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민 손.
대략 3~40여미터 전방.
정확히 손을 내민 방향에, 뭔가가 일렁거렸다.
공기가 모여드는 것 같기도 하고, 공간이 뭉치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모양이다.
저기가 공간발톱의 범위인가본데.
...겨우 저정도 거리를 남겨두고 멧돼지한테 추락했단 말이지.
엄청 위험했구만, 진짜.
나는 손을 쥔 것도 편 것도 아닌 상태로 내민 채, 잠시 생각해봤다.
분명히 기억으로는 이대로 움켜쥐면 저 쪽으로 이동하는 거였어.
그러면 지금 이 상태로는?
나는 앞으로 걸어가봤다.
지직, 지직.
신발이 땅에 밀린다.
앞으로 가지질 않는다.
뒤로도 못 간다.
저 공간과 나 사이가 완전히 고정되었다.
"...하."
이렇게 되는건가.
...그렴 옆으로는?
나는 공간을 움켜쥔 채, 옆으로 슬슬 이동해봤다.
...움직여진다.
점 찍고 컴퍼스를 돌리듯이, 공간을 중심으로 나는 원형으로 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소지었다.
...이거 쓸만하겠는데?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펴봤다.
이게 또 알아봐야 할 부분이다.
나는 공간발톱을 방금 발동시킨건가 아닌건가.
나는 이동하지 않았다.
그저 공간을 쥐고 양 옆으로 걸었을 뿐이다.
"상태."
...발동시킨거네.
민첩이 5점 깎였다.
현재, 10점.
일단 공간을 움켜쥐면, 그 공간으로 이동하든 아니든 공간발톱은 발동된거다.
좋아.
규칙은 알겠어.
그러면, 앞으로 공간발톱 횟수는 2회 남았다.
...이번엔 뭘 해보지?
나는 활주로 가운데에 오도카니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고요하고, 조용하다.
불어오는 실바람을 맞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달 참 예쁘네.
...좋은 생각이 났다.
그거 재미있겠는데?
"...하하."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손을 오므렸다.
밤하늘 별들이 묘하게 움직이며 오그라든다.
공간을 움켜쥐었다.
좋아.
나는 그대로 주먹을 꽉 쥐었다.
"흡!"
순간적으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발 밑이 번쩍 멀어진다.
격납고 지붕이 보인다!
두둥실 떠올라, 멀미가 날 것 같다.
젠장, 떨어질 것 같아!
난 즉시 저장고를 소환해 돌개바람을 잡아 밑으로 던졌다.
슈화릇!
소용돌이가 흐트러지며 발아래에 돌개바람이 형성된다.
가속!
[자동 시전 : 가속]
젠장, 떨어진다, 떨어진...!
타악!
난 돌개바람 위에 그대로 착지해 앉았다.
나는 지금 하늘 위에 떠있다.
돌개바람이 공중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하하!"
그래!
돌개바람은 가속의 영향을 받지 않아!
돌개바람에 타고 있으면 공중에서 가속을 발동시킨 채 나 혼자 움직일 수 있는거다!
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환한 미소가 입에 걸린다.
정말 멋진걸 발견했어!
돌개바람과 공간발톱을 얻은건, 지금 내겐 최고의 선물이다.
나는 느릿하게 기울어지는 돌개바람 위에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지면을 바라봤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론 지면을 움켜쥔다.
그리고, 주먹쥐었다.
슈쾅!
순식간에 확대된 지면에 돌개바람이 추락했다.
폭탄이 터진 듯, 충격파가 발생해 원형으로 먼지를 실어나간다.
그리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충격면역!
"...하하."
최고다, 진짜.
무너진 관사 쪽에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금 일어난 폭음이 들렸나보다.
난 돌개바람에서 내려 저장고에 넣어두곤, 느긋한 태도로 관사를 향해 걸어갔다.
시체수습과 잔해제거를 돕던 특임대원 하나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방금 무슨 소립니까?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저기서 뭐 좀 해보느라고. 큰 소리 내서 미안합니다."
"아아. 네."
특임대원이 뒤에서 웅성대는 미군들과 미국인 민간인들에게 뭐라고 영어로 얘기했다.
난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보이며 미소지었다.
어이, 놀랐지? 미안해.
를, 나는 영어로 말할 자신이 없다.
단어는 대강 기억나는데, 그냥 말 안할란다.
헤이 유! 서프라이즈! 쏘리!
...흐음...
안해.
난 특임대원에게 물어 무기고로 향했다.
치누크에 실을 개인화기와 지원화기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있는 무기고.
무기고 앞엔 미군과 특임대원이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 있나 좀 보러왔어요. 구경좀 해도 됩니까?"
특임대원이 미군을 통역해주었다.
"물론입니다. 지휘관께서 당신에 대해 무제한 접근을 허용하셨습니다."
으음. 그거 잘됐네.
평택기지의 무기고는 용산기지와는 다르게 꽤나 큰 편이었다.
들어서니 온갖 무기의 향연이 벽과 선반에 가득 들어차있다.
옛날에 봤던 영화 매트릭스가 떠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개인화기와 탄약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폭발물은 안 보이네.
폭약고는 따로 있나보지?
어쨋든 폭발물을 보러 온 게 아니니 상관없다.
"구경 좀 할게요."
"네, 성훈씨."
미군과 특임대원이 문 앞에 서서 내게 손을 들어보였다.
