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램을 득템한 이후 수현이가 허벅지끈에 달아준 탄창주머니. 리프팅벨트도 그렇고 수현이 아니었으면 이 무장들을 다 어떻게 갖고 다녔을지 모르겠다.
돌아가면 꼬옥 안아줘야지.
탄창을 준비하고는, 허리의 화살집에서 화살을 한 발 뽑아들었다.
트릇.
화살의 나무살이 서로 부대끼며 사소한 요란을 만든다.
나는 시위에 화살을 매기고는, 두 팔을 방만하게 내려놓고 앞을 내다봤다.
꾸물꾸물 올라오고 있는 좀비들.
...지금 저격할까.
...아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
좀비들 죽이는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성훈씨. 숨소리가 느릿해졌네요. 지금 어딥니까?"
성가연이다.
난 나직이 말했다.
"강가까지 대충 50미터쯤 앞에 서있어요."
"짐승들 나왔어요?"
성가연의 목소리가 살짝 긴장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하지만 물에 빠졌던 놈들은 다시 기어나오고 있네요."
뭔가 속삭이는 남자들의 목소리.
작아서 뭐라는건지 안 들린다.
성가연이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하세요.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올 필요 없다고.
"...그러죠."
그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훠이, 훠이 하는데?
고개를 돌려봤다.
옆에 있던 단독주택의 안방 창문.
할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훠이거리고 있다.
눈이 마주쳤다.
할배가 말했다.
"젊은이. 거기서 뭐 해? 위험해. 놈들이 나온다고. 문 열어줄게, 어서 들어와. 얼른."
...할배, 좋은 사람이네.
너무 지나치게 속닥거려서 말하는거 반은 못 알아듣겠다만.
난 살짝 미소지어 보이곤 말했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크롸르르륽-
평소처럼, 아니, 약간 크게 말했더니 좀비들이 들었나보다.
이 친숙한, 짖어대는 소리.
놈들이 내 목소리에 반응했다.
난 할배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창문 닫고 커튼 쳐두세요. 소리는 내지 마시고."
"저, 젊은이. 그러지 말게. 응? 들어와."
으음.
친절한건 좋은데, 귀찮아.
냅두자.
창문 같은거 알아서 닫겠지.
난 고개를 돌려 멀리 내다봤다.
좀비들이 천천히 뭍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캬르르륵-
크롸르륽-
그리고 그들의 소리에 뒤섞여 있는 다른 소리.
우우우우우-
목소리 굵은 성악가가 길게 내빼는 듯한 소리.
멀리.
산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메아리.
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봤다.
강 너머의 산.
밤이 찾아와 암흑이 되어버린 커다란 그림자.
저기다.
우르르르릉!
그 순간,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같다.
고개를 돌려보니, 건너편 단독주택 너머의 강가.
그 곳에 시커먼 그림자가 좀비들을 덮치고 있었다.
우드득, 콰드득, 콰작!
뭍으로 나와 움직임이 엉성한 좀비들을 씹어먹는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어두운 그림자다.
하지만 발이 네 개인건 알겠다.
그리고, 긴 꼬리.
...크다.
좀비들이 옆에 서있어 크기가 대충 가늠이 된다.
대략 1톤 트럭 정도.
우득거리며 좀비을 씹어먹던 놈이 대가리를 쳐들고 아가리를 벌렸다.
우르르르릉!
공기가 부들부들 떨린다.
뭐지 이 소리?
분명히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난 그런 의문을 마음에 품고, 화살 매긴 활을 천천히 들어올려 놈을 겨누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었나보다.
긴장한건가.
젠장, 종말 첫 날 같네.
"후우."
난 숨을 가다듬으며, 시위를 당겼다.
빠아아아-
투명한 원형이 나타났다.
그리고, 원형에 잡힌 거대한 짐승.
놈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놈이 고개를 홱 돌린다.
어둠 속에서 두 눈만이 반딧불이처럼 번뜩인다.
시위를 놓...!
사라졌다.
...빠르다!
어디지?
제기랄, 가속 박고 쏠 걸 그랬나?
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사방을 살폈다.
보이지 않는다.
그 때, 등 뒤에서 공기가 부들부들 떨렸다.
우르르르르릉!
등줄기가 섬칫하다.
난 발작적으로 뒤돌았다.
단독주택 지붕.
그 위에, 거대한 형체.
놈이 기와를 작살내며 뛰었다.
급속도로 형태가 확대된다!
우르르르르릉!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불어오던 실바람이 느릿하게 공기를 밀어내는 젤리처럼 변했다.
난 즉시 시위를 당기며 놈을 조준했다.
놈이 붉게 타오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건...
검은 고양이다.
털이 군데군데 빠져있고, 세로동공엔 그어놓은 듯한 핏줄이 새겨져 있으며, 아가리는 벌리다 못해 목까지 찢어질 정도다.
