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지휘관이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뭐라고 말한다.
아마도 작별인사 같은데, 성가연은 굳이 통역해주지 않았다.
우린 미군 청년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관사같은 건물을 나와 활주로 쪽으로 걸어갔다.
미군들과 우리 특임대원들은 서로 몇 걸음 떨어져 뭔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려있는게 무슨 농담 같은거라도 주고받는 중인가보다.
우리를 발견한 특임대원들이, 그리고 미군들이 각자 고개를 돌려 우릴 쳐다본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내게 잉그램과 검들을 내밀며 말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난 무기를 받아들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특임대장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진다.
내가 무장하며 걸어가자 특임대원들이 날 따라왔다. 성가연이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아마 방금 있었던 일을 전해주고 있는 거겠지.
난 활주로를 따라 걸으며 생각해봤다.
여기까지 와서 빈 손으로 돌아갈 순 없어.
만약 미군들이 이동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들의 무기는 고스란히 이곳 지역주민 세력의 차지가 된다.
지역주민들한텐 미안한데, 그 무기는 내가 가지고 싶거든.
이정도 사이즈의 기지라면 모르긴 해도 상당한 물량이 있을거다.
그냥 넘겨줄 순 없다.
"성훈씨.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헬기를 부를까요?"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어온 건 성가연이었다.
성규혁이 반대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니, 헬기를 부를 순 없어. 우린 저 무기가 필요해."
"하지만 오빠. 대통령께서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셨잖아."
성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꽤 굳건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기를 손에 넣겠다는 생각인가본데.
난 나직이 말했다.
"일단 오늘은 헬기 부르지 말고 여기 있어보죠."
성가연이 걱정스레 말했다.
"밤엔 짐승들이 나온다고 했어요. 여긴 우리가 머물 곳도 없고요."
그래.
짐승.
아무래도 한 번은 봐 둬야 되겠거든.
난 말했다.
"여긴 서울 바로 밑이야. 여기서 생기는 일은 서울에도 생길 수 있어요. 그 짐승들이라는게 도대체 뭔지 일단 난 봐야되겠어."
성가연의 얼굴에 걱정이 피었다.
난 말했다.
"미군이 언제 떠날진 모르겠는데, 여기서 동해까지가 무슨 엎어지면 코 닿을데도 아니고 한참 가야 될겁니다. 차도 못 쓰니 걸어서 가야돼. 그 먼 길을. 그동안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을거다?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장은 우리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거야말로 모르는거지."
활주로를 걸으며 떠드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아무도 내 말에 딱히 반대하지 않는다.
난 말했다.
"우리는 무기가 필요해. 거기에 이견은 없겠죠. 다른 군부대를 가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거기도 어차피 여기처럼 개판일거야. 여기서 안 되는게 다른 데선 된다는 보장도 없고."
활주로 끝.
그 곳엔 어렴풋이 건물들이 올라와 있었다.
난 그 곳을 향해 걷고있다.
"하는 데까진 해 봅시다."
특임대장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걸리겠군요. 대통령껜 제가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활주로를 걸어가는데, 성가연이 폰을 들여다 보다 말했다.
"저기 주민들이 돌아간 곳, 동창리로군요. 강가를 끼고 있으니 잠겨있던 괴물들이 아마 다시 올라올 거예요. 사람들이 위험할 수 있겠는데요."
성규혁이 메세지를 보내다 성가연을 힐끗 돌아봤다.
"지금은 우리가 더 위험한 상황이야. 몇시간 지나지 않아 해가 떨어질거야. 머물 곳을 찾아야 돼."
성가연은 입술을 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활주로 끄트머리에 위치한 동네는 안정리였다. 활주로 하나에 두 개의 리가 맞붙어 있으니 얼마나 긴 활주로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 안정리 시내로 들어갔다.
콩나물 국밥집, 피시방, 당구장, 노래방 등등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점포들이 늘어선 시내.
건물들 키가 꽤 작긴 했지만, 그래도 어엿하게 시내라고 부를 수 있는 꽤 큰 주거상업구역이다.
미군부대를 상대로 장사해 온 동네인가보지.
우린 머물기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시내를 돌아다녔다.
시내 풍경은 서울과 딱히 다르지 않았다.
도로는 차가 막혀있고 뚫려있길 구간마다 반복하고 있었고, 더러 추돌되어 뒤집힌 차들이 보인다.
그건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점포들 유리가 거의 대부분 개박살 나있는 것도, 우리에겐 딱히 대단한 풍경은 아니다.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건 따로 있었다.
"...아무도 없네?"
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말 그대로, 이 거리의 가게 어디에도 좀비들이 보이지 않았다.
성규혁이 신음하듯 말했다.
