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규혁의 목소리는 꽤나 반가운 눈치였다.
모텔에 생존자들이 늘어갈수록 식량소모도 가속화 된다. 편의점 하나 털어놓은 걸로는 일주일도 채 못 버틴다.
이미 하루가 지날 때마다 음식이 뭉텅이로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난 미소짓고는 말했다.
"네. 이제 빈 집입니다. 들어가서 갖고 나오기만 하면 돼요."
"수고하셨습니다. 정말로요. 어젯밤에 대통령께서 물자수급을 위해서라면 본인께서도 직접 나가겠다 하셨습니다. 아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나갈겁니다."
"그거 잘 됐군요."
대통령까지 팔 걷어부치고 나선다니, 다른 사람들은 볼 것도 없겠네.
난 물었다.
"특임대는 구조활동에 전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루가 늦어지는 만큼 살아날 수 있는 사람도 죽게 될 테니까요. 유사시에 무기를 다룰 수 있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외부로 도는게 좋지 않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성훈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으음.
이 이상 늦어지면 수현이가 삐지겠지.
난 피식 웃었다.
"전 이제 돌아가봐야죠. 집을 너무 오래 비우면 우리쪽 사람들이 좀 불안해 해서."
"그래요... 아쉽군요. 저희쪽에서도 성훈씨가 좀 더 활약해주시면 감사하겠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건 솔직히 나도 원하는 바다.
좀비 웨이브가 도시를 덮쳤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 했지만 난 오히려 편안한 심정이었다.
렙업하느라 여기저기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경험치가 제 발로 나한테 와 주는데 편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그런 면에서 여기는 내겐 거의 완벽한 사냥터다.
몇 회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하늘에 띄워올린 경비행기와 헬기에 의해 발생한 소규모 좀비 웨이브.
놈들에 의해 꽉꽉 들어차있는 점포들은 내겐 그저 잘 차려진 밥상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살던 도시에도 좀비 웨이브가 한 번 쓸고 가서 어느정도는 내 경험치 셔틀들이 회복되어 있을거라고 생각은 드는데, 솔직히 여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
좀비들이 들어차고, 들어차고, 또 들어차서 아예 빈 틈조차 없는 점포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아까울 정도다.
가능하면 잠은 집에서 자고, 사냥은 여기서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뭐, 차도 없고 있다 해도 도로 여기저기가 막혀 쓸 수가 없는데다 괜히 소음만 일으켜대니 출퇴근하긴 좀 어렵지.
왜 하필 반포냐고.
애매하게 멀어갖고 젠장.
그 때, 눈에 뭔가가 띄었다.
인도 쪽.
종말 이후 발생했음이 틀림없는, 검게 굳은 핏자국들.
자국들 위에, 자전거가 누워있었다.
"...흠."
...자전거라?
"네, 성훈씨. 뭔가 말씀하셨습니까?"
"아, 네."
난 미소지었다.
"나도 여러분이 사람들 구조하는걸 돕고싶습니다."
사실 그런건 별로 관심 없다.
사람들 구하는게 관심 있었으면 우리 도시에서도 사람들 구하고 다녔겠지.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다.
이 사람들이 뭔가 할려고 하니 그냥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 내 관심사는 처음부터 무기를 구하는 것, 그리고 렙업이었다.
난 말했다.
"앞으론 출퇴근 하도록 하죠."
"출퇴근 말입니까? 너무 멀지 않습니까?"
난 미소짓고는 자전거를 향해 걸어갔다.
인도와 도로 사이에 애매하게 엎어져 있는데다, 문에 A4용지가 가득 붙어있는 부동산 업체가 맞은편이라 안에 있는 놈들은 나를 볼 수 없다.
난 자전거를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날렵하게 생겼네.
바퀴도 크고.
체격 좋은, 혹은 키가 큰 사람이 탔었나본데.
건너편에 킥보드도 보인다.
...흐음.
킥보드라?
난 어깨를 으쓱하곤 자전거를 몰아 도로로 걸어갔다.
킥보드도 좋긴 한데, 체력단련 겸 자전거로 가지 뭐.
체력은 중요하다.
스킬로 보조받곤 있어도, 칼질을 하고 활질을 하고 하는데 여전히 스테미너가 드는데다 렙업하면 할 수록 킬카운트도 늘어나니 체력훈련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난 자전거에 올라타며 말했다.
