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다시 박수가 낮게 들려왔다.
할매가 눈을 글썽이며 계단 위에서 날 보고있다.
"고마워요, 총각."
할매와 할매 옆 젊은 여자. 그리고 아저씨.
일가족인가본데.
피가 턱에서 뚝뚝 흐르는데도 무서워보이지 않나보다.
다들 눈빛이...
난 미소지으며 목례해주곤 비서실장이 안내해주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푹 쉬시고, 입을 옷도 따로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옷이 있습니까?"
비서실장의 얼굴에서 웃음이 살짝 사라졌다.
"네. 구조작전을 초창기에 얼마간 했었는데, 비어있는 가정집이 몇군데 있었습니다. 주인 없는 옷이라 여겨..."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같은 때에 집이 비어있으면 주인 없는 집이고, 주인 없는 물건이다.
"감사합니다."
비서실장이 내게 목례해주고 나갔다.
"후..."
평범한 모텔방.
난 곧장 피에 젖은 옷을 벗어버리곤 시원하게 샤워했다.
비서실장이 가져다준 옷은 고맙게도 츄리닝이다.
내 몸엔 살짝 크긴 한데, 트레이닝복만큼 입기 편한것도 없지.
탄창에 45ACP를 한 발 한 발 꽃아넣어 모든 탄창을 채우고, 나는 잠들었다.
젠장.
또 폰 충전해놓고 자는걸 깜빡했네.
하긴, 충전기도 없다만.
그런 생각을 하며, 귓가에 울리는 벨소리를 들었다.
아, 눈따거.
샤워하고 나왔는데도 아직 잠이 덜 깼다.
눈을 비비는 와중에 수현이가 전화를 받았다.
"으응, 오빠아아..."
아직 잠에 취해있구만.
난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어, 나야. 별 일 없지?"
"우응..."
대답인지 잠꼬댄지 모르겠다.
편안하게 자고있으니 별 일 없는거겠지.
난 웃고는 말했다.
"그래. 더 자. 갈 때 연락할게."
"아응..."
전화를 끊었다.
귀엽네.
앉아서 혼자 키득거리고 웃다가 일어났다.
허벅지에 잉그램 두 정.
활과 화살16발.
그리고, 검 두자루.
츄리닝 차림으로 하고있기엔 썩 어울리지 않는 무장이긴 하다.
옷가게를 좀 털어서 청바지랑 흰 티 좀 구해봐야겠네.
거울에 비친 나를 잠시 바라보다 방을 나섰다.
모텔은 조용하다.
간만에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되어 다들 실컷 먹고 잠들었나보다.
모텔을 나서니 대원들이 모여있었다.
얼굴이 살짝 부어있는 대원도 있었지만, 눈빛은 맑다.
난 특임대장 성규혁에게 말했다.
"가까운 옷가게랑 중형마트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성규혁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성훈씨."
* * *
"후우..."
중형마트 밖 골목.
주차되어있던 트럭 뒤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크롸라라라랅!"
와장창!
유리벽이 박살나는 소리.
우르르, 발소리.
짖어대는 소리.
트럭 뒤에 앉아 마트쪽을 내다봤다.
이 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는 없다.
옆에 도열해 앉아있던 대원들.
나랑 골목을 번갈아 보고있다.
난 피식 웃고는 말했다.
"많습니다. 좀 걸리겠네요. 일단 쓸어놓은 옷가게부터 털고, 여긴 나중에 다시 옵시다."
대원 하나가 소총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성훈씨. 우리도 돕겠습니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총소리는 지금은 함부로 내면 안 된다. 그리고 지금 쥐고 있는건 평택기지 공격할 때 쓸 탄약이야. 아껴야 돼. 반드시 써야 할 때가 아니면 쏘지 마라."
그가 나를 힐끗 돌아본다.
"여긴 성훈씨에게 맡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성규혁과 다른 대원들도 내게 고개를 끄덕인다.
특임대장의 말이 맞다.
평택기지.
거기엔 거처가 없다.
얼마나 많은 놈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엄폐가 안 될 수도 있다.
쏟아부어야 한다면, 그 때다.
옷가게를 털고, 모텔로 돌아와 점심때 다시 모이기로 하고 방에서 쉬었다.
방금 공격했던 중형 마트.
소규모 좀비 웨이브가 지속적으로 일어난 지역인 탓에, 중형마트 전체가 놈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눈짐작으로만 4~500마리.
들어설 수 있는 곳은 죄다 들어차 있다.
활은 조용히 저격하긴 좋은데 화살이 제대로 수급되질 않는다.
이제 겨우 20발 가까이 모았다.
잉그램.
단숨에 다수를 처리해버리긴 좋지만 역시 총인지라 소음이 심하다.
이런 지역에서 킬카운트를 제대로 올리려면, 결국엔 칼이다.
방금 전 레이드로 1업 해서 힘 61.
...앞으로 39.
감각 100 특전이 효율 두 배였다.
그렇다면, 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힘 100을 찍고나면, 근접전과 원거리에서 최대효율을 낼 수 있게 된다.
"후우."
하지만 렙업이 너무 느려.
50마리당 1업이라니.
새 전문화를 얻고 며칠 되지 않아 16렙을 찍었으니 딱히 느리다고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욕심이 생긴다.
지지지징-
지직, 지징-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 크진 않지만, 분명히 들려온다.
용접하고 있는거다.
철물을 받았을 때 송규태 중사가 꽤 기뻐했었지. 틀림없이 모텔을 보강하고 있는거다.
그래.
우선 여길 요새화 해놓고, 점차 재건해 나아가야지.
짧은 잠을 청하곤 일어나 점심을 컵라면으로 때우고 방을 나섰다.
