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87)

"할 얘기가 있어 찾아오셨다구요, 그러면 우리 앉아서 이야기 합시다. 나도 궁금한게 있으니. 랍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중년 미군 두 사람은 이미 의자에 앉았다.

내가 의자에 앉자, 성가연도 내 옆에 앉는다.

중년 미군이 말했다.

성가연이 내게 통역해 주었다.

"우선, 한가지는 분명히 해 둡시다. 우리 주한미군은 한국 영토를 공동으로 방위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젠 우리가 지켜야 할 한국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부군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한국엔 정부가 없습니다.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말입니다. 동의하십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미국도 정부가 없어졌습니까?"

중년 미군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성가연이 내게 통역했다.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건 정부와의 연락이 끊겼다는 것 뿐입니다."

...음.

고개를 끄덕이는데, 중년 미군이 말했다.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드리고 싶군요. 우리는 이 지역의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들이 원하는걸 제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임무가 있습니다."

"임무? 무슨 임무요?"

이 상황에?

정부 같은건 없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중년 미군의 말을 성가연이 통역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그 날. 디데이에 우리는 주한미군 총사령관, 스미스 대장을 잃었습니다. 제 손으로 대장의 머리를 쏴야 했어요. 이후로 이 기지는 제가 통솔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곳, 험프리스 기지의 목적은 오직 하나의 임무를 위해 존재합니다."

중년 미군이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려놓으며,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여긴 당신들의 나라입니다. 나라 같은건 이제 없지만 말입니다. 당신들도 당신들의 국민을,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는 욕망 내지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겠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국기에 국가를 수호하겠다 맹세한 군인들이오."

난 고개를 갸웃했다.

눈썹이 찡그려진다.

이 사람, 뭘 말하려 하는거지?

중년 미군이 말했다.

"디데이는 한미연합훈련이 한창이던 때입니다. 동해에 미해군 핵항모 링컨 항모전단이 있어요. 우리는 링컨 항모를 확보해, 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내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항모전단이라고?

한미연합훈련 같은거 전혀 관심 없어서 그런거 하는줄도 몰랐는데, 우리나라 동해에 그런게 정박해 있다고?

중년 미군이 말했다.

"이제 아시겠지요. 우리가 왜 이 지역 주민들에게 무기를 넘기지 않는지. 우리에게 이타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에겐 우리 국민을 지키고 구출하고 보호하겠다는 의무가 있는겁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임무요. 그러니, 지역주민들에게 우리의 무기를 내놓으라는 말은 우리로서는 들어줄 수 없습니다."

"핵항모..."

신음처럼 새나오는 목소리.

내 목소리 같지가 않다.

성가연이 나를 돌아보며 나직이 말했다.

"성훈씨. 어떡하죠? 아무래도 협조를 바라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대통령께 연락해볼까요?"

"특임대장이 지금쯤 하고있지 않을까요?"

"아아."

성가연이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임대장이 어떤 인물인데, 밖에서 그냥 담배나 피우면서 소일거리 하고 있을 리 없지.

이미 보고는 되고 있을거다.

그때 미군지휘관이 뭔가 말했다.

난 성가연을 돌아봤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정부라고 하셨으니 대통령께서 무사하시다는 뜻이겠지요. 상황이 이러니 축하라고 말씀드리긴 어렵겠군요. 듣자니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 험프리스 기지에 왔다고요. 어떤 임무입니까?"

으음...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되나.

자칫하면 주민 생존자 그룹과 입장이 똑같아 지겠는데.

난 잠시 생각해보다 말했다.

"우린 이 기지가 비었을거라 여겼습니다. 한국을 수복하고 사람들을 구조하는데 필요한 화력을 여기서 보완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미군 지휘관이 씁쓸하게 미소짓더니 말했다.

"우리가 살아있어서 유감이겠군요."

으음.

시니컬한걸.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평택기지에 많은 분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자는 얼마나 됩니까?"

"많이 죽었죠."

성가연이 미군 지휘관의 말을 통역했다.

"장교들 중에 가족이 그대로 살아있는 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사병들도 많이 당했고요. 대략 사백명 가량 남았습니다."

성가연이 살짝 놀라더니 뭐라고 물었다.

미군 지휘관도 대답해주었는데, 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성가연이 내게 나직이 말해주었다.