"...우리 헬기가 여기 남아있던 괴물들을 전부 끌어당겨 강가에 빠뜨린 모양입니다."
성가연이 미용실 창가 너머를 바라보다 나직이 말했다.
"...짐승들이 먹을게 없어지면 사람들을 덮칠거라고 했잖아요."
특임대원들이 서로를 돌아본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여기가 조용하다는건 좋은 소식이야. 어디 적당한 곳에 자리잡고 잠깐 머무는걸로 하죠."
"성훈씨. 짐승들은요? 사람들을 덮칠지도 몰라요."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다.
여기선 먹을게 없다.
있다고 해봤자 특임대원들인데, 중무장을 하고 있으니 함부로 덤비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짐승들이 노릴 곳은 하나 뿐이다.
나로선 다행이지.
짐승들이 어디로 모일지가 분명하니까.
"저기가 괜찮겠군요."
성규혁이 그나마 꽤 높다 싶은 건물을 가리켰다.
내과, 소아과, 약국과 맥도날드가 입점해 있는, 시내에선 그나마 고층건물이라 할 수 있는 건물이다.
편의점도 있어 먹는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여기로 하죠. 꼭대기 층이 좋겠군요."
우린 건물로 들어가 우선 편의점부터 털었다.
꼭대기 층, 7층에서 내려보니 입구가 하나다.
건물 주인이 여기 꼭대기층에서 살았나본데.
특임대원 하나가 품에서 작은 공구상자를 꺼내더니 문을 땄다.
자물쇠를 연 게 아니라, 손잡이 자체를 뜯어내 버리는 것으로 해결보는걸 보니 확실히 열쇠장이는 아니다.
수현이 생각나네.
벌써 보고싶다.
집은 꽤나 큰 편이었다.
건물 층 하나를 통째로 쓰는 집이라 그런가 마루가 무슨 운동장만 하다.
가구도 뭐 별거 없어서 우리 모두가 드러누워도 공간이 남을 정도다.
난 말했다.
"일단 저녁은 여기서 먹고, 가능하면 커텐치고 소리는 내지 맙시다. 다들 다 아는 내용이겠지만."
마루에 앉아 몸을 풀던 특임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난 성가연을 바라봤다.
"아까 어디라고했죠? 사람들 돌아간 데가 무슨 리?"
"동창리입니다."
성가연이 대답하곤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가실건가요?"
난 미소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야죠. 사람들 죽는다면서?"
사실은 사람들 죽는건 별로 관심없고, 짐승들 좀 보고 죽일 수 있는지 썰어볼려고 가는거다.
하지만 굳이 뭐 그렇게 대놓고 말할 필요까지야.
성가연이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말했다.
"위험합니다."
난 피식 웃었다.
"언제는 내가 편하게 다녔던가요? 피 뒤집어 쓰는건 일도 아니야.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러자 성가연, 그리고 특임대원들의 눈빛이 뭔가를 떠올리듯이 변했다.
내가 피칠갑하고 돌아다니던 모습이 생각난거겠지.
난 미소짓고는 말했다.
"배고픈데, 식사는 누가 준비합니까?"
성규혁이 특임대원 하나의 어깨를 툭, 치며 일어났다.
"참깨라면 맛있지 않습니까?"
난 미소지었다.
"좋죠."
해가 떨어지려면 시간 좀 걸린다.
밥 먹고 소화 좀 시켰다 나가면 되겠군.
난 성규혁과 특임대원 두 사람이 부엌에서 큰 냄비 두 개를 찾아내어 물을 받는걸 바라보며 소파에 앉았다.
...동해에 핵항모라...
난 피식 웃었다.
그런거 아무 쓸모도 없지.
내가 무슨 바다 건너 어디로 갈 것도 아니고.
차라리 전차라면 쓸모 있을거다.
도로에 늘어선 차 같은거 그냥 깔아뭉개고 지나갈 수도 있고, 좀비들 몇이 덤벼도 끄떡없고.
전차는 타본적 없지만 흑표전차가 좋다고 하던데.
미군부대에도 전차가 있을래나?
물어볼걸 그랬군.
"정말 괜찮겠습니까? 혼자서?"
"괜찮아요. 다녀올테니 창문 단속 잘 하고 있어요."
특임대원들을 뒤로하고 난 신발을 발에 걸어 신었다.
성가연이 내게 다가와 무선 이어폰을 내밀며 말했다.
"상황은 알려줄 수 있죠? 스피커로 우리 모두 듣고 있을게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지원하겠습니다."
성가연의 얼굴엔 거절하지 말라는 고집이 들어있었다.
난 이어폰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고는 한쪽만 받아들어 귀에 꽂았다.
"하나만 꽂으면 되겠죠?"
성가연이 내게 휴대폰을 내민다.
난 내 번호를 찍어주곤 폰을 돌려줬다.
