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생각이 비슷하구만.
난 웃고는 말했다.
"난 지뢰 같은걸 좀 생각했는데, 기관총도 좋네. 가서 가져올 수 있는건 전부 가져오죠."
"오오, 지뢰!"
남자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뭐, 이만하면 이심전심이네.
반대로 여자들은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난 말했다.
"지금같은 일상을 앞으로도 보내려면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예전 좀비 웨이브같은게 다시 오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이."
난 옥상을 둘러봤다.
텃빝에선 어느새 새싹이 올라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난 미소지었다.
"세상이 이렇게 된지 벌써 두달이 넘었어요. 앞으로 살아가려면 필요한게 많습니다. 대통령은 전기와 물을 이야기하더군요. 우리한테 필요한게 그거죠. 살아갈려면요."
난 사람들을, 특히 수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자주 나가게 될겁니다. 하지만 항상 돌아올테니 걱정말고, 지금같은 일상을 앞으로도 살아가는 것만 생각합시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마음까지 절망적이어선 안 되잖아요? 힘내서 삽시다."
"옳소!"
준혁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연달아 박수를 친다.
나도 모르게 연설 같은걸 해버렸네.
으음.
이튿날 아침.
생수와 에너지바, 초콜릿을 담아 둔 백팩을 메고 건물을 나섰다.
1층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자전거에 올라, 서래마을로 향했다.
서래마을.
바리케이트 위에서 보초서던 특임대원이 사다리를 내려준다.
타고 올라가 물었다.
"다들 준비는 됐습니까?"
"지금 대통령께서 뭔가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으음, 연설이라.
대통령이니 나보다 낫겠지.
"헬기로 간다고 했는데, 좀비웨이브 오는건 대비 잘 했고요?"
특임대원이 씩 웃고는 모텔 옥상을 가리켰다.
특임대원 한 명이 소총을 들고 경계하고 있다.
"주요 건물마다 병력을 올려놨습니다. 그밖에 군필자 분들이 자원해서 건물방어를 맡아주셨고, 대비는 할 만큼은 해둔 것 같습니다."
"잘 됐네요."
그걸로 지켜질 수 있길 바란다.
난 사다리를 내려가 모텔로 걸어갔다.
모텔 앞엔 특임대원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배웅하는 대통령과 민간인들이 마주보고 서 있다.
"여러분의 용맹성을 저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명심해주셨으면 하는 점은 작전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개개인의 목숨이 우리에겐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흠.
의외인데?
대통령이 연설하는거면 좀 더, 나가서 목숨 걸고 싸워라! 이런 소릴 할 줄 알았는데.
대통령이 말했다.
"저기 성훈씨가 오는군요. 우리의 용맹한 영웅, 한성훈씨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박수를 친다.
난 피식 웃고는 특임대원들 옆으로 걸어갔다.
대통령이 말했다.
"성훈씨도 오셨지만, 무엇보다 여러분. 꼭 명심해 주십시오. 우리의 일상을 지키는 것은 손에 든 무기가 아니라 여러분 하나 하나의 삶입니다. 다치지 말고. 죽지 말고. 살아서. 꼭 살아서 돌아와 주십시오."
대통령은 팔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
"여러분도 아실겁니다. 저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자식도 잃었습니다. 제게 남은건 여러분 뿐입니다. 여러분이, 그리고 살아남은 모든 분들이 제게 남은 가족입니다."
대통령은 특임대원들과 뒤에 서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숙연해진다.
정치로 뼈가 굵은 사람이라 그런가, 분위기를 잡는 방법을 안다.
대통령이 한 걸음 나서 특임대원들의 손을 잡아주기 시작했다.
대통령과 악수할 때마다 특임대원들이 목례를 보낸다.
성규혁과 성가연도 대통령과 악수하곤 가볍게 목례했다.
경례가 어울리지 않겠나 싶기도 한데, 절차 같은건 가볍게 생략하기로 했나보다.
나 없는동안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는지는 나도 모르지.
대통령이 내 앞으로 왔다.