"운동삼아 왔다갔다 해보죠 뭐. 그 부분은 염려 마시고, 규혁씨는 구조활동에 전념해 주십쇼."
오오.
내 몸에 딱 맞는데.
상체가 앞으로 굽는다.
자전거는 간만인걸.
특임대장 성규혁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지금 가연이한테 전화해서 성훈씨 몫 챙겨두라 하겠습니다."
내 몫.
무기. 당연히 챙겨야지.
난 미소지었다.
"네. 부탁드립니다."
"지금 바로 가십니까?"
"네. 받아서 바로 가려고요. 내일 봅시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흐음.
뜻밖에 직장 같은게 생겨버렸네.
난 피식 웃고는 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전거를 달렸다.
여름 오후.
뜨뜻한 바람이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모텔로 돌아가자 로비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있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성가연, 대령들과 중사를 비롯한 다른 민간인들.
사람들이 나를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대통령 민정우가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우리 특임대장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집에서 왕복하실 생각이시라고요. 힘드실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난 미소지었다.
"괜찮습니다. 집을 너무 비우면 우리쪽 사람들이 걱정해서요. 가봐야죠."
대통령 민정우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래요... 그쪽 사람들은 거기서 편안히 잘 계시는가요? 혹시 뭔가 불편하진 않으실까요?"
으음.
이 쪽으로 이사오라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네.
하지만, 우리 대형마트 건물.
꽤 장기간에 걸쳐 보강해 거의 요새가 되었는데 그걸 그냥 두고 여기로 이사올 수는 없지.
겨우 모텔 하나잖아.
난 미소지었다.
"네. 괜찮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사하란 말 집어넣어라.
"그나저나 슬슬 새로운 거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난 그렇게 말하곤 대통령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좀 회복됐는지 젊은 남녀가 보였다.
얼굴은 아직 핼쓱해도 움직일 정도는 됐나본데. 저 사람들 이외에 다른 구조된 사람들은 아직 누워있나보네.
방이 모자라다.
비서실장 안준규가 다가왔다.
"그렇습니다. 슬슬 그 이야기를 성훈씨와 할까 하던 차였습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전 그저 도움을 드릴 뿐입니다. 후보지를 선정해 두시면 제가 거기 정리하는걸 돕겠습니다."
이게 뭐냐면 철벽치는거다.
우린 같은 그룹이 아니야.
당신들 일은 당신들이 알아서 해.
난 렙업하러 올 뿐이다.
그 과정에서 대충 서로 도울게 있으면 도울 뿐.
대통령과 비서실장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둘 다 정치가라 내가 어떤 의도로 말했는지를 금새 눈치챈다.
송규태 중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후보지는 있긴한데 말입니다. 아예 서래로 여기 블록에 바리케이트를 쳐서 구역 전체를 막아버리면 어떻겠습니까?"
흠.
구역 전체라?
나쁘지 않은데?
그리고 한가지 더 알게된 것은 송규태 중사는 전혀 정치가가 아니라는거다.
너희 그룹에 깊게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놓은 사람한테 저런 질문을 상의하는 시점에서 아예 그런 감각이 없다.
이 사람은 그저 성실한 군인이자 정비사일 뿐이다.
난 미소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통령 민정우가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송중사. 그 얘기는 차차 하도록 하지."
으음. 눈치 빨라, 대통령.
대통령 민정우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출퇴근길이 힘드신 날에는 언제든 쓸 수 있도록 방 하나는 비워두겠습니다. 요 며칠,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성가연이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박대위와 김대위가 각자 더플백을 들고있다.
성가연이 말했다.
"수고했어요. 또 볼 수 있는거죠?"
"네. 아마 매일요."
"그러길 바래요."
내게 손을 내밀어 온다.
난 성가연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박대위와 김대위가 내게 더플백 두 개를 내밀었다.
"갖고 온 무기가 제법 많은데, 혼자 다 들고 갈 수 없지요? 일단 두 개 드리고, 올 때마다 또 드리겠습니다."
술자리 때와는 다르게 꽤 정중하네.
난 끄덕이곤 더플백 두 개를 받아들어 어깨에 맸다.
대통령 민정우가 말했다.
"이 무기는 성훈씨가 아니었으면 우리로서도 구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언제든 필요하면 함께 쓰도록 합시다."