"갔다옵니다."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참 사람들 걱정도 팔자네.
괜찮다는데도.
특히 성가연은 내가 싸우는걸 봐놓고도 저런다냐.
...그런데 솔직히 나도 좀 긴장되긴 한다.
집채만한 개에 호랑이보다 큰 고양이라니.
띵-
1층에서 내리자 마자 성가연에게 연락이 왔다.
"참, 나."
난 폰을 밀고는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네."
"지금부터 스피커로 돌릴게요. 배터리를 가득 채워놨으니 네시간은 통화가 유지될거예요."
"그래요."
난 어깨를 으쓱해 더플백을 고쳐메고는 동창리를 향해 걸어갔다.
해는 이미 떨어져 노을조차 보이지 않는 푸릇한 저녁.
텅 비어버린 거리를 홀로 걸으니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차라리 어디서 개짖는 소리라도 들리면 좀 편하겠다.
괴물로 변해버린 짐승들 말고.
"성훈씨. 정말 우리가 근처에서 대기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지금이라도 나갈까요?"
"괜찮아요. 별 일 없을겁니다."
오지 마.
혼자 싸우는게 낫지, 옆에서 얼쩡거리다 짐승들의 표적이라도 되면 지키면서 싸우기 귀찮다.
그렇다고 냅둘 수도 없고.
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쪽 하늘은 밤인데, 이 쪽 하늘은 저녁이다.
이 시간에만 볼 수 있는, 묘하게 예쁜 풍경이다.
넓은 들판과 어우러져 운치조차 느껴진다.
하지만, 풍경을 즐기는 것도 지금 뿐이겠지.
다소 한가로운 기분으로 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위로 계속 걸어가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꽂아놓은 이어폰으로 들리는건 누군가의 말소리.
괜찮아. 별 일 없어. 걱정 마. 예상과 달라서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어쩌고 저쩌고 하고있다.
애인이 새로 생긴 특임대원인가본데.
혼자 피식피식 웃으며 걸어가다 보니 집이 나타났다.
돌담을 둘러놓은 단독주택이다.
그런 단독주택이 동네 전체에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가로등도 없는듯 있는듯 멀찌기 떨어져 발 밑을 비추고 있는 것이, 그저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 왜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알겠네.
집이 이렇게까지 떨어져 있으면 옆집에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줄 수도 없고, 심지어는 옆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는 수가 있다.
가구수는 꽤 되는 모양이다.
드문드문 서있긴 해도, 동네가 꽤 크다.
이런 형태의 동네라서 제법 살아남았던건가.
밀집된 지역은 순식간에 초토화 됐었지.
지하도라던가, 마트같은 곳.
난 동네를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갔다.
멀리 강가가 보인다.
...뭔가가 꾸물거리는 것 같은데.
무슨 지렁이 떼같은...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강가를 바라봤다.
...지렁이 떼가 아니다.
강에 처박혀 있던 좀비들이 뭍으로 기어올라 오고 있는거다.
물에 빠진다고 죽진 않지만 확실히 느려지는구나.
좀비들은 이쪽으로, 또 강 건너편으로 꾸물거리며 기어오르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망둥어처럼 팔을 파닥거리며 함부로 못 일어나는걸 보니 물이라는게 확실히 놈들의 이동력에 꽤나 디버프를 주는 것같다.
"......"
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여기선 활이 좋겠지.
화살은 재생되고 또 재생되다 못해 화살통이 넘치게 재생되어 있었다.
갖고 온 것은 서른 다섯발.
재생된 것까지, 거의 70발.
무슨 1분에 1발씩 복제되고 그랬으면 사람들이 눈치챘겠지만, 1시간에 겨우 3발 복제될 뿐이라, 화살통 옆에 툭 하고 화살이 하나 떨어져 있으면 어쩌다 하나 빠져나왔구나 여기고 마는 모양이다.
물건이 복제된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고, 사람들은 어지간히 괴상한 일이 아니면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인 범위에서 스스로 납득해버리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언젠간 들키겠지.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걸.
우리 마트 그룹이나, 성가연을 비롯한 특임대원들은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는 것 같지만.
활집에서 활을 뽑았다.
투슛-
그리고, 어깨에 둘러멘 더플백의 지퍼를 열었다.
평소 애용하던 아디다스 가방은 이번 여정에선 갖고올 수 없었다.
애초에 목적이 무기수급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많이 담을 수 있는, 길이만 1.3미터에 달하는 대형 더플백만 다들 챙겨왔다.
그리고 이 더플백은, 길이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화살을 담아놓기에 아주 적합한 가방이다.
열어놓은 더플백에서 잉그램 탄창을 꺼내, 허벅지의 가죽띠 앞뒤 주머니에 하나씩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