"성훈씨. 부디 살아서 돌아와 주십시오.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며 내 손을 잡는다.
이 노신사는 손이 참 따뜻하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통령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대원들의 안전도 좀 부탁드립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멀어진다.
난 대답 대신 가볍게 목례를 보냈다.
특임대원들과 모두 악수를 나눈 대통령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우렁차게 말했다.
"차렷. 대통령께 경례."
척!
발소리가 일시에 울린다.
그리고, 일제히 이마에 손을 올렸다.
대통령이 대원들을 향해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가 내리자, 대원들도 일제히 손을 내렸다.
난 검자루에 손을 얹은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런 거였구만.
멋진걸.
난 군인도 아니고, 될 생각도 없다.
이 사람들은 나하곤 다른 세력이다.
대통령이라곤 해도 경례를 올릴 생각 같은건 없다.
그래도, 이런 예식은 보기에 참 멋지단 말이야.
대원들이 몸을 돌려 바리케이트로 걸어간다.
"잘 다녀와아."
젊은 여자가 특임대원을 향해 손을 흔든다.
눈가를 쓱 훔치기까지 한다.
내가 모르는 새에 구해준 여자랑 특임대원 하나가 사귀게 되기라도 했나본데.
잘 생긴 특임대원이 뒤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으음.
전쟁터 나가는 남자들 배웅하는 가족들같네.
하긴.
우리가 갈 곳은 전쟁터다.
바리케이트를 넘어 세빛둥둥섬을 향해 우리는 걸었다.
성가연이 천천히 뒤쳐지더니 내 곁에 섰다.
"식구들한테 유서는 써놓고 왔어요?"
"유서요?"
되묻는 나를 향해 성가연이 웃으며 말했다.
"우린 다 쓰고 왔는데?"
...진짜냐?
난 앞서 걸어가는 특임대원들을 바라봤다.
다들 말은 안 한다.
그저 사람들에게 등을 보이고 걸어갈 뿐이다.
성가연이 말했다.
"이젠 의사도 병원도 없어요. 물리면 그 날로 끝이죠. 유서 정도는 남겨둬야죠?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애초부터 난 악에 면역인데다 웬만한 세력은 혼자 쓸어버릴 수 있으니 놈들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다르다.
피부에 이빨 긁힌 자국이라도 슬쩍 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그런줄 알고 가는거다.
대통령의 연설.
대통령이 내게 부탁한 말.
그리고 유서.
다들 죽는걸 각오하고 가는거구나.
그래서 전쟁터 나가는 사람들 배웅하는 모습이었던거야.
참...
혼자 학살하고 다니다보니 지금 상황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떨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난 성가연을 돌아봤다.
"유서엔 뭐라고 썼습니까?"
성가연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쓸 말이 없어서 아무말 대잔치 써놨죠."
"아무말 대잔치?"
"네."
성가연이 웃으며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남자 실컷 만나고 연애도 실컷 하고 군대 같은건 절대 안 갈 거라고요. 그리고 마지막엔 씨발, 나 죽었어 이 새끼들아! 좆까 씨발! 이라고 써놨죠."
나만 피식거리고 웃은게 아니다.
앞서 가던 특임대원들도 어깨를 슬쩍슬쩍 떤다.
...죽기엔 아까운 사람들인데.
그래.
대통령이 부탁한거.
한 번 애써보자.
우린 새빛둥둥섬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 헬기에 올라탔다.
대기하고 있던 박대위와 김대위가 우릴 돌아본다.
"다들 준비됐나?"
특임대장이 대원들과 나를 하나 하나 돌아보더니, 박대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대위가 말했다.
"거기 박스 안에 귀마개 있어. 꽤 시끄러울테니 귀에 꽂아."
그러며 헬기를 조작한다.
기이이이잉-
엔진이 가동된다.
박대위가 말했다.
"출발한다."
엔진소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기관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뒤에 놓인 박스에 쌓여있는 주황색 귀마개.
