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187)

[TOM L. JACKSON]

톰 잭슨.

미군 지휘관 이름인 모양인데.

열어보니, 시가가 가득 들어있다.

...오오!

미군 지휘관, 톰 잭슨이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워놓고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거 고마운 선물을 받았는걸.

정찰드론을 들고있는 지역 주민들도 저 멀리 서서 내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

나도 미군들과 지역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치누크에 올랐다.

"듣자니 고생 많이 했다더군요. 몸은 좀 괜찮습니까?"

부조종석에 앉아있던 김대위가 내게 물어온다.

난 어깨를 으쓱하곤 미소지었다.

"괜찮습니다."

김대위가 미소지으며 끄덕이더니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출발할테니 앉아서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십시오."

끄덕이곤, 세번째 승무원이 앉는 자리인 듯한 의자에 앉아 벨트를 맸다.

기이이이잉-

치누크의 엔진이 가동되었다.

* * *

반포 종합운동장은 떠나기 전에 비해 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주위 사방에 어디서 뜯어낸 철조망과 펜스, 온갖 가구들을 세우고 묶어놓아 튼튼한 바리케이트를 쳐놨다.

딱 봐도 보통 노동력이 아니었을거다.

바리케이트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밤낮으로 동원되었을 것이라는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가 떠난 사이 주변정리도 해놨는지 치누크가 굉음을 뿌리며 착륙하는데도 좀비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반포 종합운동장과 서래마을.

이 두 구역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거의 완전한 안전지대가 되었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며, 나는 치누크에서 내려 서래마을의 정부측 거점, 모텔로 돌아갔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성훈씨의 활약은 우리 특임대장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해냈군요."

대통령 민정우가 내 손을 잡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난 미소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말씀을요. 특임대원들이 고생 많이했습니다."

리버린 타고 강물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같이 죽을 고생을 한데다, 미군들과 같이 경계서고 무기를 나르고 드론 사용법을 가르치고, 특임대원들 이번에 정말 고생 많이했다.

내가 뭘 했다해서 그들의 노력을 깎아내리거나 내가 다 했다는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다.

송규태 중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항공연료도 얻어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한시름 놨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안준규 비서실장도 내 곁으로 왔다.

"무기 뿐만이 아니라 저 대형 헬기에다 지역 농민들과 동맹까지 맺으셨다고요. 훌륭합니다. 한반도를 수복하는 것도 이대로면 꿈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활약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쁨에 가득 차있는 목소리.

표정과 말투.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는데, 모두 대답해줄 수도 없다.

내 팔과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잡고 기뻐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환대를 뒤로하고 서래마을 끄트머리로 향했다.

사다리로 오르내려야 했던 서래마을 바리케이트는, 이제 좌우로 열고닫는 철판 문짝을 만들어놨다.

나가있는 동안 정말 애 많이 썼네.

이런것도 다 해놓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배웅해준다.

바리케이트 위에서 경계보던 4팀 특임대원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돌아가십니까? 쓰시던 자전거를 챙겨놨습니다."

그러며 문 앞을 가리킨다.

그곳엔 내가 타고 다녔던 자전거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아아.

자전거.

그리 오래 떠나있지 않았는데도, 자전거를 보니 감회가 느껴진다.

나는 웃고는 말했다.

"아뇨. 필요 없습니다."

바리케이트 철문으로 다가가자, 아래쪽에 서있던 특임대원이 문을 열어준다.

콰르르륵-

문 열어준 특임대원이 내게 물었다.

"걸어가십니까? 길이 멀텐데 호위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난 미소짓고는 철문을 나섰다.

미군들과 지역주민들.

성가연과 성규혁을 비롯한 특임대원들.

모두가 이젠 안다.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걸.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반포대교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저장고를 열어 돌개바람을 움켜쥔다.

그리고, 내 앞에 뿌렸다.

-슈화륵!

순백의 모터바이크.

돌개바람이 나타났다.

뒤에서 탄성이 터져나온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돌개바람에 올랐다.

으르르르릉-

나직한, 그러나 묵직한 엔진소리.

나는 그대로 돌개바람을 몰아 달려나갔다.

가아아아앙-!

품 안에서 은서가 가늘게 떨며 신음했다.

"하아, 하아..."

