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귀엽네.
"하루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지금 여기 주변정리 좀 하고, 사람들 구조하고 있거든. 조금만 더 기다려. 가능한 빨리 돌아갈게."
"싫어어어어... 바람필거야아아..."
"까불래?"
"이잉."
난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얌전히 있어. 내일 돌아가니까, 맛있는거 먹으면서 기다려. 알았지?"
"알았어어어..."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되냐."
"뭐가아아아... 재밌잖아아아아..."
거짓말하는건 아닐거다.
이 요상한 말투에 재미붙은거다.
난 웃고는 말했다.
"그래. 쉬고, 또 연락할게. 끊는다."
"시러어어어..."
전화를 끊었다.
"참 나."
혼자 키득거리고 웃으며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곤 모텔로 돌아갔다.
들어서니 제법 부산하다.
사람들이 그릇 같은걸 들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로비에 앉아있던 송규태 중사가 날 보곤 일어섰다.
"아, 성훈씨 왔습니까?"
"예. 좀 바쁘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송규태 중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방금 큰 냄비에 죽을 다 쑤었거든요. 영양제랑 같이 갈아넣고 새로 들어온 분들 나눠주고 있는겁니다."
"아아."
역시 상태가 많이 안좋았구나.
송규태 중사가 말했다.
"어제 약국 털어오길 잘했습니다. 저 분들 대부분 영양실좁니다. 좀 가벼운 사람도 있고 심한 사람도 있고 그렇다고 하는데, 저야 뭐 의사가 아니니 눈으로 봐도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의사가 있습니까?"
송규태 중사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중엔 없고, 새로 구출되어 온 아줌마 하나가 이 동네 산부인과 의사라고 하더라고요."
산부인과 의사라?
외과의나 응급의면 지금 상황에선 더 좋았을 것같다.
송규태 중사가 말했다.
"근데 그 아줌마, 살아날지 모르겠습니다. 상태가 제일 안 좋습니다."
"그래요?"
"네."
흐음...
어제 김대위가 말했었지.
요즘 죽는사람 한둘이냐고.
나도 하도 많이 죽이고, 또 죽은 사람도 많이 봐서 그런지 별 감흥은 안 든다.
그저 어떤 사람이 죽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전 좀 쉴게요."
"네. 쉬십쇼."
1층에 마련된 내 방에 들어가니 침대에 새 옷이 놓여있다.
비서실장이 갖다 둔건가?
청바지에 흰 티.
난 옷을 잠시 바라보다 욕실에 들어갔다.
씻은 후 내 리프팅 벨트를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열어보니 박대위와 김대위다.
손에 맥주를 들고있다.
대원들이 편의점 털면서 술도 한바가지 들고 왔나보네.
"성훈씨. 술 드십니까?"
그러며 김대위가 캔맥주를 든다.
물방울이 맺혀있다.
틀림없이 시원한거다.
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입술에 미소가 걸린다.
"들어오시죠."
대위들은 욕실 바닥 옆에 뭉개져 있는 내 피묻은 옷을 한번씩 쳐다보고 들어왔다.
그들이 들고 온 것은 맥주와 새우깡.
"성훈씨 덕에 요 며칠간 꽤나 많은게 좋아졌습니다. 조촐하게 환영이나 할까 해서요. 자아, 받으시죠."
"감사합니다."
우린 바닥에 앉아 맥주를 나눠들곤 뚜껑을 땄다.
칙.
올라오는 하얀 거품.
난 얼른 입에 갖다댔다.
입술에 닿아 흐트러지는 거품을 들이키며, 시원하게 들어오는 맥주를 꿀꺽대며 삼켰다.
온 몸이 시원해진다.
"하아. 좋네요. 술 먹은지 꽤 됐는데."
대위들이 각자 맥주를 들이키곤 눈을 질끈 감는다.
표정 보니 딱 나온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참은거다.
나하고 한 잔 하려고.
굳이 소주가 아닌 이유는 아마도 계속적으로 작전을 해야하니 너무 취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캔맥주도 딱 세개 들고온 걸 보면 틀림없다.
