플백을 메고 들어오는 특임대원들을 보고 얼굴이 환해진다.
대부분 남자로 구성된 사람들 중엔 비서실장 안준규, 그리고 인자한 얼굴의 노신사, 대통령 민정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밝은 얼굴로 특임대원들을 맞이했다.
"맙소사. 가연씨, 살아있었군!"
대통령 민정우가 가장 먼저 나서서 성가연의 손을 붙잡았다.
"네, 대통령님.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고생했네. 정말 고생했어."
대통령 민정우는 그저 성가연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른 대원들의 생사는 묻지 않는다.
아는거겠지.
비서실장 안준규를 비롯해, 체격이 건장한 사내들, 그리고 중년 남자들이 각자 더플백을 받아들며 그들의 업적을 치하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말했다.
"이번 작전은 이 분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동영상에서 본 것보다 더 훌륭하더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난 그들의 시선을 바라보며 어깨에 멘 더플백을 천천히 내려놨다.
아마도 특임대원일 듯한, 건장한 남자가 내게 와서 공손하게 더플백을 받아든다.
대통령 민정우가 내게 다가왔다.
"...마침내 만났군요."
대통령은 내 손을 붙잡았다.
주름살진 자글자글한 손이다.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온다.
나는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손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건 대통령 민정우에겐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그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쥐고는 말했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한성훈씨. 당신과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니, 하늘이 어쩌면 우리를 돕는지도 모릅니다."
난 미소지으며 살짝 목례했다.
"별 말씀을요. 감사합니다."
대통령 민정우가 내 손을 당기며 말했다.
"자, 우리 안으로 듭시다. 차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지요. 어떻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마시겠습니다."
대통령은 나를 데리고 모텔 1층의 빈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치워져 있다.
TV도 거울도 조그만 테이블도, 모텔방이라면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대신 투박한 의자 몇 개가 놓여있었다.
편의점 앞 파라솔 테이블에나 어울릴 듯한 플라스틱 의자들이다.
이건...
...집무실?
대통령이 일할 만한, 혹은 뭔가 회의를 할 공간이라고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우리 대형마트 건물의 가장 허름한 방도 이것보단 낫겠다.
망하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이, 방만 봐도 알 정도다.
대통령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내게 앉으라 손짓으로 권유했다.
의자에 앉아 등에 메고있던 백팩을 벗어 내려놨다. 벗는김에 리프팅벨트도 벗지 뭐.
검 두개에 활집 화살집까지 매달려 있어 보기보다 꽤 묵직하다.
둘 다 벗어놓으니 몸이 한결 가볍다.
방 안에는 꽤나 여러 사람이 모여앉았다.
나, 대통령, 특임대장 성규혁, 그리고 모르는 아저씨 둘과, 30대 초반? 일 듯한 남자 하나.
비서실장은 안 보인다.
어디갔지?
면면을 살펴보고 있는데,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아직 사람들이 낯설지요. 우리 특임대장은 이미 만나보셨고. 이 쪽은 박대한 대위. 헬기를 조종합니다."
"아아."
박대한 대위. 젊어 보이는 50대? 혹은 40대 중반. 배가 살짝 나왔는데, 체격이 꽤 건장하다.
우리 동네에서 좀비 웨이브를 치워 준 사람이다.
난 미소지으며 살짝 목례했다.
"그 땐 고마웠습니다. 우리 식구들도 고맙다고 전해달랍니다."
박대한 대위는 살짝 미소짓더니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과묵한 성격인가본데.
대통령이 말했다.
"이 쪽은 김민준 대위. 우리 경비행기를 맡아서 조종하는 인재입니다."
아, 이 사람이 전단지 뿌리고 다녔던.
김민준 대위는 키가 크고 꽤 마른 체형이었다. 확실히 50대는 아니다.
40대 초?
"반갑습니다. 전단지는 잘 받았습니다."
"환영합니다. 작전지에서 훌륭한 활약 보이셨다고 우리 성규혁 특임대장이 말했는데, 저도 직접 봤으면 좋았겠군요."
그러며 특임대장 성규혁을 힐끗 본다.
성규혁이 말했다.
"그런건 생전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로 실력이 출중합니다. 거의 영화를 보는 것 같더군요."
난 피식 웃었다.
김민준 대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성격인가본데.
대통령 민정우가 마지막 남은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잘 해봤자 30대 초. 혹은 20대 후반. 나보다 겨우 몇 살쯤 많아 보인다.
"이 쪽은 우리 정비사. 송규태 중사입니다. 경비행기와 헬기를 담당하고 있죠. 이 사람이 없었다면 참 곤란했을 겁니다."
난 송규태 중사를 향해 살짝 목례했다.
송규태 중사는 꽤 키가 작은 편이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큰 건가.
170이 살짝 안 될 수도 있겠다.
얼굴엔 자신감과 생기가 감도는, 약간 통통한 인상의 남자다.
송규태 중사가 나를 보곤 살짝 고개를 숙인다.
"반갑습니다."
인사는 하는데 안색이 썩 좋지가 못한데.
왜지?
그때 비서실장 안준규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종이컵에 뭐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더워 죽겠는데 그냥 환타나 콜라 같은거나 주지, 또 뭘 저렇게 바글바글 끓여 오셨나...
"자. 한 잔 받아요, 성훈씨. 오늘 정말 고생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색깔이 좀 묽고 밍밍한데?
살짝 마셔보니, 녹차...?
이거 물을 얼마나 탄 거야?
티백 하나에 수돗물 한바가지 넣고 몇 번을 우린 모양인데.
...안 좋네 진짜.
나를 귀빈 대우 하고싶은 모양인데, 그런 사람한테 이런걸 내 올 정도면 여기 상황이 어떤지 눈에 선하다.
비서실장이 잔을 사람들에게 돌리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정작 자기는 잔이 없다.
이 맹탕국물조차 넉넉하게 먹을 여유가 없단 말이냐.
...돌겠네.
하다못해 바퀴벌레들도 편의점을 털고 다녔는데...
아니...
놈들과는 사정이 다른가.
헬기와 경비행기 때문에 거의 매번 좀비 웨이브가 발생하니.
좀비 한 두마리 겨우 있던 편의점을 떼로 우르르 몰려들어 줘패가며, 지들끼리 패죽여가며 약탈했던, 행동양식까지 바퀴벌레와 똑같았던 그 바퀴벌레들과 이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긴 하다.
대통령 민정우가 웃는 낯으로 내게 말했다.
"그래, 성훈씨. 그 쪽에도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좀 어떻습니까?"
난 미소지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대형 마트가 있던 건물에 모여 살고 있거든요."
"오오, 대형 마트라... 다들 건강하고요?"
"네. 다들 무사합니다."
난 피식 미소지었다.
우릴 걱정할 때가 아닐텐데, 대통령씨.
노신사의 눈빛에 기쁨이 어린다.
무사한 사람들이 있다는게 기쁜 모양이다.
"다행입니다. 한성훈씨와 같은 인물이 있어 그들에겐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쭙고 싶은것이, 성가연 특임대원이 발목이 많이 상했는데, 여기 의약품은 있습니까?"
"감기약과 진통제 정도죠. 그나마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대답해온건 정비사 송규태 중사였다.
아까부터 뭔가 속상한게 있는 얼굴이다.
난 물었다.
"약이 없군요?"
송규태 중사는 대통령과 비서실장의 눈치를 살피곤 입을 다물었다.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괜찮네. 얘기하게."
"네."
송규태 중사가 끄덕이곤 내게 말했다.
"약 뿐이겠습니까. 이제 연료도 없습니다. 한 박스 남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