그러나, 분명히 고양이다.
트럭만한 고양이라니...!
난 시위를 놓았다.
핏.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더플백에서 화살을 집어 매기곤 쐈다.
핏, 핏, 핏, 핏, 핏!
가속, 2회차.
놈이 가까워진다.
피해야 돼!
난 더플백을 움켜쥐고 옆으로 힘껏 뛰었다.
가속이 끝났다.
괴물 고양이가 앞발을 휘두른다.
동시에 화살 예닐곱발이 놈의 눈과 아가리, 대가리에 빗발처럼 들이꽂혔다.
투투투투툭!
"크우와우어어억!"
땅을 무너뜨릴 듯이 엎어진 괴물 고양이가 담벼락을 들이받았다.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담벼락이 무너졌다.
집 안에 사람이 있었는지, 희미하게 비명소리가 들린다.
"후우, 하아."
제길, 아까 우르릉 하던 소리.
고양이들이 내는 가릉가릉 하는 그거였어.
무슨 헬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나나 했더니, 미친 괴물아니야 저거.
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무너진 담벼락을 바라봤다.
대가리에 존나 꽂아넣었으니 뒤졌...
파스슷, 후드득.
무너진 담벼락 파편들이 움직인다.
으르르르릉- 으르르릉-
놈이 천천히 대가리를 쳐들고 있었다.
"성훈씨? 무슨 일이예요? 무슨 소리예요 이거?"
...대가리에 화살이 처박혔는데 안 뒤졌어?
난 어이가 없어져서 웃어버렸다.
"...고양이요."
"...예?"
"고양이, 고, 고양이요? 그 사람들이 말했던 짐승?"
난 웃고는 들고있던 활을 더플백에 쑤셔넣었다.
"에에. 완전히 괴물이네 저거."
그렇게 말하곤 일어서며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슈르릉-
괴물 고양이가 검은 털을 세우며 내게 고개를 돌린다.
대가리와 눈 한쪽에 화살이 우르르 박혀있다.
하나 남은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괴물? 위험해요? 지금 어때요?"
내 입가엔 웃음이 걸려있다.
"위험하다기 보다는..."
"보다는 뭐예요? 출동해요?"
"아뇨, 그냥 뭐."
"아이, 참. 뭔데요? 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네. 출동해요?"
마을 중앙에 보기좋게 위치한 아름드리 나무와 우물.
난 두 손에 검을 쥐고 나무를 향해 슬슬 걸었다.
괴물 고양이가 검은 털을 바짝 세우며 한 발 한 발 옮긴다.
놈의 등에 얹혀있던 담벼락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설레는데?
"성훈씨. 죽었어요? 네?"
"안죽었어. 좀 조용히 해."
귀찮아 죽겠네.
여지껏 싸움이 즐겁다고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종말 전엔 메세지가 늘상 알려줘 왔으니 시키는대로 하는 기분이었고, 종말 이후엔 살려고 발버둥쳤다.
전문화를 얻고 피를 뒤집어쓰고 다니면서 조금씩 흥분되는 감정을 느끼긴 했었지만, 그것도 이내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건...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지면 죽는거잖아?
아니, 잡아먹힐려나?
이 밤중에, 가로등 불빛이 닿는 곳 밖에 볼 수 없음에도 시야가 선명해진다.
색깔이 환하게 보인다.
심장이 두근댄다.
...중독되겠는데, 이거.
고양이와 나는 가운데 기둥이라도 있는 듯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슬금슬금 걷고있다.
드문드문 자리잡은 단독주택들은 관람객이고, 마을 중심의 이 공터는 콜로세움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재밌어지네.
난 입가에 미소를 띄곤, 고양이와 눈싸움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놈이 발을 멈췄다.
고양이의 꼬리가 내려간다.
귀가 뒤로 접힌다.
몸을 납작하게 낮춘다.
놈의 아가리.
입술이 파들파들 떨린다.
...오호라.
그게 공격신호냐.
난 웃음을 거두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섰다.
검을 쥔 양 손에 힘이 들어간다.
"캬르롸르라락!"
뛰었다.
두 앞발에 날카로운 발톱 여덟개.
찢어발기겠다는 욕망이 느껴지는 몸짓.
나는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
놈이 쇄도해온다.
놈의 형체가 순식간에 확장된다!
[자동 시전 : 가속]
그렇지.
고양이놈, 하도 빨라서 거의 잔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제야 명확히 보인다.
나는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나를 감싸 안으려는 듯한 두 앞발이 위에서 내려오고 있다.
"후."
난 놈의 육구에 검을 힘껏 찔러넣었다.
부드럽게 들어가는걸.
찔러넣은 팔.
힘주어 당기며, 뛰었다.
동시에 검을 뽑았다.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