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87)

어디에 쓸지, 어디다 놔둘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보기에 너무 멋지잖아.

두툼하게 내려앉은 유선형의 몸체는 위압감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영화에서나 봤지 이런거는.

...치누크 네대라...

"이런거 더 있습니까?"

미군 지휘관이 끄덕이곤 말했다.

"네대 더 있습니다. 옆 격납고에요. 전투기도 있습니다만, 운용할 수 있는 조종사가 없어요. 디데이에 모두 당했습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성규혁을 돌아봤다.

"서래마을에 헬기랑 비행기 조종사 있지 않습니까? 박대위랑 김대위."

성규혁이 내게 고개를 내밀어 귓가에 나직이 말했다.

"치누크는 승무원 세명이 필요합니다. 박대위 혼자서 힘들겁니다. 전투기는 아마 F35일텐데, 김대위가 제대로 조종할 수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 분, 젊어서 제대하셨어요."

...으음.

동그라미도 엑스도 아니고, 세모라는거네.

장비가 있어도 쓸 사람이 없다...

난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10톤을 실어나를 수 있는 대형 수송헬기 네 대. 운용할 수 있는게 두 대니, 한 번에 20톤씩.

평택 미군기지에 있는 개인화기와 폭발물을 이걸로 실어나를 작정인거군.

문제는 사람들이다.

치누크 두 대로 수송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로 빡빡하게 우겨넣어봤자 6~70명 정도.

사람은 400명.

몇 번이나 왕복해야될지 모른다.

링컨 핵항모나 항모전단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사람을 운송한다 해도 남은 사람들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는 셈인데, 방어를 위한답시고 병력을 분산시키기도 어렵다.

화력이 분산되면 괴물들이 헬기소리에 이끌려 들이닥쳤을 경우 각개격파되기 좋은 목표물로 전락할 뿐이다.

나는 미군 지휘관을 돌아봤다.

"그래서,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고 해서 나오긴 했는데, 수송헬기를 봐도 미군이 뭘 할 작정인지는 전혀 모르겠다.

물건만 실어나를 생각은 아닐거고, 사람을 분산시켜 화력을 둘로 나눌 생각도 아닐거다.

나 같아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미군 지휘관이 그런 발상을 할 리가 없다.

미군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밀했다.

"험프리스 기지 북쪽 산지와 숲 속. 우리 정찰드론의 적외선 촬영으론 거기가 짐승들이 웨이브를 일으키고 있는 곳입니다. 미안하지만 어제 당신이 상대한 괴물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그렇겠지.

고양이를 죽이고 개떼랑 마주치긴 했어도, 그게 전부일 리가 없다.

산과 숲.

눈으로만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다.

바글바글 들어있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미군 지휘관이 말했다.

"우린 앉아서 놈들이 공격해 오길 기다리지 않을거요. 우리는 특공대를 조직해 숲 속에 있는 괴물들을 격멸할 생각입...니다."

통역해주던 성가연이 말 끝을 흐렸다.

우리 특임대원들이 모두 고개를 들어 미군 지휘관을 바라본다.

나도 그를 바라보고 있다.

눈썹이 모여드는게 느껴진다.

...지금 방금 격멸이라고 했나?

"...산 속에 있는 짐승 웨이브를 전부 죽이겠다는 겁니까? 저 안에 얼마나 있는지는 알고요?"

미군 지휘관은 미소지었다.

"목표가 그렇다는 겁니다. 크고작은 짐승들이 셀 수도 없이 저 산과 숲에 들어있어요. 모든 짐승들을 다 죽일순 없을겁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건, 놈들의 우두머리들이요."

"...우두머리?"

미군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파악한 개체는 모두 셋. 하얀 털을 가진 괴물 개. 그리고 멧돼지. 마지막으로 박쥐요. 놈들 모두 거대하지만, 개중에도 특히 거대한 개체들이 하나씩 있습니다. 우린 놈들을 우두머리라고 부르고 있죠."

...우두머리들이라?

미군 지휘관이 몸을 돌려 걸어가며 내게 가자고 손짓했다.

그러며 말했다.

"치누크를 봐서 아시겠지만, 우리의 운송수단은 항공기요. 개와 멧돼지 우두머리를 해치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거대한 박쥐가 하늘을 가로막는건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나는 그를 따라 관사로 걸어가며 물었다.

"그러면 격멸이라고 말한건 짐승 전체를 죽여 없애는게 아니라 그 커다란 놈 셋을 죽이는걸 말한 거군요."

사람들이 우리 대화를 들으려, 통역하려 가까이 따라붙는다.

격납고 문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성가연의 통역을 들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가능하면 그 과정에서 짐승들의 머릿수를 많이 줄여놓을 수 있기를, 또 가능하다면, 정말로 저 산 속에서 모든 짐승들을 죽여 없앨 수 있기를 바랍니다만."

미군 지휘관이 나를 힐끗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산 전체에 불을 지를 수는 없으니까요. 민가에 옮겨붙으면 그렇지 않아도 디데이를 견디고 살아남은 마을 생존자들에게 큰 피해가 갈 겁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물었다.