"성훈씨는 그래, 원래 뭐 하던 사람입니까? 특임대장이나 대원들 말 들어보니까 칼솜씨가 기가 막히다던데. 심지어 활도 잘 쏜다고."
으음.
이런걸 설명해야할 때마다 난감하단 말이야.
난 그저 미소짓고는 말했다.
"아, 어릴 때부터 무술 같은걸 좋아해서 좀."
"아, 무술. 원래 운동하고 그러는걸 좋아했나보죠?"
"예."
전혀 아닌데.
집에 앉아서 전략시뮬이랑 턴제시뮬 하는게 낙이었는데.
난 웃고는 물었다.
"두 분은 어떻게 합류하게 되신겁니까?"
김대위가 맥주를 마시곤 말했다.
"카아. 음. 나 원래 제주도 살던 놈이요."
"제주도요?"
김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도. 원래 제주도 사람은 아닌데, 뭐,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음.
물어봐 달라는 것 같은데.
셋이서 앉아 새우깡에 맥주 먹고 있는데, 그런 시시콜콜한 신변잡기 같은걸 얘기 안 하면 무슨 얘길 할려고?
종말에 사람 얼마나 죽고 그런 우울한 얘기?
난 피식 웃고는 물었다.
"이야기 들을 시간은 있지요. 자정까지는요."
"자정에 또 가십니까?"
"예. 저 마트 싹 쓸어놔야죠. 아마 내일 오후나 돼야 될 것 같습니다만."
말 없던 박대위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놈들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마트 안에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죠. 웬만해선 접근해선 안 됩니다. 거기 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들도 전부."
"...대단하군요. 그런 곳을..."
박대위의 목소리는 꽤 낮고 중후하다.
꽤 듣기 좋은데. 성악가라고 해도 믿겠다.
난 그저 미소짓고는, 맥주를 다시 들이켰다.
시원하다.
"그런데 두 분, 가정은 없으십니까?"
...아.
생각이 짧았다.
이 상황에 가족도 없이 아저씨 둘 뿐이면 뻔한데.
김대위가 씁쓸하게 웃더니 말했다.
"아내는 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김대위는 미소지었다.
"이 일 터지기 전에. 옛날에 죽었어요. 유방암으로."
...아아.
웬지 다행인걸.
아니, 와이프 죽은게 다행이라는게 아니라.
김대위가 맥주를 들이키더니 말했다.
"난 원래 군에서 헬기를 몰았습니다. 아내도 그 시절에 만났고. 결혼하고 이제 승진 기다리는데, 유방암에 덜컥 걸려버렸어요."
김대위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수술은 했는데, 아무래도 다 잘라버리니까. 마누라가 우울증이 오더라고. 나중에 은퇴하면 제주도 가서 살자고 둘이서 얘기하고 했었거든. 그래서 다 접고 제주도로 내려가버렸죠. 그러고 몇년간 둘이서 잘 살았어요."
그러고보니 이 사람, 왼손에 반지를 끼고있다.
김대위가 말했다.
"몇 년 뒤에 재발해서 항암치료 받다가 죽었어. 그러고 뭐, 배운 재주가 헬기 몰던 거 뿐이라 일이나 좀 그 쪽으로 해볼려고 했는데, 못 하겠더라고. 마누라 생각이 나서. 그래서 그냥 귤농사 하는데 가서 노가다 하고 그렇게 소일거리 하고 살았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김대위가 말했다.
"그러다가, 지지난달에 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셨어요. 장례 치르고 다시 제주도 돌아갈려고 했는데... 뭐, 여기에 와 있네요."
김대위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와서 대통령 만나고, 다시 대위가 됐지. 군대도 없는 마당에 대위고 뭐고가 무슨 소용이냐 싶긴 한데, 일단 김대위라고는 다들 부르고 있습니다. 그냥 민준씨나 민준이 형님이라고 해도 좋아요. 편하게 불러요."
"아, 네."
으음.
모인 사람들 사연이야 다들 각각 있겠지.
난 박대위를 돌아봤다.
김대위가 웃고는 말했다.
