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87)

"그건 별 문제가 안 됩니다만... 이렇게 하시죠. 치누크에서 탄약과 무기 몇상자를 내려놓으라 지시해두겠습니다. 그걸 여러분이 저 지역주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하는게 좋겠군요."

잉?

뭐하러 그런 귀찮은 짓을?

미군 지휘관이 웃고는 말했다.

"저 주민들은 어차피 우릴 싫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 떠날 거고요. 여기에 남을 당신들과 저 주민들간의 관계가 돈독해지는게 우리로서도 괜찮은 일 아니겠습니까?"

음...

그게 그렇게 되나.

성규혁이 나직이 말했다.

"그렇게 하시죠. 두 세력간에 골이 깊어서 이제와서 무기를 준다고 서로 웃고 지낼 수 있어보이지도 않고."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그럼."

미군 지휘관이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주민들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아, 미스터 훈. 그게 당신의 이름이었죠?"

미스터 훈은 또 뭐냐.

좀 황당해서 피식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미군 지휘관이 말했다.

"꽤 괜찮은 위스키가 내 방에 있습니다. 생각 있으면 한 번 들러요."

으음...

딱히 술을 즐기진 않는데.

시가나 좀 주지.

그러는 사이에 주민들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난 미군 지휘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고개를 돌렸다.

미군 지휘관과 우산 든 미군이 멀어지는 발소리에, 점차 가까워지는 주민들의 발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그리고, 격납고로 누군가 철벅철벅 뛰어가는 소리도. 아마도 미군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하러 가는거겠지.

특임대원들과 나는 그자리에 선 채 주민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내게 총을 갈겼던 덩치 큰 남자였다.

그는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쫄딱 맞고 걸어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내게 꾸벅거렸다.

"저... 며칠 전엔 죄송했습니다."

"사람한테 함부로 총을 쏘면 안되죠. 강도도 아니고."

성가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꽤 날카로운데.

표정을 보니 제법 화가 많이 났다.

덩치 큰 남자는 대꾸도 못하고 머리를 꾸벅거리며 연신 죄송합니다만 연발하고 있다.

성가연이 뭐라고 더 말하려 하길래 손을 들어 진정시키곤 덩치 큰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뒤에는 대략 백여명 가까운 주민들이 모여있었다.

더러는 마을을 이루고 있던 농사꾼들인 모양이고, 더러는 아래쪽 번화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인 것같다.

다 같이 온 걸 보면 지금은 한 마을에 다들 모여있는 모양이다.

백여명이라...

난 말했다.

"어떻게 오신겁니까? 무기가 필요해서요?"

덩치 큰 남자는 그렇다 아니다 말도 못하고 머리만 조아리고 있다.

할배가 걸어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걸 여러분과 좀 상의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할배.

얼굴이 낯익다.

요전번 괴물 고양이랑 싸울때 나보고 위험하다고 걱정해줬던 그 할배네.

난 미소짓고는 말했다.

"무기가 있으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겁니까? 또 사람들한테 총 겨누고 강도질 할겁니까?"

내 말에 덩치 큰 남자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할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요. 선생님, 우릴 보십시오. 우리는 군인도 아니고 강도도 아닙니다. 우리는 농삿꾼입니다. 파종하자마자 이 일이 터져서 이 넓은 논밭을 가꿀 사람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농삿꾼.

그러고보니 여기, 어마어마한 크기의 농지였어.

도시 하나 크기의 커다란 미군기지를 사방에서 뒤덮을 정도의, 엄청난 규모의 농지.

할배가 말했다.

"우리에게 무기가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쌀, 보리, 고추, 배추를 키우는데 사람 잡아먹는 짐승들이 출몰하고 그러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농지.

농작물.

...이건 꽤나...

괜찮은데?

난 갸웃하며 물었다.

"농기계로 농사하십니까?"

"예, 쓰지요. 왜 안 쓰겠습니까."

"기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텐데요?"

그러자 뒤에 서있던 아줌마 하나가 한걸음 나서더니 말했다.

"소나 돼지도 있지요. 저 뒤에 축사가 있어요."

아하.

아날로그 방식으로 농사짓겠다는 거구만.

난 고개를 갸웃했다.

"소나 돼지는 변하지 않았습니까?"

아줌마가 탄식하며 말했다.

"변해버린 놈들도 많지요.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되나, 다들 우리에 갇혀있어서 살아남은 우리도 있고 안 그런 우리도 있고 그래요. 미군한테 무기 받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변해버린 놈들 살처분하는 거였거든요. 그래도 아직 살아남은 애들이 많아서, 농사지을 때 쓰기로는 문제 없을거예요."

음. 살아남은 가축들을 사역시키겠다.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새끼 낳은 가축들도 있습니까? 새끼들은 좀 어때요?"