비서실장 안준규가 한마디 거들었다.
"평택 갈 때도 함께 하셔야죠?"
으음.
평택은 놓칠 수 없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언제쯤으로 생각하십니까?"
비서실장 안준규가 말했다.
"글쎄요. 우리 특임대원들과 상의를 해봐야 되곘지만, 일단은 우리 구역을 좀 안정시키고 가는것지 좋지 않겠나 싶습니다."
대통령 민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여기 사람들을 구하는게 먼저야. 성훈씨. 내 비록 나라 전체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만, 내 손 닿는 한에서는 가능한 구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으음.
사람들 구하고 싶다.
참 일관성 있네, 대통령.
비서실장 안준규가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경비행기도 헬기도 띄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구조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거지 후보가 정해지면 말씀주십쇼."
대통령 민정우는 내 손을 그제야 놓아주었다.
"성훈씨.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내일 꼭 또 와 주십시오."
난 사람들에게 목례하고는 모텔을 나섰다.
으음.
성가연이 손 흔드는게 머리에 남는데.
모델같은 몸매에 훤칠한 미녀라...
난 고개를 젓고는 자전거에 올랐다.
나도 참 나다.
돌아가자.
내 여자들에게, 내 사람들에게.
난 피식 웃고는 페달을 밟았다.
"잘 다녀와? 차 조심하구? 다치지 말구?"
"그래."
무슨 어린애 다루듯 하네.
난 내 허리에 리프팅벨트를 채워주고 있는 수현이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저녁때 뭐 먹고싶어?"
"너 요리할줄 모르잖아."
"예은이한테 배웠어."
수현이가 내 배를 주먹으로 툭 친다.
위로 흘겨보는게 귀엽다.
난 웃으며 수현이의 젖을 어루만졌다.
"너 먹고싶은걸로 차려."
"와사비 간장밥."
...으음.
사람 먹는거 맞나 그거?
"너... 그런거 먹고 다니냐?"
"이잇."
이번엔 정강이를 찬다.
난 키득거리며 웃고는 집을 나섰다.
1층에 내려가보니 여자들이 바글바글하다.
더워서 그런가 아이스크림이 인기네.
그런데 슬슬 다 떨어져갈 텐데, 아이스크림.
근처에 남은 편의점이라도 좀 쓸어둘까.
나중에 여유되면 해두지 뭐.
"다녀올게."
수현이가 내게 손을 흔든다.
"다녀오십쇼, 선생님!"
훈이 아재가 마누라랑 같이 장바구니 들고 나오다 나를 발견했다.
손을 힘차게 흔드는게 참.
옥상을 보니 경계를 보고있던 준혁과 태영이 각자 소총을 어깨에 멘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저기서 나 들으라고 소리를 지를 순 없겠지. 손을 흔들어오길래, 나도 흔들어줬다.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는다.
서래마을 가는 길.
벌써 일주일째 이 길을 출퇴근하고 있다.
자전거가 체력단련에 딱히 도움되는지는 아직 체감을 못 하겠다. 체력 100 업적 스킬로 보조받고 있으니 한참 달려도 거의 지치지도 않고.
정부세력이라고 해야하나.
특임대원들이 지속적으로 구조활동을 벌인 결과 서래마을 세력은 이제 제법 커졌다.
인구 100여 명에 달하는, 지금 상황에선 꽤나 대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헬기와 경비행기를 거의 띄울 일 없게 되어 한가해진 송규태 중사가 중심이 되어, 서래마을의 모텔블록엔 대대적인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블록들 전체를 벽 삼아, 뚫려있는 골목길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차를 밀어 틀어막아버린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구해놓은 자재를 차곡차곡 쌓아올려 바리케이트를 친다.
그걸로 좀비 웨이브를 모두 막아내긴 아마 어려울거다.
하지만 영원히 버틸 필요는 없다.
좀비 웨이브는 소음이 발생하면 날뛰다가 조용해지면 얼마 못 가 다시 잠잠해진다.
그러고는 어디론가로 기어들어간다.
잠잠해질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거다.
그런 용도의 바리케이트로는 꽤나 훌륭하게 잘 쌓아올리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블록들에 바리케이트를 모두 두르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작업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을 주거시킬 근처 호텔과 빌라, 그밖에 점포와 건물들을 청소하고 다닌 결과 레벨도 제법 올랐다.
현재 레벨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