1층 로비에 비서실장과 대통령, 특임대장 성규혁이 모여있었다.
"아, 성훈씨. 지금 나가십니까? 대원들 준비하겠습니다."
날 발견한 성규혁이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웃는건 처음 보는 것같네.
꽤 편안한 웃음이다.
물자가 풍족해지니 마음도 여유로워진 것 같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아까 얘기했다시피, 마트 정리하는데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될 겁니다."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놀라며 묻는다.
으음...
스텟 회복 시켜야 된다고 말하긴 좀.
비서실장 안준규가 웃으며 말했다.
"뭘 그리 급할게 있는가. 천천히라도 확보만 할 수 있으면 되는거지."
대통령 민정우가 내게 말했다.
"모두가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훈씨,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건강하게 잘 있는게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난 성규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동생분은 어떻습니까?"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좀 나아졌습니다. 뼈가 부러진건 아니더군요. 그냥 심하게 삔 것 같습니다. 당분간 제대로 걷진 못할 겁니다만, 약국에서 가져 온 진통제와 압박붕대가 잠은 잘 수 있도록 해 준 모양입니다. 그걸로도 한시름 놓은 셈이죠."
"그래요. 다행이네요."
목례하려는데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그러면 저희는 오늘 임무가 없는 거군요. 맞습니까?"
대통령 민정우와 비서실장 안준규가 나를 돌아본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그렇군. 좀 쉬겠는가?"
"아닙니다. 쉴 수 없죠. 점심도 배부르게 먹었으니 슬슬 저희 임무를 개시해야 될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 안준규가 아, 하더니 말했다.
"밖에 생존자가 있겠나?"
"모릅니다. 수색해봐야죠. 3,4,5팀은 급유임무를 마치고 각자 수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비서실장 안준규가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래. 뭐 필요한 건 없는가?"
특임대장 성규혁이 잠깐 생각해보더니 살짝 웃었다.
"무기는 있고... 무전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없으니 폰으로 해야 되겠죠."
"그래. 그렇군."
비서실장이 웃으며 특임대장의 어깨를 짚어주는데, 대통령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쪼록 조심하시게. 다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돌아와. 이미 훌륭한 대원을 셋이나 잃었다. 더 잃지 않도록 애써주게."
특임대장 성규혁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성규혁이 내게 목례하곤 계단을 탁탁 올라간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목례하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모텔을 나왔다.
햇살 좋네.
좀 덥긴 해도.
그나저나, 꽤 나쁘지 않은데.
이대로만 가면 종말을 견뎌 낼만한 세력은 금방 구축할 수 있겠어.
몇몇 민간인 제외하곤 다들 전문가 냄새가 풀풀 난다. 인성도 괜찮은 것 같고.
중형마트에서 힘을 죄다 소모하곤 피를 뒤집어 쓰고 오는 길이었다.
사람들을 부축하고, 또 업고 오는 2팀 특임대원들을 만났다.
...생존자들이다.
그들이 날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서둘러 걸어가 물었다.
"사람들이 아직 있었군요."
특임대장 성규혁이, 그리고 다른 대원들의 표정이 안 좋다.
성규혁이 말했다.
"굶어죽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 사람들도 상태가 안 좋아요. 서둘러 지역을 수색해야 됩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업히고 부축받은 사람들, 젊은 남녀다.
건강한 사람들이라 여지껏 버틴거다.
아마도 늙거나 어린애들은 지금쯤 대부분 굶어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좀비 되어버렸거나.
눈도 겨우 뜰까 싶은 반죽음 상태의 생존자들을 살펴보곤, 성규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안 좋다.
죄송합니다, 라고 중얼거리는 대원도 있다.
...죄책감?
왜?
난 멀어져가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의문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지속적으로 발생한 소규모 좀비 웨이브.
우리동네엔 그나마, 바퀴벌레들 아니라도 군데군데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긴 했다.
대걔는 비명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런 소리가 계속적으로 들려올 만큼 어딘가에서는 파밍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긴 아니다.
비명이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간밤에 들었던 한 번.
그걸로 끝이다.
좀비 웨이브가 흩어지고 또 발생했다 흩어지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점포들이 놈들로 가득 들어차버렸다.
보통 사람은 그 누구도 이 지역에서 파밍할 수 없다.
뭔가를 해볼려고 헬기를 띄우고, 경비행기를 띄우고 했던 일들이, 오히려 이 지역의 생존자들을 굶겨죽이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거다.
특임대원들의 표정에 들어있던건 그거였다.
생존자들을 구하고싶어 한 일이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난건, 그들로서는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구할려면 무기가 필요했다. 무기를 구할려면 내가 필요했고, 나를 찾고 영입할려면 헬기와 경비행기를 띄워야 했다.
헬기와 경비행기를 띄우니,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이 지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특임대원들이 수색하는 대부분의 집에는 그저 아사한 시체들만이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난 허리에 손을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사람들이고, 좋은 의도였다.
그렇다고 결과가 항상 좋게 나오진 않는다.
이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종말일 뿐이다.
입가에 피가 스며들었다.
모아다 바닥에 탁, 뱉고는, 검자루에 손을 얹고 걸어갔다.
...쉬자.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하는게 그들의 임무다.
구한 사람들 먹을 수 있도록 마트를 확보해 두는게 내가 할 일이다.
회복하자.
석양이 진다.
중형마트, 3분의 1쯤 정리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하루쯤 더 걸리겠어.
돌아가는 길에 수현이에게 전화했다.
"오빠아아아..."
"어, 수현아. 저녁은 먹었어?"
"몰라아아... 언제 와아아..."
난 피식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