"개 우두머리는 어제 봤습니다."

종말 이전엔 평범한 진돗개였으리라 생각되는, 하얀 털의 거대한 개체.

거의 단독주택 한채만한 크기였지.

"멧돼지와 박쥐는 어느 정도로 큰 겁니까?"

미군 지휘관이 미소지었다.

"개 우두머리는 어제 민가에 나타났었죠. 왜냐하면 약하니까요."

"...약하다고요?"

그 집채만한게?

미군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두머리중 가장 약한 개체입니다. 도그팩... 개의 무리를 이뤄 다니니 지금까지 저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어대는 짐승들 사이에서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에도 산 밑으로 밀리고 밀려 강에서 인간 괴물들을 뜯어먹고 다닌거죠. 그래서 어제 볼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멧돼지는 달라요."

관사의 계단을 오르며 미군 지휘관이 말했다.

"놈은 저 짐승 웨이브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치 산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저 놈이 내려오면 대재앙이 일어날 겁니다."

...일단 개보다 크다는거군.

말만 들어보면 무슨 웬만한 코끼리보다도 크다는건데.

미친 괴물같은게 산 속에 있었네.

"그러면 박쥐는요?"

"그들은 동굴에 있습니다."

미군 지휘관은 그렇게 말하곤 웃었다.

왜 웃지?

"그만한 사이즈의 동굴이 저 산엔 없었나 보더군요. 박쥐떼가 산맥 한가운데에 우글우글 모여있더니, 결국 땅을 파고들어가 자기들끼리 동굴을 만들어버렸어요. 거기에 처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관측은 여러번 성공했어요."

스스로 땅을 파서 동굴을 만들었다고?

회의실로 들어가는 미군 지휘관을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박쥐도 큽니까?"

지휘관이 나를 힐끗 돌아본다.

"방금 치누크 보셨...죠."

성가연이 다시 말끝을 흐린다.

나도 걸음을 멈춰버렸다.

...치누크라고 말했나 방금?

...박쥐가?

미군 지휘관이 의자에 앉았다.

옆에 따라붙은 백인 미군에게 뭐라고 영어로 나불대니 백인 미군이 밖으로 나간다.

미군 지휘관이 내게 앉으라 손짓하며 미소지었다.

"날이 더워 자판기에서 캔콜라를 좀 가져오라 했습니다. 혹시 가리는 음료가 있으신지?"

아니 이 양반아.

지금 콜라가 문제가 아니고.

난 의자를 당겨 앉아,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난 미군 지휘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상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놈들을 상대할 작정이었습니까?"

미군 지휘관은 미소지었다.

"우리에겐 SOC-R 리버린이 있습니다. 그리고 험프리스 기지는 강을 끼고있죠."

통역해주는 성가연의 얼굴이, 성규혁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리고, 나는 도당채 리버린이고 뭣이고가 뭔지 모르겠다.

뭔데 그게 씨발?

내 표정을 본 성규혁이 내게 귓속말했다.

"물 위의 건쉽이라고 부르는 군용 보트입니다. 미니건을 비롯한 중화기 9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운용하는 사람들도 각자 개인화기와 지원화기를 지니고 있고, 크기에 비해 화력이 막강합니다."

...몰라 그런거.

미군 지휘관이 말했다.

"리버린을 운용할 수 있는 강을 끼고있으니 화력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산 속으로 깊게 들어갈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던겁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당신이 오기 전까진 말입니다."

...아.

이제 알아듣겠네.

...특공대를 조직한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은, 나보고 산 속에 들어가서 우두머리들을 강가까지 끌고 나오라는 거다.

리버린이라는 보트가 중화기를 퍼부어 놈들을 끝장낼 수 있도록.

"어우, 비좁아."

SOC-R 리버린이라는 군용 보트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또 작은 사이즈였다.

길이 10미터의 보트 두척에 기본 승무원 네명과 특임대, 그리고 미군 특수작전대가 나눠 타다보니, 팔만 슬쩍 들어도 옆사람과 부대낄 정도다.

비좁다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온다.

리버린은 가능한 속도를 죽인 채 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바로 옆이 농지.

저 건너편이 숲과 산.

저 나무들과 풀숲 속에 있는 것들이 지금도 우릴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다.

"강 속에 괴물들은 전부 밖으로 나온 걸까요?"

내 뒤에 앉아있던 성가연이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닐거야. 우리가 오면서 박대위가 몰아 빠뜨렸던 놈들을 생각해보면, 어젯밤에 기어올라 온 건 반도 채 안 돼."

난 고개를 들어 멀리 강물을 바라봤다.

물 속이 안 보인다.

그냥 똥물이다.

"아직 바글바글할거야. 저 밑에."

내 옆에 앉은 성규혁이 나직이 말했다.

"놈들은 물 속에서 둔해지니 다행이죠."

그렇다고 해야하나, 아니라고 해야하나.