"여긴 비전투인원과 민간인 포함 약 삼만명 가량의 인원이 있었습니다. 다 사살했다는군요."

음...

눈 앞의 이 젊은 지휘관.

자기가 모시던 상사의 머리를 자기 손으로 쐈다고 했었지.

같이 훈련하고 한솥밥 먹던 동료와 가족을 다들 자기 손으로 죽이고 살아남은거다.

지금 시기엔 다들 그렇겠지만.

그나저나 사백명이라...

꽤 많은걸.

우리 대형마트 그룹이랑 서래마을 그룹을 다 합쳐도 이 사람들 반밖에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미군 지휘관이 말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살아남은 것은 축복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역 주민들에게 했던 대답을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드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제공해드릴 수 없습니다."

성가연이 내게 통역해주는 동안 미군 지휘관은 갈색 시가를 윗주머니에서 꺼내 커터로 자르고 불을 붙이고 있었다.

미팅을 끝내겠다는 신호다.

성가연의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려 미군 지휘관이 뒤에 선 젊은 미군들에게 턱짓했다.

미군들이 다가온다.

난 말했다.

"한가지 묻고싶은게 있습니다."

성가연이 통역했다.

미군 지휘관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종말이 터진지 벌써 2개월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직 여기에 있어요. 핵항모는 동해에 여전히 있을텐데 여러분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성가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저러지?

눈빛이 묘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지금껏 나는 내 입으로 종말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어.

지금이 처음이다.

성가연이 말했다.

"종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지금이 종말이라고?"

으음.

이 질문.

살짝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성가연, 아니, 다른 사람들도 지금은 범지구적 위기다 라고 여기고 있을것이다.

힘내면 극복할 수 있는 위기.

하지만 종말은 단어의 무게가 다르다.

지금껏 만난 그 누구의 입에서도 종말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종말이라는 말을 꺼내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단어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불가항력임을 마음으로 인정해버리면 희망은 없으니까.

난 성가연을 바라봤다.

난 지금이 종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종말이라는 것을 알고있을 뿐이야.

메세지가 내게 알려줬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다.

난 성가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우린 살아있어.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성가연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미군 지휘관에게 내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미군 지휘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APOCALYPSE. THAT IS KINDA ACCURATE WARD OF... CURRENT CIRCUMSTANCES."

미군 지휘관은 살짝 씁쓸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성가연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종말이라는건 지금 상황에서 꽤나 어울리는 단어로군요.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네. 당신의 지적이 맞습니다. 우린 여길 떠나려는 여러 시도를 해봤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이 곳 지역 주민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로 말입니다."

...뭔지 알겠다.

난 나직이 물었다.

"...짐승들 말이군요. 놈들이 그렇게 강합니까? 중무장한 군부대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통역을 들은 미군 지휘관이 고개를 살짝 까딱거렸다.

"짐승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짐승들 때문인 것은 맞습니다만, 우리 부대가 뚫을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군 지휘관이 시가를 재털이에 털어내곤 입에 물었다.

그리곤 뭔가 말하려다 나를 보곤 멈칫했다.

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던 참이었다.

하도 담배를 맛있게 빨아서 나도 피우고 싶어졌거든.

미군 지휘관이 내 폼을 보더니 자기 웃옷 주머니에서 시가를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오오, 시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받아서 입에 물자, 커터로 내 시가의 끝을 잘라내곤 자기 지포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준다.

난 깊게 빨았다 뱉았다.

진한 탄 맛에 갈색 나무향이 깊게 배인 연기가 내 속을 가득 채운다.

좋네 이거.

영화 같은데서 보니 시가는 쿠바산이라던데.

난 중얼거렸다.

"이것도 쿠바산인가?"

성가연이 날 보고있다가 통역했다.

미군 지휘관이 웃고는 말했다.

"ACTUALLY YES. IT'S CUBAN."

"네. 쿠바산이랍니다."

난 시가를 들어보이며 미소지었다.

그리곤, 엄지를 들고 말했다.

"담배 굿!"

미군 지휘관이 웃더니 말했다.

"나도 지금은 종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이 쿠바산 시가도 구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지 모르죠."

그가 테이블에 팔꿈치 하나를 얹었다.