아아, 기분 좋았어.

땀이 흘러 눈가로 흘러내렸다.

난 눈가를 손으로 밀어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더워. 에어컨 켜놓은거 맞지?"

"켜놓긴 했는데."

은서가 일어나려다 푹 엎어지고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성훈씨가 갑자기 덮쳐서 창문을 못 닫았어요. 빨래 널고 있었는데..."

난 웃고는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은서의 손을 당기며 말했다.

"이리 와. 같이 씻자."

은서가 혀를 쏙 내밀더니 침대에서 나와 내 팔에 매달려 온다.

그러며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소지었다.

예쁜데.

바퀴벌레때 내게 몸을 던진 이후, 은서는 묘하게 밝아진 느낌이다.

웃는 얼굴도 자주 보이고, 은근히 기대오거나 나를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동아리 회장도 해가면서 혼자 뭐든지 할 수 있는 당찬 운동녀라는 인상이 제법 사라졌다.

어쩌면 이게 은서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한시간쯤 지나 옷과 무장을 갖춰입고 1층으로 내려가니 훈이 아재가 마누라랑 웃으며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선생님. 외출하십니까?"

"네. 서래마을에 또 가봐야죠. 밤새 별 일 없었습니까?"

훈이 아재가 웃으며 말했다.

"예, 선생님. 조용합니다. 정말로 요즘엔 개미새끼 한마리 안 보여요."

"잘 됐네요."

난 미소지었다.

마트 물자는 아직 풍족하다.

쌀도 밀가루도 각종 소스나 양념도 아직 넘치도록 남아있어서 굳이 이 지역 다른 마트나 편의점을 털 필요는 없다.

즉,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는거다.

요즘시대에 영화관에 갈 일도 없고, 외식을 할 일도 없으며, TV는 이젠 나오지도 않는다.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하거나 같이 노는게 전부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몰라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의 가족처럼.

꽤나 아늑한 종말이라고 해야되나.

"선생님. 요즘 좀 살 맛 나네요."

훈이 아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마누라가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훈이 아재가 뜨끔하더니 내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세상이 망한게 좋다는 뜻이 아니라요. 사람들 죽고 그런건 좀 안됐지만, 예전에는 바쁘고 힘들고 살기 팍팍해서 마누라하고 이야기도 제대로 못 했거든요. 맨날 퇴근하면 피곤해서 자기 바빴고."

무슨 말인지 알 것같다.

훈이 아재가 웃고는 말했다.

"요즘엔 하루종일 마누라하고 붙어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사람들도 다 좋고, 맛있는거 만들어서 나눠먹고 그러다 보니까 이게 좀 사람 사는건가. 요즘 그런 생각이 좀 들어요. 참 이상하지요, 선생님?"

솔직히 나도 약간 그렇게 느끼고 있다.

바로 옆집이라도 얼굴도 모르고, 얼굴을 알아도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자기 일하면서 사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정작 종말을 맞아 세상이 망하고 나니 사람들끼리 돈독해진다.

희한한 일이다.

평소같았으면 나부터도 파트너를 세명 네명씩 맞아들일거란 생각 같은건 하지도 못했겠지.

난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고 아무 일 없으면 그게 제일 좋은거죠. 수현이하고 예은이 혹시 보셨습니까?"

"아, 그 두분 활 연습한다고 마트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그래요?"

몸을 돌리려니 훈이 아재 마누라가 나한테 꾸벅 목례를 해 온다.

나도 목례해주곤 마트로 들어갔다.

핏. 쒸웃-

"아, 졌어어어!"

수현이가 머리를 감싸며 몸을 요리조리 비틀고 있다. 예은이는 그런 수현이를 보면서 웃고있었다.

"왜 이렇게 활 잘 쏘는거야? 나 몰래 연습해?"

"핫, 핫, 하. 천재잖아. 연습 같은건 나 정도쯤 되면 할 필요도 없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난 웃어버렸다.

"뭐해? 무슨 내기해?"

"어, 오빠!"

두 사람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칼 찼네? 서래마을 갈거야?"

"음. 가야지. 혹시 뭐 필요한거 있어?"

수현이와 예은이가 서로 돌아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냥 무사히만 돌아와. 응?"

"그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갸웃하며 수현이와 예은이를 바라봤다.