가능하면 그냥 몰아서 대가리를 다 뚫어버리고 싶은데.

수영도 못하는 내가 물 속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나저나 미군 지휘관이 약속을 지킬까요?"

난 성규혁을 돌아보았다.

모르지 그거야.

사람 속을 내가 어떻게 알아.

나중 가서 딴소리 하면 그냥 목을 확 썰어버리고, 미군이 400명이든 지랄병이든 다 죽여 없애버릴거다.

난 나직이 말했다.

"그래야될걸. 아니면 나랑 싸워야 될테니."

그 말에 성규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내 머릿속에 미군 지휘관의 말이 스쳐지나간다.

"치누크 한 대분. 10톤에 달하는 개인화기와 탄약, 폭약, 그리고 지원화기. 어떻습니까?"

10톤.

더플백 몇 개 분량에서 갑자기 무기와 탄약 10톤이 생기는 셈이다.

미군 지휘관은 몇마디를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치누크에 실을 수 있는가에 달렸습니다. 여기엔 많은 식량과 전투차량들이 남아있어요. 지상과 항공연료 제조를 위한 각종 첨가물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모두 넘기는 것으로 하지요."

...항공연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거지.

"주민들은요?"

성가연이 물었다.

미군 지휘관은 다소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우리로서도 곤란한 부분입니다. 미국으로 데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의 비무장인 채 여기에 둘 수도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난 성가연과 성규혁을 번갈아 바라봤다.

나도 그들도 딱히 수가 없다.

난 결국 절충안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일단 작전을 성공하고 나서 얘기해봅시다."

"그래요. 현명하군요."

그리고, 나는 미군 지휘관과 악수를 나누었다.

우리 마트건물의 인원 약 20여명.

그리고 서래마을의 200여명.

개인화기와 중화기, 지원화기와 각종 폭약과 폭발물, 종류별 탄약에 이르기까지, 10톤에 달하는 화력.

충분히 차고도 넘치는 화력이다.

요전번 좀비 웨이브 정도는 화력으로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화망을 전개할 수 있을것이다.

당장 우리나라에만 해도 털 만한 군부대가 여럿 널려있는 이상, 10톤이면 충분히 방어와 성장의 기반이 되고도 남는다.

문제는 짐승들이다.

놈들이 얼마나 강한건지를 모르니, 10톤의 화력이 충분한건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일단 부딪혀보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풍경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직이 물었다.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거지?"

"박쥐동굴을 향해 간다는군요."

난 성규혁을 돌아봤다.

"박쥐동굴?"

성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말하길, 우두머리 멧돼지는 산맥 전체를 돌아다닌답니다. 다른 짐승들은 우두머리 멧돼지를 마치 우러러 보는듯이 따라다닌다고 하는군요. 그 놈을 강가로 끌고 올려면 먼저 찾아내야 되는데, 어디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놈을 찾아내려고 숲 속에 지나치게 깊게 침투해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울 테니까요."

"...아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를 확실히 아는 놈은 동굴 속에 처박혀 있다는 대왕박쥐 뿐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놈이 최우선 목표물이기도 하고요."

치누크를 날려보낼려면 박쥐를 먼저 해결해야 된다고 했었던가.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산을 바라봤다.

...멧돼지라.

저 크고 넓은 산과 숲 전체를 싸돌아다닌다고?

놈도 처리는 해야될텐데.

"비행기 띄워서 폭탄 떨궈버리면 안되나?"

산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리자, 성규혁이 대답해왔다.

"조종사가 다 죽었습니다. 치누크 조종사만 여덟명 살아남았답니다."

난 혀를 찼다.

아깝네.

폭격기로 산 전체를 터뜨려버리면 좋았을걸.

치누크도 할 수야 있겠지만, 헬기라 폭격기보다 속도가 느려.

박쥐떼라도 기어나오면 따돌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어쩌다 치누크 조종사만 남았대요?"

"살아남은 파일럿들이 초기대응하려고 전투기로 뛰어가다가 거의 다 붙잡혀 버렸어요. 그나마 몇몇 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조종사들이 있었는데, 어떤 자는 가족이 변해 자살하고, 더러는 초기 하루이틀 사이에 물려 감염됐답니다."

성규혁이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치누크 조종사들은 일 터졌을때 여덟명이 3호기에 모여 포커를 하고 있었다더군요. 일 터지자 마자 문을 닫아버렸고, 그래서 살아남았던 겁니다."

"다른 치누크 조종사들도 있었겠군요?"

"네. 스무명 넘게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은건 여덟명. 사실상 항공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죠."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항공지원이 없다.

...그럼 그냥 하지 뭐.

내가 언제는 누구 지원 받고 싸운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특임대장 성규혁.

꽤나 내부사정을 잘 아는걸.

...아아.

그 젊은 미군청년이랑 꽤나 얘기를 많이 했었지.

그래서 여러 정보를 얻어낸 모양이군.

자연스러운 정보수집이라.

특임대장 답네.

리버린은 한참을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민가를 지나 굽어지는 기슭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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