"우리 삶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날이 올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 끼리라도 모여 다시 문명을 재건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린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을 가능한 많이 구하고 또 모을 겁니다. 당신들도 아마 그런 이유로 우릴 찾아 온 것이겠지만요."

미군 지휘관이 재를 털고는 말을 이었다.

"짐승들은 우리가 뚫을 수 있습니다. 놈들이 점점 커지고 있긴 합니다만,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놈은 아직 보지 못했어요. 문제는 우리측 민간인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는 겁니다."

난 시가를 빨며 성가연의 통역을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군 지휘관을 바라본다.

미군 지휘관이 말을 이었다.

"놈들은 짐승입니다. 커지고 둔해진다면 좋은 목표물이 되었겠지만, 커지면서 오히려 더 빨라지는 것 같아요. 운동량 자체가 느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날짐승, 들짐승들이 사방에서 모이기 시작하면 중화기를 든 우리 군인들은 버티겠지만, 딸린 식솔들은 그렇지 못할겁니다. 그래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 여자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을 훈련시키는 데에 꽤나 시간이 필요했어요. 게다가."

미군 지휘관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길 비우고 떠나면 우린 완전히 노출되게 됩니다. 사방이 농지인데 사백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두 엄폐할 수도 없고. 주민 생존자 그룹이 어떻게 나올지를 모르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겁니다."

음...

짐승들과 생존자 그룹.

이 사람들에겐 둘 다 적인 셈이군.

난 끄덕이곤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미군 지휘관이 팔짱을 낀다.

표정이 살짝 어둡다.

"솔직한 심정으론,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말 없습니다만, 나는 지역 주민들이 우릴 도와 링컨 항모로 돌아가도록 힘을 보태주길 바랬습니다. 무기도 그래서 준 거고요. 하지만 아까 보셨다 시피 그들의 협조를 끌어내진 못했습니다."

미군 지휘관이 시가를 재털이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리곤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민간인을 거의 다 훈련시켰습니다. 우린 곧 여길 떠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 충돌이 생긴다면, 우리도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눌겁니다. 짐승들도 함께요."

통역해주던 성가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표정도 썩 좋지는 않을거다.

지휘관은 부드럽게 말한다고 했지만, 결국 이거다.

...길을 막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

...흠...

성가연의 표정이 꽤나 어두운 만큼, 이 소식을 들을 대통령이나 성규혁의 심정도 그리 좋지는 않을거다.

하지만 나는?

여기 사람들이 병신같이 덤비다 죽던가 말던가 내가 알 바 아니지.

난 무기를 구하러 온 거라고.

난 미군 사령관을 바라봤다.

그리곤 말했다.

"제안이 있습니다만."

미군 지휘관이 재털이에 놓여있던 시가를 털고는 입에 물었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제안이라고 했습니까?"

성가연의 통역을 들으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들의 협조를 얻지 못했다고 했죠. 그 협조, 우리가 대신 해드리죠."

난 시가를 바닥에 털어내곤 말했다.

"동해까지 이동하는걸 우리가 돕겠습니다. 대신 무기를 받도록 하죠. 지뢰와 중소형 유도미사일을 포함해서요. 재블린이라고 했던가요?"

미군 지휘관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제안, 한 달 전이었다면. 또 당신들의 병력이 충분했다면 꽤 솔깃했겠군요. 실례지만 당신들은 겨우 열 명입니다. 그리고 우린 충분히 훈련이 되었어요. 당신들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흠...

그렇게 나오신다라...

난 팔짱을 끼고 시가를 빨아들였다.

...맛 좋네, 시가.

이래서 쿠바산 쿠바산 하는거구만.

후우.

담배를 즐기며 미군 지휘관을 바라봤다.

눈빛은 이미 굳어있다.

이 사람은 결심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득은 무의미하겠는걸.

그러면...

난 뒤에 서있는 미군 청년들을 힐끗 쳐다봤다.

...사백명이라.

모조리 죽여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미군 지휘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미군 지휘관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줄도 모르고, 더 할 말이 남았냐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시가를 빨아들이며.

묘하게.

나하고 시가를 빨아들이는 타이밍이 같았다.

함께 연기를 내뱉는다.

진한 갈색의 나무향이 코 끝과 입가를 타고 밖으로 뭉게뭉게 모여 흐트러진다.

...시가 맛...

...좋네.

...쯧.

시가, 괜히 받았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또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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