우린 각자 그걸 귀에 꽂고는 창 밖을 내다봤다.
헬기가 떠오른다.
풍경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간다.
헬기소리는 시끄럽다.
귀마개를 하고 있어도 소리에 밀려 몸이 덜덜 떨릴 정도다.
마치 바로 옆에서 기관포를 난사하는 것같다.
"상태."
이 소음에선 어차피 아무도 못 들으니 상관없지.
서래마을에서 거의 한달 가까이 사냥했더니 벌써 레벨 94가 되었다.
주요 스텟들은 죄다 100.
남은건 민첩과 지능 뿐이다.
다음에 고를건 어차피 마음 속으로 정해놨다.
지능은 아직 열리지 않은 미지의 전문화일 것이고, 그렇다면 남은건 민첩 뿐.
4점이던 민첩에 5점을 넣어 9로 만들어 놓고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서 벗어나자 상태창이 사라진다.
헬기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산과 들과 도시들을 지나쳐 날아가고 있었다.
위에서 보면 땅과 강과 산이 움직이는게 느릿하지만, 잠깐 딴 데 보고 다시 밖을 내다보면 풍경이 바뀌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평택 미군기지까지 한시간도 안 걸렸다는거다.
하늘을 직선으로 날아갔기 때문인건지, 아니면 헬기가 원래 그렇게 빠르기 때문인건지 모르겠다.
조종석에서 박대위가 고개를 돌리고 뭐라고 외쳤다.
뭐라는거야?
하나도 안 들린다.
내 귀에 들리는건 헬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 뿐이다.
강풍이 맹렬하게 고막을 때리는 소리다.
귀마개가 거의 쓸모없어질 정도의 굉음.
쿠콰콰콰!
박대위가 뭐라고 외치며 앞유리를 삿대질한다.
김대위가 밖을 내다보더니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헬기는 기우뚱 옆으로 이동해갔다.
으윽, 젠장.
무슨 일이야?
기울어지는 헬기 속에서, 나는 밖을 내다봤다.
긴 활주로가 보인다.
활주로 옆으로 붙어있는 하얀 지붕의 커다란 건물들.
항공관련 건물들 같은데.
그리고, 그 옆으론 길고 두터운 범위로 눈에띄게 미국적인 거리가 나타났다.
키 작은 아파트같은 건물들, 미국식 주택들, 그리고 학교인지 싶은 건물들과 상점가 거리.
이게 군부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냥 미국의 어디 마을같이 생겼다.
뉴스에서 아프가니스탄 군부대 사진 같은걸 우연히 보거나 했을땐, 험비라든가 장갑차 등 전투차량들이 제법 있었는데.
그런걸 상상하고 왔더니, 젠장, 저건 뭐야?
수영장 딸린 리조트?
탱크는 없냐?
그런걸 찾아보고 있는데, 눈에 띄는게 있었다.
군부대를 구경하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
사람들이었다.
군복입은 군인들.
그리고 민간인들.
활주로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서로 겨누고 있는건...
...총...
인 것 같은데...
...뭐냐 이건?
왜 서로 총을 겨누고 있지?
아니, 그보다.
서로 삿대질하는걸 멈추고 우릴 올려다 보는데?
...맙소사!
미친!
저 밑에서 미친놈들이 우리한테 총을 겨누고 있다!
난 외쳤다.
"우릴 쏜다!"
내 옆에 앉아있던 특임대원이 입을 벌리고 뭐라고 외친다.
예? 안 들립니다!
라고 하는 것같다.
씨발, 뭐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조종석을 보니, 박대위가 좌우를 살피며 헬기를 조종하고 있다.
밑에서 우릴 쏘려고 하는건 아는건가?
지금은 왜 우릴 쏘려고 하는건지 따위는 상관 없다. 쏘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빨리 내려가! 내려가라고!"
힘껏 외쳐봤지만 무쓸모다.
콰콰콰콰!
미치겠네, 씨발.
헬기가 선회하더니 천천히 군부대를 벗어나 논밭으로 향했다.
난 밖을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