아줌마가 말했다.

"살아남은 애들이 낳은 새끼들은 다들 괜찮아요. 이상한 놈들은 없었어요."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난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무기를 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덩치 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조건이라 하심은...?"

난 미소지었다.

"서울에도 생존자들이 제법 많아요. 무기를 넘겨드릴테니, 농작물과 교환하시죠. 그밖에 다른 지원이 필요하다면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며 성규혁을 힐끗 돌아봤다.

이런 딜 해도 괜찮지?

성규혁이 내게 귓속말했다.

"대통령께서도 딱히 반대하진 않으실겁니다."

그렇겠지.

10톤에 달하는 무기중 일부를, 그것도 우리 몫도 아닌, 미군이 제공한 무기를 넘겨주며 식량을 받는다.

사람들이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해주며 또한 우리도 그들을 돕는다.

대통령 민정우 성격에 반대할 리가 없다.

"어떻습니까?"

농사꾼들이 서로 돌아본다.

얼굴이 제법 밝아진다.

할배가 말했다.

"저희는 그저 주시는대로 받겠습니다. 쌀이 필요하시면 물론 드려야죠."

...좋아.

난 앞으로 걸어나가, 덩치 큰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긴장이 좀 들어있는 눈이다.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남자.

할배가 인자하고 부드럽게 나섰지만, 지금 필요한건 강단있는 남자다.

우리가 먹을 작물을 키울 농사꾼들을 지키려면 이런 남자가 필요해.

"...동맹 맺었다고 봐도 됩니까?"

나는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나를, 내 손을 바라본다.

다소 감격에 젖은 얼굴로 그는 내 손을 맞잡았다.

"...다시, 요전번엔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물론입니다. 명령만 하십시오. 받들겠습니다."

난 피식 웃고는 남자의 어깨를 툭, 쳐줬다.

됐어.

이걸로 먹을건 해결됐다.

미국식 집은 꽤 넓고 계단도 많다.

나름 풍경이 좋은 2층에 자리를 잡았지만, 쉴 새없이 내리는 소나기 덕분에 빗소리와 비오는 거리만 실컷 구경하고 있다.

비 오는 날의 장점은, 빗소리가 꽤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것.

실내에서 구경하는 비오는 바깥풍경은 꽤 아늑한 기분이 되게 해준다.

그리고 비 오는 날의 단점은, 헬기를 띄우기가 어렵다는 것.

비도 웬만한 비여야지, 이렇게 소나기가 쫙쫙 내리고 있는데 하늘을 어떻게 날아다니냐고.

덕분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미군도 출발 못하고 다들 발이 묶여서 이러고 있는거지.

그냥 잠깐 오는 소나기인줄 알았는데 장마였을 줄이야.

창문 턱에 팔꿈치를 얹고 담배를 피우며 밖을 내다보는데, 누가 문을 노크했다.

내 집에 올 사람이래봐야 뻔하다.

"열렸습니다."

성규혁과 성가연이 들어왔다.

바지가 척척하게 젖어있는걸 보니 밖에서 뭘 하고 다닌 모양이다.

성가연이 다가와 책상 의자에 앉더니 웃으며 말했다.

"심심해 보이는군요."

난 피식 웃고는 두 사람을 돌아봤다.

"주민들은 좀 어때요?"

성규혁이 말했다.

"괜찮을겁니다. 미군측이 개인화기 뿐만이 아니라 중화기까지 넘겼어요. 아마 주택들 지붕에 미니건 하나씩은 장착될 것 같더군요."

난 휘파람을 불었다.

미니건까지?

"꽤나 중무장 하는군요. 그런데 그걸로 괜찮나 싶네요. 저 숲 속엔 아직도 짐승들이 많이 있을텐데."

성가연이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게 좀 이상해요. 지금 저 숲엔 짐승들이 거의 없다는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산 속에 바글바글했다면서?

성가연이 말했다.

"우두머리들이랑 싸우고 난 직후 짐승들의 레이드가 발생할까 싶어 미군측이 관측용 드론을 여럿 날렸다더라고요. 그런데 산주인이라는 별명의 그, 괴물 멧돼지가 죽고 나서는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대요."

난 담배를 쭉 빨아다 들이마시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두목이 죽어서 그런가? 그래서, 짐승들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모르고요?"

성가연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선가에서 다시 우두머리를 섬기며 웨이브를 만들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추측만 다들 하고있어요."

리버린 타고 달려오면서 숲 속에 있는 놈들을 제법 죽였었지.

하늘에 박쥐들도 수를 엄청 줄여놨고.

그 때 우두머리만 죽은게 아니라 산 속의 짐승들도 상당히 죽었다.

난 흐음 하곤 성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산 속에 제법 남아는 있겠죠?"