"활 쏘는거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총은 연습 안 해?"

예은이가 고개를 저었다.

"총은 무겁고 무서워요. 전 활이 좋아요. 재밌어요."

"그래?"

수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밌어 이거."

그러더니 웃으며 말했다.

"옛날 같으면 와우 레이드 뛰면서 놀았을건데 이젠 하지도 못하니까."

"서버 닫혔어?"

수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완전히. 아예 접속도 안 돼. 커뮤니티도 대부분 닫혔어."

음...

그렇다는 말은 넷플릭스나 왓챠, 웨이브 같은것도 이젠 다 끝났다는 소리같은데.

"심심하겠는데?"

수현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있잖아, 신기해. 하나도 안 심심해. 요즘이 오히려 옛날보다 더 재밌는거같아."

으잉?

난 갸웃하곤 웃었다.

"요즘이 더 재밌다고?"

예은이가 끄덕이며 말했다.

"요즘처럼 사람들하고 이야기 많이 해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폰 들여다보고 있을 때보다 요즘이 더 편하다고 해야하나, 매일매일이 더 재밌는거 같아요."

그러더니 내 눈치를 살피곤 한마디를 덧붙였다.

"바깥에서 다치고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요."

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할거 없어. 지금은 그냥 우리만 생각해."

"그래도 되는걸까요...?"

난 예은이와 수현이를 번갈아 바라보곤 말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어. 그렇지? 지금 있는 사람들만, 그냥 나 자신만 생각하면 돼. 다른건 생각하지 마."

예은이와 수현이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난 웃고는 말했다.

"서래마을에 갔다올게. 필요한거 있으면 전화해."

"아, 오빠."

수현이가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자 수현이가 예은이 눈치를 살피더니, 우리밖에 없음에도 속삭이듯 말했다.

"저, 그 나쁜 사람들, 바퀴벌레들한테 잡혀있다가 도망나온 여자들 있잖아."

"응. 왜?"

그녀의 말에 예은이의 얼굴도 살짝 어두워졌다.

뭔가 있나본데.

수현이가 한걸음 다가와 나직이 말했다.

"두사람 임신했어. 혹시 더 있을지도 몰라."

...임신했다고?

난 놀라며 수현이를 바라봤다.

예은이도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어떡하면 좋냐고 울고 그러더라구요. 혹시 서래마을에서 도움 줄 분이 계실까요?"

...아.

그러고보니 서래마을에서 특임대원들이 구조했던 사람중에 분명히 어떤 아줌마가 산부인과 의사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한 번 알아볼게. 여자들 잘 달래주고, 혹시 무슨 일 벌이지 못하게 신경 좀 써줘."

"응. 아, 우울증 약 같은거 혹시 구할수 있으면 도움 될거같아. 구할수 있을까?"

"그래, 그것도 알아볼게."

한숨이 나온다.

그 바퀴벌레놈들, 뒤져서도 민폐네 진짜.

난 한숨쉬곤 물었다.

"한태는 뭐하고있어? 준혁씨하고 태영씨는?"

"한태는 지금 신기술 개발했다면서 그, 친해진 여자애랑 둘이서 카스테라 만들어 볼거라고 그랬고... 나머지 두사람은 뭐하더라?"

"옥상에서 할머니랑 소은이랑 다른 여자들이 텃밭 일하는거 돕고있어요. 할머니가 총 기겁하는데도, 남자들은 총 꼭 있어야 된다고 하나씩 메고."

"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서 박쥐 얘기를 들은 이후 옥상경계를 스스로 강화한거구만.

하늘로 뭐가 날아올지 모르니까.

"옥상에 미니건은 설치해놨고?"

"다 해놨지! 나를 뭘로보고오!"

난 웃고는 말했다.

"그래. 다녀올게."

여자들이 내게 손을 흔든다.

"잘 다녀와아! 다치지 말구! 응?"

"저녁때 꼭 와야돼요. 네? 오빠."

난 손을 흔들어주곤 마트 건물을 나섰다.

돌아온지 일주일째.

평택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사람들은 몹시 놀랐지만, 이미 인간이 괴물로 변해 사람을 물어뜯고 다니는 것부터 정상이 아닌 시대이기 때문인지 받아들이는 것도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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