"이 친구는 자기 얘기를 거의 안 해. 나처럼 다시 돌아온 것만 알아요."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맥주를 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물으면 안되겠지.
"그래, 성훈씨는 일 터지고 어떻게 지냈어요? 그쪽에도 사람 많다며? 얘기 좀 해봐요."
난 미소짓고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숙집에 들어가 인라인 사람들을 만났고, 바퀴벌레들이란 놈들이 있었으며, 어떻게 좀비웨이브가 들이닥쳤는가 까지.
김대위와 박대위는 바퀴벌레들에 대해 꽤나 흥미진진하게 듣는 것 같았다.
놈들이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그렇게 몇시간을 이야기나누며 맥주를 즐겼다.
이런 시간은 꽤 간만에 가져본다.
편한걸.
* * *
자정 무렵에 다시 한 번 힘을 모두 쏟아부었다.
마트에 몰려있던 놈들은 절반 정도 쓸어놨다.
레벨 20.
힘 65.
느리다.
하지만, 성장하고 있다.
모텔로 돌아오니 훤칠한 미녀가 로비 소파에 앉아 파워에이드를 마시고 있었다.
특임대장의 동생, 성가연이다.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아놓고는 다리를 쭉 뻗고있다.
"아, 성훈씨. 오셨어요?"
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피칠갑한 모습이었으니.
난 피식 웃고는 벽에 기대섰다.
어깨에 닿은 곳에 핏자국이 좀 생기겠지만, 어차피 걷느라 발자국도 핏물로 생기는 마당에 그냥 개의치 않기로 했다.
"왜 여기 있습니까? 잠이 안 와요?"
물으며, 손을 바지에 쓱쓱 닦아내곤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성가연이 피식 웃곤 말했다.
"하루종일 잠밖에 안 잤더니 도저히 잠이 안 오네요. 저도 한 대 주실래요?"
"담배 피워요?"
"군에서 배웠어요. 좋은건 다 군에서 배우잖습니까?"
재밌네, 이 여자.
난 웃고는 담배갑을 흔들어 한 까치를 빼꼼 빼내곤 내밀었다.
각자 불을 붙이고 시원하게 한모금 빤다.
맛 좋네.
놈들을 수십마리씩 살육하고 난 뒤에 담배맛은 꽤 각별하지.
"다리는 좀 어때요?"
"아직 아픕니다. 그래도 걸을 만은 해요. 진통제를 하도 바르고 먹어놨더니 제정신도 아니고요."
"넘어지지만 맙시다."
난 웃으며 말하곤 모텔 안쪽으로 턱짓했다.
후우-
"사람들은 좀 어때요? 기운 좀 차렸답니까?"
성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진 분도 있고, 아직 좀 더 회복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데 이제 슬슬 모텔이 모자랄 것 같아요."
"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성가연의 말이 옳다.
사람들을 구하겠다.
모텔 하나로?
모자라다.
난 담배를 빨고는 말했다.
"그 문제도 천천히 해결해 봅시다. 가연씨는 일단 다리부터 빨리 낫고요. 같이 작전 나가야죠. 맨날 누워있을겁니까?"
성가연이 날 흘겨보며 웃더니 말했다.
"그거, 저한텐 거의 유혹하는 말이나 마찬가집니다?"
이 여자가?
난 웃었다.
소리내어서.
검을 내리쳐 핏물을 빼냈다.
촤악!
도로 위 길게 그어놓은 붉은 선이 점점이 흐트러지며 여름 오후의 태양을 반사한다.
난 뒤쪽을 힐끗 쳐다봤다.
수백구의 시체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중형마트.
거의 이틀에 걸쳐 싹 쓸어놨다.
현재 레벨은 23.
힘, 68.
난 검을 검집에 넣고, 도로를 타박타박 걸었다.
햇살이 좋다고 해야되나, 찌른다고 해야되나.
뜨겁다.
폰을 꺼내 특임대장 성규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성훈씨."
"구조작전은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살짝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굶어 죽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조하고 있어요. 성훈씨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시체 치우는데 사람 깨나 필요할 겁니다."
"정리 다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