성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주민들이 늘 관측할 수 있도록 관측 드론 몇대를 넘기고 간다더라고요. 날씨가 맑아질 때까지 우리 특임대원들이 주민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치기로 했어요."

난 살짝 놀란 얼굴로 성가연과 성규혁을 바라봤다.

"그런 것도 다룰 줄 압니까?"

성규혁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사용법 정도는 군에서 다들 배웠습니다. 정찰도 우리 임무중 하나니까요.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흐음.

특임대원들, 믿음직한걸.

성규혁이 말했다.

"몇대는 주민들에게 넘기고, 몇대는 우리가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우리 구역과 성훈씨 구역 안정성이 크게 늘어날 겁니다."

"그거 고마운 말이군요."

길이 1미터 남짓의 작은 정찰기 정도면 웨이브 발생염려 없이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테니 서래마을에게도 우리에게도 더할나위 없다.

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마트 사람들은 잘 있을려나.

비만 그치면 박대위가 헬기 타고 날라와 바로 돌아갈 수 있을텐데.

아, 그렇지.

난 성규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치누크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저거 그냥 놔두고 가긴 좀 아까운데."

미군이 가져가기로 한 몇대와 우리의 한대를 제외하고도 네 대나 이 기지에 남는다.

아깝다, 진짜.

하지만, 조종할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성규혁이 미소짓고는 말했다.

"박대위님과 김대위님은 차후 경비행기를 타고 오실 겁니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경비행기? 헬기는 어쩌고요?"

"지금 서래마을 인원들이 종합운동장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어요. 거기에 치누크와 우리 헬기 격납고를 세울거랍니다. 박대위와 김대위는 경비행기를 타고 와서, 치누크를 타고 돌아갈 겁니다."

아아, 그렇게 되나.

난 피식 웃었다.

"김대위님도 헬기 조종이 가능한 분이었습니까?"

"아닐겁니다. 아마 박대위에게 혼나가면서 지금 배우고 있겠죠. 어차피 주조종사는 박대위니까, 김대위님은 보조 역할만 해 주면 됩니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치누크 승무원은 세명이 필요하다고 했던것 같은데... 괜찮은 겁니까? 두사람으로?"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제 연락했을 때 박대위님이 될거같다고 하셨으니 된다고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타이밍이 좋았어요."

"타이밍?"

성규혁이 웃고는 창 밖으로 턱을 까딱거렸다.

"장마 말입니다. 김대위님은 헬기 조종법을 배워야 되고, 주민들은 드론 사용법을 배워야 되고, 우리는 미군이 넘긴 것 외에 가져갈만한게 있는지 목록을 점검할 수 있으니까요."

난 성규혁의 표정을 보곤 미소지었다.

"괜찮은걸 많이 얻었나보군요?"

"네. 특히 항공연료 제조를 위한 첨가물을 엄청나게 얻었습니다. 적어도 1,2년 안에 연료가 부족해 헬기를 못 띄울 일은 없을겁니다."

오오.

그거 잘 됐네.

원래 있던 헬기와 치누크, 거기다 항공연료까지 생겼으니 작전반경이 대폭 늘어난 셈이다.

...가족을 찾는게 한 걸음 가까워졌다.

"...잘 됐군요."

나는 미소짓고는 창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다시 피워물었다.

장마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끝났다.

정오가 지났을 무렵.

미군은 치누크 여러대에 전투원과 무기를 가득 채워 하늘로 날려보냈다.

우선 목적지를 확보하고, 남은 전투원과 민간인들은 순차적으로 치누크가 왕복하며 옮긴다는 계획이었다.

우리측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우선 치누크에 가득 실어놓은 10톤의 무기와 탄약, 폭발물을 먼저 보내고, 다시 돌아와 대원들과 연료 등을 싣고 가기로 했다.

대원들 모두가 마지막에 타기로 했고, 나는 지금 바로 떠난다.

아직 여기저기 웅덩이진 활주로 한가운데, 우리 치누크.

걸어가는 사이, 조종석에 앉은 박대위와 김대위가 보였다.

두 사람은 군용 헬멧까지 제대로 착용해 이젠 제대로 된 승무원처럼 보인다.

나를 발견한 박대위와 김대위가 손을 흔들어온다.

나도 마주 흔들어 주었다.

새삼 반가운걸.

"성훈씨!"

뒤에서 성가연이 나를 부른다.

돌아보니, 미군들 몇이 특임대원들 옆에 서 있었다.

방금까진 없었는데?

잘 보니, 목발짚은 미군 지휘관도 보인다.

성가연이 나무상자를 들고 내게 뛰어왔다.

"이거, 저 분이 선물이라고."

선물?

뭐지?

나무상자를 받아들어보니 영어가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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