난 무기고로 들어가 진열된 무기들을 바라봤다.
소총, 산탄총, 권총을 비롯한 온갖 총기류가 여기에 모여있다.
그리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내 눈앞에 진열된 총.
다른 총들보다 숫자가 적다.
그리고, 훨씬 길다.
난 입가에 미소를 띄고는 총을 잡아 들었다.
잉그램에 비하면 엄청나게 묵직하다.
무슨 총이지 이건?
구글을 열어 검색해봤다.
...M107.
고폭소이철갑탄을 사용하는, 대물저격총이다.
돌개바람에 넣어둘 무기.
...이거다.
비가 내린다.
밤에만 해도 달이 떠있는 맑은 하늘이었는데, 해가 떠오를라 치니 뜬금없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소나기가 되었다.
여름날의 하늘은 변덕이 너무 심하단 말이야.
나는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 저렇게 구름이 많이 끼었는지 모르겠다.
"READY!"
미군 하나가 외치자, 이열 종대로 서서 마주보고 있던 군인들이 소총을 들어 먼 하늘을 겨누었다.
"SET!"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FIRE!"
타타탕!
그리고, 다시 반복한다.
무너진 건물에서 건져낸 미군들의 시체는 깔리고 뭉개져 무엇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수습한 전사자들.
관을 마련할 수 없어 한 구 한 구를 가지런히 모아 미국 국기로 감싸놓은 미군들은, 약식으로 화장하기로 하고는 가구 등을 뜯어내어 활주로 한 켠에 쌓아두었다.
그 위에 성조기로 감싼 전사자를 올려둔다.
그리고, 휘발유를 뿌렸다.
화장터 앞.
예복도 없어 군복 차림을 갖춰입은 미군들이 종대로 서서 예포를 쏘았다.
몇 발인가의 예포 이후, 미군 하나가 나무에 불을 붙였다.
휘발유에 적셔진 전사자와 나무들이 소나기 속에서도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사자를 친구로 두었던, 혹은 가족이었던 민간인과 군인들 몇이 눈가를 훔친다.
빗물을 닦아내기 위해서인 것처럼.
추도사는 없었다.
이제와서 추도를 하기엔 종말 이후 너무 많이 죽었다.
우리도, 그들도.
그저 전사자들이 타오르는걸 바라볼 뿐이다.
장례가 끝난 후, 사람들이 돌아가는 와중에 목발 짚은 미군 지휘관이 내게 다가왔다.
부하가 들어주는 우산 아래에서, 미군 지휘관이 말했다.
"우산은 필요 없습니까?"
난 피식 웃고는 하늘을 힐끗 올려다봤다.
"괜찮습니다. 시원하네요."
그렇게 말하곤 미군 지휘관을 바라봤다.
이 사람은 아직 상처가 심각하다.
다리도 다리지만, 머리에 붕대를 두툼하게 감아 눈 한쪽을 덮고 있다.
그냥 피가 흘러내려 눈을 못 뜬거라 생각했는데, 눈을 상해버린 모양이다.
저러면 비를 맞으면 안되겠지.
난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겁니까?"
미군 지휘관이 씁쓸하게 웃더니 말했다.
"이 날씨엔 헬기를 못 띄우니, 글쎄요. 술이나 한 잔 할까 싶군요."
술이라?
"이사... 준비는 끝났습니까?"
미군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는 전부터 실어두고 있었습니다. 남은건 치누크 한 대 분. 기억합니까?"
아아.
어젯밤에 봤던 무기고의 무기들.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게 치누크 한대 정도였다고?
어제 무기고에 있던 무기들을 모조리 실어나르면 정말로 방어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된다.
탄약도 상자째로 쌓여있었고.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군 지휘관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얻어낸거요. 충분히 자격이 있어요."
그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전에 봤을때 당신은 꽤 중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게 몸에 붕대도 없이 다닐 수 있는건지는 따로 묻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듣게 되면 또 놀랄 테니까 말이죠."
그 말을 듣고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미군 지휘관이 말했다.
"다음에 또 신세집시다 라는 말을, 하고싶기도 하고 하고싶지 않기도 하군요. 앞으로 또 뭐랑 맞닥뜨리게 될지 알 수 없다는게 걱정입니다."
그러며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미군에게 턱짓한다.
미군 청년이 내게 공구상자같이 생긴 플라스틱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뭐지 이건?
받아들자 미군 지휘관이 말했다.
"위성 무전기입니다. 통신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 대비는 해둬야 되겠죠."
오오.
무전기.
미군 지휘관이 미소짓고는 나를 바라본다.
"앞으로도 자주 연락했으면 좋겠군요.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돕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또 우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의 손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여기 분들이 미국으로 가게 되면 좀 서로 돕기 힘들것 같습니다만."
그가 웃고는 말했다.
"정보공유 정도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며 손을 계속 내민 채 미소짓는다.
정보공유라.
...흠.
멀리 타국에 있다 할지라도 아군이 있다는건 그래도 좋은거지.
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빗물에 젖어 축축한 내 손을 그는 꽉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그러는 와중, 통역해주던 성가연이 내게 귓속말했다.
"성훈씨. 마을 주민들입니다."
주민들이라고?
뒤돌아보니 사람들이 우르르 걸어오고 있다.
...왜 오는지 알겠네.
난 미군 지휘관을 힐끗 보며 물었다.
"저들에게 줄 무기가 좀 있을까요?"
미군 지휘관은 주민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